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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딛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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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딛 2:11-14)


오늘은 교회가 종려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온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며 외친(요12:12-13) 사실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무리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곧 하나님이 보내시는 약속된 메시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온 성이 소동할 정도로(마21:10) 큰 기대 속에 입성하신지 한 주일도 지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은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죽음이 곧 이스라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자신을 십자가에 내주시는 일이 곧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는 일이었고, 유일하신 친아들을 그렇게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시게 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 11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났다” 하고는 14절에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이라고 말한 뜻입니다. 

본문 11절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시되 유대인과 이방인, 남녀노소, 사회적 지위 등의 차별 없이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14절 끝에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밝히기를 우리로 하여금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미래의 소망과 오늘의 삶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대답합니다. 

첫째로 미래의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본문 13절에서 쓰듯이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본문 12절에서 말하듯이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4절에서 말하듯이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복된 삶을 소망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 가운데 선한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백성이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런 백성이 되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본문 12절에서 그는 쓰기를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 합니다. 

물론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며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하나님의 백성 되는 것이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 머리에서 쓰기를 “우리를 양육하시되”라고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합니다. 

또 본문 14절에서는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라고 함으로써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성화시켜 가시는 성령의 역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구원의 사역을 믿는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하시는 일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를 날마다 조금씩 성화시켜 가시는 일도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에게 응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는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응답이며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응답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본문 12-14절을 다시 봅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종려주일에 교회에서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 식으로 그 주간의 끝 날인 금요일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그 바로 전날인 목요일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최초의 성만찬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찬예식에서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먹고 마십니다. 떡과 포도주는 각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는 극악무도한 죄인을 처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죄를 지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까? 그것은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래서 우리를 우리의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기를 원하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 대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 하셨고, 또 잔을 주시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7-28)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찬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그의 십자가 위에서의 우리를 위한 대속적 죽음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재확인하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마다 그저 죄 사함 받은 것을 기뻐하는 데에 그치며 만족하지 않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의 복된 삶에 소망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살기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장래의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을 바라보면서도 오늘 여기에서의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을 성실히 살기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신중하고 의로우며 경건한 삶을 살면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기를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깨끗한 삶을 살기로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신 뜻임을 마음에 새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성찬에 임하는 우리의 바른 자세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바른 신앙의 고백과 삶의 다짐으로 성찬예식에 참여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놀랍게 우리 안에 차고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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