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제자, 마리아? 가롯 유다? (요 12:1-8)

첨부 1


제자, 마리아? 가롯 유다? (요 12:1-8) 

<중간에 끼인 이야기: 나사로의 소생과 세족식 사이에서>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입니다. 이제 한 주간이 지나면 고난주간이고, 바로 그 다음 주일이 부활절입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고난주간 한 가운데 들어와 있는데 오늘 읽은 복음서말씀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봉독한 요 12: 1-8절 말씀은 11장과 13장 사이에 끼여 있는 말씀인데 반드시 이 양쪽을 다 봐야지만 의미가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예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리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남매는 예수님과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셨기 때문입니다(11: 35).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눈물 흘리신 경우가 딱 세 번 있었다고 기록하는데, 그 중에 한 번이 바로 나사로의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에 몹시 슬퍼하셨고 눈물을 흘리실 정도였다는 말이지요.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을 때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한편에서는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공모합니다. 요 11: 53절을 보면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적어도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후부터 예수님을 죽이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음모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놀랍게도 복음서는 전체 분량의 거의 1/3 정도를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부분에 할애합니다. 그래서 초대 기독교의 한 주석가는 복음서야말로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을 기록한 연대기로서 서론이 조금 길어진 것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 12장은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수난을 알리는 서곡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족식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나눈 최후의 만찬, 즉 성만찬 예식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정작 세족식은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족식을 통하여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을 일시에 뒤집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일일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허리에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발을 씻겨주는 행위는 너무도 치욕스러웠기 때문에 심지어 주인도 노예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주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 제자들도 남의 발을 씻겨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13: 14-15). 세족식이야말로 예수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 나라가 교만과 경쟁의 나라가 아니라 겸손과 섬김의 나라인 것을 보여줍니다. 
  

<돌발사태: 마리아 엄청난 일을 저지르다!>

이제 다시 오늘 읽은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본문 말씀은 11장에서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야기와 13장에서 예수님이 세족식을 베푼 이야기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남매의 집에서 일어납니다.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이 다시 살려주셨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 일행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언니인 마르다는 여기에서도 예수님을 시중드느라고 바쁩니다(12: 2).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한창 식사 분위가 무르익었을 때 갑자기 이 집안의 막내인 마리아가 예상 밖의 행동을 합니다. 3절을 보세요.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그야말로 돌발사태가 일어난 것이지요! 예수님 당시에는 노예도 주인의 발을 닦아주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했는데 마리아의 이런 해동은 예수님의 노예가 되어도 부족할 정도로 지극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는 인도산 최고급 나드 향유입니다. 5절에서 가룟 유다가 책망하는 소리로 볼 때 이 향유 한 근은 삼백 데나리온 어치나 됩니다. 노동자 한 사람이 거의 1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할 때 가난한 집안의 마리아로서는 전 재산을 쏟아 부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비싼 향유를 쏟아 부은 것도 큰 낭비인데 더 놀라운 사실은 마리아가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잘 가꾸어온 머리털은 한 사람의 존엄성을 보여줍니다. 특히 여성이 곱게 길러 반짝 반짝 윤기가 나고 치렁치렁 긴 머리카락은 그 여성에게 큰 매력이요 자부심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자신의 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다는 사실은 극도의 존경과 헌신의 표시입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까닭은?>

이제 궁금한 것은 마리아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한 것일까요? 향유라는 것이 한꺼번에 쏟아 부을 경우 냄새가 순식간에 증발하기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써야 합니다. 그런대 일시에 다 쏟아 부었다는 것은 노동자 1년치 임금을 한꺼번에 낭비했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아는 왜 이 엄청난 낭비를 마다하지 않았을까요? 

제일 먼저 예수님이 친정 오라버니 나사로를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 때문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오릅니다. 얼마 전에 자기 집안의 가장이요 아버지와 같이 믿고 의지하던 오라버니가 죽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이 슬프고 암담했는데 예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거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너무 커서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깨트려 은혜를 갚고자 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오라버니를 살려주신 것에 비하면 그까짓 것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 아니라 그 이상도 주님께 바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요 11: 39절에 보면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제 마리아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본문 3절을 보면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 해졌습니다. 죽음의 냄새가 사라지고 생명의 향기가 가득 차게 된 것이지요! 오늘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감사하면 시체 썩는 고약한 냄새가 바뀌어 온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향기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한 일은 감사 그 이상입니다. 마리아의 낭비는 ‘거룩한 낭비’로써 제자도의 모범을 보인 행위입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 위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행위는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너희도 그대로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미리 실천한 겸손과 섬김의 행위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마리아의 이 행위야말로 13장에 나오는 세족식을 미리 예고하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그 다음에 본문 7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마리아가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장면은 장차 있게 될 예수님의 시신을 향유로 닦는 예식을 미리 준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예비한 거룩한 예식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리아야말로 모범적인 제자입니다. 정확하게 예수님의 모범을 그대로 따르는 본받을만한 제자입니다. 장차 예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기시고, 또 제자들의 젖은 발을 수건으로 닦아주신 것처럼 마리아 역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닦아주는 겸손과 섬김의 행위를 실천한 것이지요! 

이제 여성이지만 가장 본받을만한 모범 제자로 등장한 마리아와 달리 정반대로 본받아서 안 될 제자 한 사람이 나옵니다. 가룟 유다이지요. 4-6절 말씀을 봅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마리아가 엄청난 향유를 낭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가룟 유다가 역정을 냅니다. 다른 11명의 제자들은 다 가만히 있는데 유독 유다가 화를 냅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왜 낭비하느냐는 책망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현장에 있었더라면 가룟 유다와 같이 계산적인 현실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유다의 눈에는 돈만 들어왔습니다! 마리아의 낭비가 거룩한 낭비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으면 자신의 전 재산인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지 그 뜨거운 사랑을 몰랐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지만 가룟 유다는 말로만 “가난한 사람” 운운했지 실제로는 이웃을 돕는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6절은 분명히 가룟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욕심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남의 돈에 욕심을 품는 도둑일 뿐 가난한 사람을 돕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도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자기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말만 잘 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왜 그 엄청난 돈을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데 쓰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 낭비하느냐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도움을 준 일이 별로 없다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가룟 유다와 같은 위선적인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칭찬 받고 가룟 유다는 꾸중 듣고>

이제 우리는 본문 말씀의 결론부인 예수님의 반응을 살펴보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7-8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예수님은 먼저 마리아를 적극 두둔하십니다. 마리아가 하는 일을 그대로 놔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향유를 미리 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야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알고 예수님의 장례식을 미리 준비한 선지자와 같은 제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한 일은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에 그냥 놔두라는 말씀이지요!

그 다음에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위선을 은근히 꼬집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곧 제자들 곁을 떠나가시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제자들 주변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때에 슬기로운 제자들은 무엇이 중요하고 덜 중요한가의 경중을 잘 헤아려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다보니 교회 건축 문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말하기 좋은 사람들은 왜 비싼 돈 드려 건물을 짓느냐, 그 돈 가지고 가난한 이웃도 돕고 개척교회도 세워주는 것이 더 좋지 않으냐고 딴지를 걸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오늘 주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건대 우리에게는 무엇이 더 시급한가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십자가를 지시고 제자들 곁을 떠나실 예수님, 그 예수님께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장례식을 미리 준비하고 지극한 사랑과 존경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과 언제나 제자들 주변에 있어서 얼마든지 나중에도 도울 수 있는 가난한 이웃의 문제는 우선순위가 다릅니다. 

한 엄마가 어린 딸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무엇을 얻기 위해 기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어린 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엄마, 저는 무엇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좋아서 기도할 뿐이에요.” 

참 아름다운 대답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께 기꺼이 드릴 수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낭비로 보일지 몰라도 이와 같이 아낌없이 드리는 것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때로 분에 넘치게 아낌없이 일방적으로 쏟아진다는 사실에서 ‘거룩한 낭비’이듯이, 우리 역시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낭비’에 우리의 ‘거룩한 낭비’로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제자, ‘마리아’와 ‘가룟 유다’? 누가 주님의 참 제자입니까? 우리는 가룟 유다가 아닌 마리아와 같은 제자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