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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의 진정한 의미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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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의 진정한 의미 (막 11:1-10)     
 
종려 주일은 십자가 수난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공식 입성을 축하하는 날로, 사순절의 6번째 주일이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 날이기도 합니다. 만왕의 왕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당시 메시야로 개선하는 왕처럼 오심을 환영하는 뜻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해서 종려주일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첫 종려주일에 있었던 일들을 돌아보면서 그 의미와 교훈을 몇 가지 간단히 보고자 합니다. 사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입성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큰 목적, 큰 일이 기다리고 있잖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위에서 죽으셔야 하는 그런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을 보면 실망스러울 정도로 예루살렘 입성이 초라하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본문 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가까이 있는 감람산 근처인 벳바게와 베다니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 둘을 보내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을 보면,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서 보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탄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어 있을 것이니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3절을 보면 어느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하고 물으면 ‘주께서 쓰시려고 하십니다. 다 쓰시고 나면 지체없이 이리로 다시 돌려보낼 것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 둘은 가서 나귀가 바깥 길 쪽으로 나 있는 문에 매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풀었습니다. 

그 때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새끼 나귀를 풀어다가 어디에 쓰시려 합니까?” 그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대로 말하였습니다. 6절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합니다. “주님이 쓰시고자 하십니다. 쓴 다음에는 그 자리에 갖다가 놓겠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허락합니다. 

제자들이 새끼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 놓으니 예수님께서 그 위에 타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제자들의 자세입니다.(2-4절) 

2절을 보면 제자들은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그대로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맞은편 마을에 가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 한마리가 매여 있을 터이니 그것을 풀어오라고 명하실 때 제자들은 결과가 어떻게 될지 염려하지 않고 말씀대로 순종을 했습니다. 어찌 보면 누구 것인지도 모르고 그냥 끌고 오라는 것은 도적질해 오라는 말과 흡사히 들립니다. 

혹 주인이 나귀를 줄 런 지, 아니면 그냥 끌어 오다가 도둑으로 오인 받을 수 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데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간다면 비아양 거리는 소리를 들을 런지도 모릅니다. 혹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말만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예수님이 하라 하신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였고 말씀하신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인생의 행로에 있어서 그 행로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우리는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의 앞길 어느 누구도 모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 길이 험하고 또 어려우며 또한 그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만일 주님의 명령이요 뜻하신 말씀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신앙을 가집시다. 

인간의 이성이나 전통이나 문화 아니면 내 느낌에 상치된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라면 순종할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치나 논리에 안 맞는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하라 할 때 순종하면 다 이루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돌보아 주십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 순종합니다.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명령 말씀이라면 기쁨으로 순종하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나귀 주인의 신앙입니다.(5-6절)

제자들이 무조건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여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갈 때 5절을 보면 그 나귀 주인은 아무런 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주님이 그렇게 쓰시도록 허락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나귀 주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귀한 생애가 이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주님의 일을 위하여 나를 들어 쓰시겠다 하실 때 하나님의 섭리, 뜻으로 받아들이며 기꺼이 순종하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드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7절 말씀을 보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그 나귀 주인은 새끼만 드린 것이 아니라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까지 모두 드린 사실을 봅니다. 한 마리만 끌고 온 것이 아닙니다. 어미와 새끼 두 마리 이상 끌고 왔습니다. 보통 사람으로는 큰 재산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보잘 것 없지만 주님이 쓰시겠다니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여러분의 물질을 주님이 쓰시겠다하면 영광 축복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재능을 쓰시겠다하면 큰 영광 축복 아닙니까? 시간, 재능, 나를 들어 쓰시겠다면 행복해 하시기 바랍니다. 쓰임 받는 분들은 사실 괴로운 분들이 아니라 행복한 성도들입니다. 괴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하나님의 준비되시고 뜻하신 사람들, 은사들, 물질들, 시간들인 줄 믿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사십시오. 부담이니 짐이니 시간이 없으니 하지 말고 순종하여 들어가도 나가도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건강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350장 나를 일군 삼으신 주 크신 능력 주시어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줍소서. 이 가사의 은혜가 넘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예루살렘의 거민들입니다.(7-10절)

7절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끌어오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종려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습니다. 이는 지극한 존경과 헌신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특별히 헌신과 봉사가 분수에 지나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겉옷만 벗어 드리겠습니까? 속옷도 벗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리를 가자하면 10리 인 들 못 가겠습니까? 왼뺨을 대라하면 오른 뺨도 댈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사실은 제자들이 순종하여 나귀를 끌고 왔고 다음에 자신들이 먼저 겉옷을 벗어 깔고 그 위에 예수님 타시라고 하는 모습을 보더니 무리들도 감동을 받아 무리들도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다가 깔았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에 감동된 모습입니다. 이것을 영적 전염병이라 합니다. 

먼저 믿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따라합니다. 자꾸 비판하면 옆에 사람들도 비판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부정적인 말을 자꾸 하면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부정적인 사람들로 변합니다. 불평을 하면 불평하는 사람들로 변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먼저 믿음 사람들로 좋은 것을 전염시키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옷을 벗어 예수님의 나귀에 깔아드렸더니 무리들도 그렇게 헌신적으로 행하고 그 다음에는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9절을 보면 호산나 호산나 노래합니다.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침니다. 호산나!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찬양합니다.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찬양과 감사가 어우러진 모습입니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감격적입니다. 이런 역사가 어찌 일어납니까? 어디서 이런 힘이 솟아났습니까? 어디서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까? 감동의 물결이 일어납니까? 주님이 쓰시겠다는 말씀에 제자들이, 나귀 주인이 순종할 때 일어났습니다. 

그저 주님의 명령에 섭리요 뜻이 분명히 있는 줄 믿고 응답합시다. 주님 섬기는 일에 열정을 회복하고 살아있는 주님의 교회로 세워 나가며 대접받는 자리에서 내려와 새끼 나귀를 타는 겸손으로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여! 쓰시옵소서! 외치며 거룩한 감동을 사람들에게 전염시킵시다. 호산나 찬송이 한없이 울려 퍼지는 교회로 세워 나갑시다.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온 세상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합니다. 주님께서는 기왕이면 승리와 개선의 상징인 군마를 타고 수천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위풍당당하게 입성하시지 왜 나귀 그것도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셨습니까?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심은 바로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의 온유하심을 상징적으로 그대로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영원한 평화를 위해 겸손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기보다 그 반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남을 높여 주고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다 겸손의 나귀 새끼를 타시기 바랍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 명하신 자리까지 온유함으로 나가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사람들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접하고 인정해주느냐에 따라 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를 더 소중히 여기고 가치 있게 생각 합니다. 우리 주님의 심정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새끼 나귀를 타시고 겸손히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심은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고난 죽으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시고자 하시는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생을 방황하지 않고 바르고 의미 있게 살려면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 꼭 두 가지를 반드시 정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십자가에서 죄인 된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진실하고 분명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죄로 인해 저주를 받고 버림받은 자를 심판하는 사형 틀입니다.로마서 5:6-9을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라고 말씀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볼 때 우리가 죄인임을 정확히 가르쳐 줍니다. 죄인이 져야 할 것이 바로 십자가의 형틀입니다. 그 십자가의 저주와 고통은 바로 죄인인 내가 받아야 할 마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소유와 신분과 가치관을 기준으로 자기 자신과 사람들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시대, 성격에 가려 죄인으로서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나마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는 때는 고난당할 때입니다.

고난당하면서 그 동안 인격과 지식으로 위장했던 자신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수가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볼 때마다 자신의 실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죄의 저주와 심판으로 십자가의 모진 고통과 대가를 치르고 사망으로 끝나버릴 자신을, 영원히 지옥 형벌을 다 당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본래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 나를 볼 수 있습니다. 나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또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찬송가138장/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둘째는 십자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베푸신 사랑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을 사랑하신 사랑이며, 사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운명으로부터 건지신 사랑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지고 가는 것, 우리 죄를 인하여 대신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는 것 등 한 장면 한 장면 모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벌 받는다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절규하는 아들의 모습을 외면하면서까지 사랑하신 사랑인데도 말입니다. 

에베소서 5:2절을 보면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버리셨습니다. 그것도 가치 없는 나, 나도 포기한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버리사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 쪼개어지고 거기 십자가 위에서 온 몸이 찢기우고 부서져 피를 흘리며 드려졌다고 말씀 합니다.

엡1:7절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즉 저주 받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 사함을 받았음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원래 거기에 못 박혀야 할 내 모습입니다. 죄와 저주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을 대신 짊어지시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다시 결단할 수 있고,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도 믿을 수 있습니다. 수치와 조롱과 고통 그리고 억울함과 배신당함이 나를 위한 것이기에 바울의 고백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다”(갈2:20)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제자들과 같이 주님 말씀하시는대로, 말씀하신 곳에 서서 순종하시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나귀 주인처럼 누구의 말인지, 손익을 계산하지 말고 주님이 필요해 하시는 그 곳에 드릴 수 있는 귀한 믿음과 결단의 순종이 더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의 거민들처럼 평화와 겸손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흔들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들고 흔들며 구원의 노래를 부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깔아 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깔아 드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심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무슨 세상 나라도 아니고 무슨 대접을 받고자함도 아니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구원을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다른 것 보지 마시고 십자가 앞에서 묵묵히 자신을 살펴보는 시간으로 은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무엇을 보기 원하십니까? 저 십자가와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질문하시고 기도하심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실존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그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셨던 하나님 사랑을 머리나 지식 만으로가 아닌 이제는 가슴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이 한 주간을, 더 나아가 한평생을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드리는 귀한 삶이 다 되시기를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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