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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루살렘을 항하여 가신 예수 (눅 19: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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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항하여 가신 예수 (눅 19:28-40)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이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들에 있는 나뭇가지를 들고 환영했는데 요12:13을 보면 그 나무가 종려나무 가지라고 한데서 유래했다. 즉 종려주일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사실은 수난 주간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주일이다.

누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이유를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1. 십자가를 지시고 별세하기 위해서다. (눅9:30~31)

눅9:30~31을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셨다.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날 때 문득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였다. 율법의 대표자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자인 엘리야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별세를 예고한 것이다.

깊이 졸고 있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여기 나타난 두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어야 하고 예수님이 그 죽음의 별세 장소가 예루살렘이라는 것을 주목하지 못했다. 깊이 조는 사람들은 들어야 할 음성을 듣지 못한다. 영혼이 잠든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심지어 설교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조는 사람은 본질이 아닌 것만 듣고 본다. 참으로 안타깝다.
  

2. 부활하여 승천한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다. (눅9:51)

눅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여기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란 말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실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이다. 죽고 부활을 하시면 승천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음을 믿는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부활하셨음을 믿는가?
그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예수님이 내 삶에 새 생명을 부어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음을 믿는가?

그 예수님이 승천하신다.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요한계시록에서 배운대로 요한계시록의 최고 주인공이 되신 분, 어린 양으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 예수님께서는 죽어야 함을 알았고 고통을 짊어질 때 부활의 면류관임을 알았다. 그 예수님은 다시 승천하심을 알았다. 그러므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승천할 날짜를 맞추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신 것이다. 

이 일이 쉬운 일이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공부를 열심히 하면 판사가 된다는 것을 안다. 영어를 열심히 하면 반기문 총장처럼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영광을 바라보되 고통과 인내, 아픔의 과정을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생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행을 굳게 결심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다. (눅9:53) 지체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가지 않아도 되는 구원 사역이 아니다. 승천의 기약을 미룰 수 없어서 예루살렘을 가시는 예수를 보라. 즉 승천하려면 부활하여야 하고 부활하려면 별세, 즉 죽어야 하는데 그 길을 가는 것이다.
  

3. 말씀에 기록된 것을 응하게 하기 위해서다. (눅18:31)

눅18: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성경 말씀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다. 그 예수님에 대한 기록들이 희미하게 예언되어 있다. 그런데 그 예수님에 대한 기록들이 응하게 하려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된다. 사실 구약은 예수님을 보여준다. 

모세 오경은 모세 오경대로, 시편은 시편대로, 선지서는 선지서대로 예수님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죽게 하시고 별세하게 하시는데 예고 없이, 준비 없이 보내겠는가? 구약 성경 속에는 보내실 예수의 모습을 담았다. 그래서 기록된 말씀대로 예수가 살고 죽고 부활하실 때 세상 사람들이 이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고 믿지 않겠는가?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는 연한 순 같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 같다. 

이 이사야 13장에서 예언했을 때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꺾이시고 죽음에 넘겨지셨다. 채찍에 맞고 징계를 받고 처형을 받으셨다. 그래서 그 고난 받으신 분이 성경에 보내시리라는 예수님인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록된 말씀대로 된 사건이기에 예수님인 줄 알아보고 믿고 동의하는 것이다.

눅24:26~27을 보라.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놓고 번민과 슬픔에 빠져 있었다. 삶이 온통 물음표였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이 나그네로 나타나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말하며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더디 믿는 미련한 자들에게 구약의 성경이 예수에 관해서 기록된 책임을 언급한 것이며 그 기록된대로 예수님이 오셨고 사셨고 고난 받으셨고 부활됨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것은 말씀이 예언이 된 것이며 그것을 응하게 하기 위한 걸음인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가르쳐 주는 예루살렘 행은 이렇게 세 가지 이유에서 예수님이 걸어 나가신 것이다.   

오늘 본문을 보라. 오늘 본문 눅19:28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고 하였다. 얼마나 집중되는 이야기인가? 얼마나 가슴에 부딪치는 이야기인가? 세상에 어떤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앞서 가신다는 이 이야기가 우리의 가슴에 불과 열정, 용기와 설렘을 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죽기 위해, 살아서 승천한 기약을 맞추기 위해, 그리고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을 이루기 위해 고난으로 걸어 나가셨으니 그 분의 순종은 놀랍다. 채찍과 징계, 형별로 걸어 나가셨으니 그 분의 내려놓음은 놀랍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걸어 나가셨다.

우리는 어떻게 걷고 있는가? 우리는 기다리는 일들이 아무리 영광스럽다 하더라도 고난의 가시밭 길을 지난다 할 때 앞장 서 갈 수 있을까? 뒤로 빠지고 숨어 있다가 달아나는 비겁쟁이가 아닌가? 예수님은 앞서 가셨다. 내가 사모하고 내 삶에 영원한 주인되신 예수님은 이루어야 할 아버지의 맡기신 사명을 거절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에 순종함으로써 두려움을 모르는 이처럼 앞장 서 가셨다. 그것이 종려주일의 예수님이다. 우리들도 사실 이 예수님을 따라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맡기신 사명을 위해 책임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한다. 속장으로서 영혼을 돌보는 기도의 짐을 거부하며 이불 속에서만 지내는 안일함을 버리고 나아가야 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자.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나귀를 타고 가신 눅19:28~48의 말씀이 전해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은 겸손과 평화의 왕이시다. 

슥9:9을 보면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전쟁의 승리자는 나귀를 타지 않는다. 전쟁의 장수는 승자가 된 후 백마를 탄다. 백마는 주목받는 색이다. “나를 보라. 나는 승자다.”라고 하기 위해 백마를 탄다. 허나 나귀 중에 나귀 새끼는 무엇인가? 세상이 말하는 전쟁의 승자가 타는 것이 아니다. 나귀는 겸손의 상징이고 화평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싸움쟁이로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왕으로 오셨으나 말과 활을 끓고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하는 왕으로 오신 것이다.   

둘째, 예수님은 쓰임 받을 자를 알고 계시는 왕이시다.

① 눅19:30 주님은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알고 계셨다. 여기서 저기를 알고 그 나귀를 쓰려 한 것이다.

② 눅19:33~34를 보면 나귀 새끼를 풀 때에 나귀 새끼의 임자가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 내어드릴 것을 알고 계셨다. 나귀 새기의 주인은 흔쾌히 나귀를 빌려 주었으니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알고 계셨다.

③ 눅19:40 제자들의 소리 지름을 알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라.”고 말하며 소리 지를 때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하신다. 그때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하면서 제자들의 함성과 기쁨의 환호 소리 지금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쓰임 받는 나귀와 사람들의 생각, 제자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신 왕이셨다.  

셋째, 예수님은 예언을 성취시키시는 왕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이 되려면 예언한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스가랴 선지자가 오실 왕이 나귀 새끼를 탄다고 예언했으니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 예언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종려 주일에 코미디를 하려고 나귀 새끼를 탄 것이 아니다. 세상을 비웃고자 나귀 새끼를 탄 것이 아니다. 오직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드러내고자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나타내고자 하신 말씀의 이루어짐, 말씀을 말씀으로, 예언을 예언으로 계시하시려는 왕의 엄숙한 모습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죽으셨다.(히13:12) 

이 계시의 모든 이야기가 나를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나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 우리는 능히 왕되신 예수님께 찬양해야 한다. 그 분이 쓰시려고 원하시면 나귀도 드리고 겉옷도 드리고 종려나무 가지도 드리고 마음의 기쁨도 드리고 모든 것을 드리며 왕이신 예수를 높여야 한다. 

우리도 히13:13의 말씀처럼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를 따라 나아가야 한다. 고난 주간에 더욱 예수에 집중하고 변화된 품성, 겸손과 화평의 품성, 순종의 품성을 드리도록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 품성학교에 몰입하기를 축원한다. (김철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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