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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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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4-60)

많은 교우님들께서 아시는 것처럼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고무줄 새총에 맞아 왼쪽 눈의 눈조리개가 파열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때부터 시력이 약화되었고, 지금도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그 날 저는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돌이 날아올 줄 몰랐기에 피할 수도 없었고, 또 알았다 해도 너무 빨라서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쳤기에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날아오는 돌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공포는 없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돌이 날아오는 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맞아야 했다면 돌에 맞는 것 자체보다 날아오는 돌을 쳐다보고 있는 시간이 더 두려웠을 것입니다. 

고대 역사를 보면 많은 나라에 <투석처형제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들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아래로 밀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으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돌들을 던졌다고 합니다. 죄수는 죽는 순간까지 사람들의 증오의 눈빛을 바라보아야 했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돌들을 바라보아야 했고, 그 돌들에 맞아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이들에게는 돌에 맞는 아픔보다 날아오는 돌을 바라보는 공포가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사람>의 이야기는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사정없이 돌팔매질을 합니다. 그 돌에 맞아 이마가 깨지고 뼈가 부스러집니다. 그것이 두렵습니다. 철학자 키엘케고르는 <세상에 두려움의 대상 없이 사는 존재는 없다>고 했습니다만, 당장이라도 날아올 것 같은 돌멩이들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지금도 북한이 전쟁 위협을 하고 있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6.25 전쟁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전쟁의 참상이야말로 사정없이 날아와 이마를 깨뜨린 모난 돌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분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이란 돌에 맞아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중풍, 암과 같은 돌멩이에 맞아 쓰러져 있습니다. 실패라는 돌멩이, 상실이라는 돌멩이, 허무함이라는 돌멩이, 염려와 근심이란 돌멩이 등, 이 세상에는 암석의 종류만큼이나 우리에게 날아오는 돌멩이들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돌멩이들이 사정없이 날아드는 한복판에서 두려워합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때때로 끝까지 저 자신을 목회자로서 믿음 가운데 잘 지킬 수 있을까, 끝까지 건강하게 사역을 마칠 수 있을까, 교우님들을 영적으로 잘 섬길 수 있을까 염려합니다. 또 우리 교회가 아무 어려움 없이, 평안한 가운데 사명의 짐을 잘 질 수 있을까, 교회가 지속적으로 힘을 얻고 부흥될 수 있을까, 성도들이 늘 한 마음으로 섬길 수 있을까, 영도라는 지역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염려합니다. 때로 이런 염려들은 기도가 되어 하나님께 올려 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기도 합니다. 아직은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손에 들려 있는 돌처럼 가만히 있지만, 잠시 후에는 그 돌이 공중을 날아 날아오지 않을까 두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교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그 돌멩이들이 우리에게 던져질 때, 어떻게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저는 본문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님>을 통해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을 배우고자 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님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일곱 집사님 모두가 훌륭했지만, 그 중에서도 스데반 집사님은 단연 으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 8절을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예루살렘 교회의 재정 관리와 구제 사역만 감당한 게 아니었습니다. 말씀도 전하고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복음이 널리 퍼지는 것을 극도로 증오하던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님을 잡아 공회 앞에 세우고, 거짓 증인을 통해 집사님을 고발했습니다. 그 정황이 사도행전 6장 12절 이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 위협적 분위기에서도 스데반 집사님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습니다. 

그 다음 7장은 스데반 집사님이 공회 앞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구약을 훑어 내려오면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을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을 죽이는 악을 자행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에 찔림을 느끼면서도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54절을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악에 악을 더하여 아예 스데반 집사님을 죽이고자 달려들어 성 밖으로 끌고 나가 돌을 던져 죽였습니다. 57-5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고 했습니다. 이리하여 스데반 집사님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셨습니다.  

여러분, 화면에서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의 순간을 그린 그림을 보십시오. 이 순간은 스데반 집사님께 얼마나 두려운 순간이었을까요? 살기등등한 사람들 앞에 서 있을 때, 그들의 일그러진 분노의 얼굴을 대했을 때, 도와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때, 그들에게 짐승처럼 끌려 나갈 때, 그들의 손에 들린 돌들을 보았을 때, 그 돌들이 사정없이 날아와 그의 몸을 부술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스데반 집사님은 어떻게 그 와중에서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순교의 제물이 될 수 있었을까요? 스데반 집사님뿐만 아니라 믿음의 선배들은  어떻게 그 두려움들을 이기고 믿음과 인생을 지켜낼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은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눈앞에는 분노한 사람들과 그들이 던지는 돌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분은 그것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끌려 나가 돌팔매질을 당하기 전에 이미 스데반 집사님의 시선은 다른 데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바라본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 55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할렐루야! 바로 이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이미 눈앞의 세상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앞의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눈에는 험악한 사람들의 모습도, 그들이 던지려는 돌멩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추악한 것들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만이 보였습니다. 그를 위협하는 것들을 바라보지 않으니,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성도들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을 보면 베드로도 그러하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먼저 갈릴리 바다를 건너게 하시고, 당신께서는 홀로 남아 기도하시다가 한 밤 중에 물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신도 물위를 걷길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부르셨고, 베드로는 물위를 걸었습니다. 마태복음14장 28-29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정말 놀라운 광경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갑자기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잘 걷던 그가 왜 갑자기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일까요? 마태복음 14장 30절은 그 이유를 분명히 말씀합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그 이유는 <바람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물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사나운 바람과 물결을 바라보는 순간, 물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예수님만 바라볼 때 비로소 안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는 순간,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언젠가 제 아버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6.25 전쟁으로 모든 가족과 재산을 잃고 홀로 남으셨을 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남한 땅에서 오갈 데도 없을 때, 신경쇠약에 걸려 몸은 뼈만 남았고, 죽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났다고 합니다. 이때는 사방에서 모난 돌들이 사정없이 날아와 아버님의 인생을 부수는 때였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 고통의 순간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눈물지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 거야. 그래도 그 때 주님을 믿었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너도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어...> 

성도 여러분, 사방에서 우리를 향해 돌멩이가 날아올 때, 그 때 그 돌멩이들을 보지 마십시오. 돌을 던지는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보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돌멩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님은 어떻게 하늘을 우러러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었을까요? 아니 질문을 바꾸어 예수님은 어떻게 하늘에 계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 거기서 숨을 거두시는 것은 수많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함께 목도한 사실이었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와 몇 사람의 여성들에 의해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은 커다란 돌로 봉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덤에 계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스데반 집사님이 올려다본 하늘에 계신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무덤에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그 분의 본래의 자리인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9절은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당신의 종 스데반 집사님이 사람들의 돌팔매 속에서 세상의 삶을 끝내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사랑하는 종을 영접하기 위해 일어서신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바라본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본 순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돌멩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돌멩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고, 빛나는 순교자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무덤에 계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예수님을 바라보며 살길 원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죽음의 고통을 이겼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가장 닮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마지막 순간에 드린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와 같았습니다. 

우선 본문 59절을 보세요.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는 이 기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기도와 같습니다. 

누가복음 23장 46절을 보면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기도를 보십시오. 본문 60절을 보십시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아멘.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는 이 기도는 <누가복음 23장 34절>의 예수님의 기도와 닮았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생애 마지막에 남긴 말은 돌에 맞아 죽는 데 대한 원망도, 절규도, 저주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생애를 거룩한 기도로 끝마칠 수 있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의 용서를 비는 기도라면 그것은 기도 중 최고의 기도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바라보는 대상을 닮게 마련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바라보았기에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았기에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두려움을 이길 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아름다운 삶을 남길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가 올려다보길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영의 눈이 열리길 원합니다. 날아오는 돌멩이 대신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승리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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