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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사망을 죽인 그리스도의 부활 (마 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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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을 죽인 그리스도의 부활 (마 28:1-10)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1815년 6월 영국 해군과 불란서 해군이, 워털루에서 대접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아직 무전 시설이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범선에서 보내는 신호를 보고 육안으로 식별하여, 전세를 판가름할 때였습니다. 영국 국민은 해전을 치르고 있는 웰링턴 장군으로부터 보내오는, 전쟁의 결과에 대한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바다에서 싸우고 있는 범선으로부터 신호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신호의 내용은 ‘웰링턴이 패배했다’는 비보였습니다. 

전 영국 국민은 쓰라린 패배감과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웰링턴이 패배했다’는 비보를 전하고 난 후, 바다는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버렸습니다. 이 소식은 즉시 전 영국에 퍼졌습니다. 남편이나 자식을 전쟁터에 내보낸 아내나 부모들은 통곡을 했고, 영국 왕실도 비통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얼마가 지난 후 바다의 안개가 걷혔습니다. 그리고 배로부터 다시 신호가 왔습니다. 그 신호의 내용은 ‘웰링턴이 적을 패배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곧 전 영국에 퍼졌습니다. 전 영국 국민이 길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기쁨으로 날뛰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셨던 그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가 패했다’는 슬픈 소식이 입과 입을 통하여,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퍼졌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 주일 새벽 빈 무덤을 발견한 제자들과 여인들의 입을 통하여, ‘예수가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소식이 전파되면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새 역사의 아침이 밝아지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가 패했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승리의 소식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복스럽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을 다스릴 권세도 주셨습니다. 오직 한 가지만을 금하셨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이 하나님의 명백한 금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즉시 1)그의 영은 하나님에게서 단절되는 죽음을 맛보았고, 2)그의 육체도 930년을 향수한 후 죽음이 찾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절대로 자연스런 현상이 아닌, 사고요, 이변이요, 질병이요, 재앙입니다. 성경은 사망을 자연 현상이 아닌,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임을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또한 성경에 의하면 사망은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정죄, 하나님의 저주 등으로 말씀합니다. 아담의 범죄 타락 후 인간세계에 찾아온 이 죽음에 대한 성경의 진술을 보면, 롬 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담의 범죄 타락 이후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왕 노릇을 해 왔습니다. 시 90:6에는 사망을 가리켜 ‘홍수처럼 쓸어 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망은 모든 사람을 모조리 쓸어 갑니다. 이를테면 가장 철저한 싹쓸인 것입니다. 왕상 2:1에는 사망을 가리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는 영웅(英雄), 호걸(豪傑), 가인(佳人), 재사(才士) 모두 예외가 없는 것입니다. 잠 30: 16에는 사망을 가리켜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온 인류를 삼키고서도 전혀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 죽음의 절대적인 세력 앞에, 인간은 공포와 전율로 떨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2:16절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인간 최대의 절망이 무엇일까요? 중한 질병일까요? 가난일까요? 실직일까요? 인간 최대의 원수는 무엇일까요? 공산당일까요? 핵무기일까요? 인간 최대의 슬픔은 무엇일까요? 사업의 실패일까요? 실연일까요? 이러한 것들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인간 최대의 절망, 인간 최대의 원수, 인간 최대의 슬픔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를, 사랑하는 연인을, 친구를, 모든 인간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죽음은, 분명히 인류의 가장 큰 원수인 것입니다. “누가 그 아름다운 날의 한 조각만이라도 가져다 줄 것이냐?”고 탄식한 시인이 있지만, 죽었던 남편이, 죽었던 자식이, 돌아가셨던 부모가 다시 살아나서 한 달만이라도, 아니 하루만이라도 함께 살수가 있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 가슴 벅찬 감격이 없을 것입니다.

MBC 개국 10주년 기념 현상 수기 당선작 ‘불길을 뚫고’의 작가이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는 수기의 저자인 채규철씨는, 30대에 처참한 화상을 입고 아내가 밀어 주는 휠체어를 타야만 하게 되었는데, 그 분신 같은 아내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아내를 금촌 공동묘지에 파묻고 텅 빈 집에 돌아온 나의 공허, 허무, 울어도 울어도 풀리지 않는 심장을 에이는 듯 한 쓰라림은, 이 세상 아무도 달래 줄 수 없었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만약 인생이 죽은 후에 이대로 썩어 없어진다면, 나는 그 차가운 절망의 서글픔을 참고 참다가 끝내 이기지 못하고,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그녀의 옆에 한 줌의 흙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잃고 난 나에게는 ‘부활’이란 ‘있다’ ‘없다’는 문제가 아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었다.”고 절규합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안 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 아픔을 맛보는 날이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이 찾아 올 것입니다. 죽음! 그것은 정녕 인간에게 너무도 슬프고 절망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오늘 새벽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 최대의 원수인 죄와 죽음과 지옥의 권세를, 철장으로 질그릇 깨트리듯이 부수어 버리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니, 이 어찌 가슴 설레는 희소식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래서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세계에 찾아오신 날인 크리스마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크고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B. C와 A. D로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의 생애도, B. C와 A. D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대학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하는 어떤 일보다, 훨씬 더 큰 결정적인 사건에 속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인 성탄절의 의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부활하신 이 사건, 이 소식에 대하여는 인간 언어의 모든 형용사, 모든 감탄사, 모든 수사를 다 동원해도, 그 놀라움과 그 기쁨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토록 놀랍고 기쁘고 즐거운 부활주일입니다.

이렇듯 우리 기독교는 부활이라는 독특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수도 없이 많이 있지만, 부활의 종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요즘 불교가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 여러 가지 면에서 기독교를 모방해 가고 있습니다. 찬불가도 만들어 부르고, 교패도 만들어 붙이고, 또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가 아무리 기독교의 것을 모방한다고 하여도, 모방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부활입니다. 불교에는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탄생하게 된 것은 부활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우러러보는 그 부처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자도 죽었고, 마호멧도 죽었고, 공산주의의 칼 마르크스도 죽었고, 물론 예수 그리스도도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성도들의 영광과 소망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입니다. 부활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메카 성에 있는 마호멧은 그 무덤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에게는 무덤이 없습니다. 묘비가 없습니다. 다만 천사의 입으로 “그가 여기 계시지 아니하고, 그의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는 선언만 있을 뿐입니다. 성지 순례 때 예수님의 빈 무덤에 쓰여 있는 “HE IS NOT HERE. HE HAS RISEN!” 라는 문구를 보고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부활하셨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도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오클라호마의 유명한 흑인 목사 페리(E. W. Perry)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상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좋은 예화를 들려주었습니다. 한 마리의 큰 뱀이 바다 속을 헤엄치면서 많은 산 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가진 큰 물고기를 집어 삼켰습니다. 이 물고기가 뱀의 뱃속을 들어가 보니 너무 캄캄한지라, 여기서 나가리라 하고는 날카로운 지느러미를 사용해서, 그 뱀의 배를 찢고 빠져나와 버렸습니다. 그 뱀을 죽이고 나오니까, 다른 작은 고기들도 모두 뒤를 따라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이 뱀은 죽음이라는 괴물을 가리킵니다. 이 괴물이 오랫동안 인류를 집어 삼켰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까지 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여시고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그를 따라 무덤에서 일어날 것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개종하기 전 사도 바울은 그토록 기독교를 핍박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난 후,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 사도 바울은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전 15:42-44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현재의 우리 몸과, 부활 후의 우리 몸이, 4가지 면에서 아주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부활체는

1)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삽니다. 

현재의 몸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 썩어지고 말 것입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청춘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장년의 영광도 시들고 맙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썩지 않고, 따라서 영원히 삽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하고 쇠퇴하지만, 오는 세상에서는 사랑스러운 것은 영원히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을 것이며, 아름다운 것은 영원히 그 아름다운 광채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2)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삽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의 삶이 육체적인 감정이나, 정열이나, 본능 때문에, 자칫하면 욕된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장래 부활할 우리의 몸은, 죄스러운 정열이나 충동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순수한 봉사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할 수 없는 우리의 영광이 될 것입니다.

3)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삽니다. 

현재의 몸은 병들고, 노쇠하고, 마귀를 상대하여 늘 유혹의 그릇이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병균에 의해서도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것이나, 부활의 몸은 영원히 건강하여 굳세며, 어떠한 위험이나 질병의 침해를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계 21:4에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삽니다. 

빌 3:21에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의 그 부활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신령한 몸이 되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축지법이나, 슈퍼 맨, 중국의 무술 영화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신비한 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몸이라고 할 때, 꼭 그러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이 모든 찌꺼기에서 정결해지고, 최고도로 순결하고 거룩해 질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 몸은 불 범죄가 불가능하지만, 부활할 우리의 몸은 범죄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는 환상과 꿈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예배, 완전한 봉사, 완전한 사랑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 우리 몸을 이렇게 부활시켜 줄 것입니까? 고전 15:45에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靈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라고 했고, 요 11:25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활시켜 주시고, 그토록 놀랍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할렐루야!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이젠 저녁이 다 되었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뚜기야, 내일이 뭐니? 어떻게 내일 또 놀자고 하니?” 메뚜기는 말하기를 “잠시 후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모든 동물이 다 잠을 자게 되는데, 잠자는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향하여 날씨가 무더워져서, 메뚜기가 정신이 나갔나 보다고 놀렸습니다.

그 후 메뚜기는 개구리와 친구가 되어 온 여름을 함께 놀았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만나 다시 놀자” 메뚜기는 개구리에게 내년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말하기를 “흰 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속에 들어가서 오래 오래 겨울잠을 자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 때가 내년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놀렸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나 내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해서, 그 세계를 쉽게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천국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내세가 있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던 사람의 관 앞에서 하룻밤을 울어 새워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죽음이 얼마나 비통한 것인지를 모르고, 따라서 부활의 필요성도 절감하지를 못합니다. 저는 ‘마음이 아프다’는 또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체험을 통해서 아는 사람입니다. 죽음이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아는 사람은,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망’ 이란 말은 죽고 망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그 날은 사망이 죽던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 최대의 원수와 같은 사망이 죽던 날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노예였던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잔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고, 하늘나라에서 깨어납니다. 천국에서 사랑하시는 주님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는, 감사와 감격에서 깨어납니다. 거룩하고 맑은 새 공기로 숨을 쉬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이란 이 세상에서 저 천국으로 이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슬픔과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한 이 땅에서, 눈물이 없고, 아픔과 질병, 가난과 죽음, 죄가 없는 평화의 세계, 복된 세계로 옮겨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 절망의 최악의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죽는 일이며, 반대로 인간 기쁨의 최고의 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일 것입니다. 가슴이 터질 만큼 벅찬 소식, 우리의 영과 육을 죽음과 허무에서 부활시키며 영원히 살리신다니, 이 소식 외에 인류에게 달리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기쁘고 즐거운 부활 주일에, 주님께서 부활 하사 지금도 살아 계신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 모두 그 예수님을 마음속 깊이 신뢰하고, 그분께 여러분의 삶을 전적으로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부활하신 그 주님께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께 대한 가장 아름다운 충성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곧 복음을 전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살아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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