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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 안에 감추어진 또 하나의 길 (출 14: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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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안에 감추어진 또 하나의 길 (출 14:10-20)

영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문호는 단연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입니다. 빅토리아 시대의 역사가요 수필가였던 토마스 칼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은 ‘인도제국과 셰익스피어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하라 한다면 영국인은 당연히 인도제국을 포기할지언정 셰익스피어는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마만큼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며칠 전 영국의 웨일즈 애버리스트위스 대학교(Aberystwyth University)의 연구팀에 의해서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셰익스피어는 유럽이 대기근으로 신음하던 16세기 말에 매점매석과 고리대금을 일삼았던 무자비한 사업자요 악적지주였다고 합니다. 16세기 말은 ‘작은 빙하기’라고 불릴 정도로 유럽은 심한 추위와 폭우로 큰 흉년이 들어 극심한 식량부족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지주였던 셰익스피어는 15년 동안이나 곡물 사재기를 했고, 극심한 기근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중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되파는 방식으로 부당한 재산을 축적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줘 부당이익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식량난이 절정에 다다랐던 1598년에는 약 2,300kg에 달하는 곡물을 사재기하다가 적발되어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셰익스피어의 부끄러운 과거가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비평가들과 학자들이 셰익스피어가 돈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그런 사실을 간과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실이 발표되자 학계에서는 그의 대표작인 『리어왕』(King Lear)`과 『코리올라누스』(Coriolanus)와 같은 작품을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토마스 칼라일이 말한 것처럼, 셰이스피어는 인도제국과 바꾸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영국인들에게는 자부심이요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그런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나면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의 작품의 위대함은 여전히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될 것이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부끄러운 과거를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감추어진 것이 영원히 비밀로 남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부끄러운 과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며칠 전에는 국제적인 조세피난처로 유명한 영국령의 버진아일랜드에 재산을 은닉한 사람들의 명단이 유출되어 곧 수천 명의 이름이 공개될 것이라고 알려졌습니다. 버진아일랜드에 재산을 은닉한 사람들은 비밀이 보장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겠지만, 세상에 비밀은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습니다. 지금은 감추인 것같아 보일지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만천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꼭꼼 숨기고 감추려 해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태복음 1026) 그렇습니다. 비밀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렇듯 지금은 감추어져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비단 나쁜 비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도 많이 있고, 지금은 우리의 눈으로 발견할 수 없지만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피난을 떠난 지 400여년의 시간이 흐른 뒤입니다. 야곱이 그의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갈 때에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로 있었기에, 그들은 환대를 받았습니다. 7년 동안 계속되는 극심한 가뭄을 잘 대비해서 애굽 사람들을 가뭄 중에서도 굶주리지 않고 풍족하게 살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 국무총리인 요셉입니다. 그런 고마운 총리인 요셉의 가족이 왔으니 애굽 사람들이 환영하고 환대해 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애굽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천덕꾸러기로 변하고 맙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왕과 사람들은 자기들 나라에서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이방인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계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인구가 많아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국의 편이 된다면 자기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삼고 중노동을 시키며 학대하게 되었습니다. 노예가 되어 국고성을 짓는 일에 동원되어 잔혹한 노동을 해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중에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탄식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해방시켜주십니다.
  
물론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인데, 그 노동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생겼는데, 어느 왕이 순순히 그들을 내보내주겠습니까? 어떻게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으려 하는 바로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10가지 기적을 통해서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애굽 전역에 있는 모든 집에서 장자가 죽는 것입니다. 그 재양에는 애굽의 왕궁이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왕의 장자 역시 죽임을 당하고야 바로 왕은 결국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들고 백기투항을 하게 됩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끝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서 출발합니다. 

400년만입니다. 야곱이 그의 가족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가서 살게 된 지 벌써 400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그들은 애굽 땅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으며 고통 가운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해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을 향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찾았을 뿐만 아니라, 약속의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며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렇게 희망을 갖고 떠나서 드디어 홍해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큰 아들이 죽는 바람에 엉겹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준 바로 왕은 뒤늦게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를 보내 이스라엘을 뒤쫓아 가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을 뒤쫓아 간 군사를 오늘 본문 바로 앞인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선발된 병거’라는 말은 특수훈련을 받은 군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병거는 말 두 마리가 이끄는 특수 전차를 말합니다. 말 두 마리가 끌다가 한 마리가 적군의 화살에 맞아도 나머지 한 마리로 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병거에는 두 명의 군사가 타고 있는데, 병거 뒤쪽에는 화살이 가득 실려 있어서 한 사람은 병거를 몰고 다른 한 사람은 달리면서 화살을 쏠 수 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진 무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기를 하나도 가지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해서 중무장한 병거는 요즘으로 말하면 탱크와 같습니다. 그런 탱크 600대뿐만 아니라, 일반 병거도 수없이 많이 동원되어 이스라엘을 뒤쫓아 가게 됩니다. 

해방되었다는 기쁨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가게 될 것이라는 희망과 설렘으로 애굽을 출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뒤쫓아 온 애굽의 군대를 보자 두려워 떨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애굽은 당시 최강대국입니다. 그 최강대국 애굽이 최신 무기로 무장한 군대를 보냈으니, 그 모습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떤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 애굽의 군대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애굽의 군대가 몰려온다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애굽의 군대의 칼날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떠는 이유는 꼼짝없이 애굽 군사들의 칼날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사들이 사막의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자니 홍해바다에 빠져죽을 것만 같고, 뒤돌아 싸우자니 자신들에게는 애굽의 군사와 싸울만한 어떤 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꼼짝없이 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는 모세를 향하여 이렇게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여기로 이끌어내어 이 황량한 광야에서 우리를 죽게 만드느냐? 당신이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어오지 않았다면 그냥 애굽에서 애굽 사람들의 노예로 살면서 이렇게 광야에서 개죽음을 당하진 않을 것 아니냐?’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죽음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애굽의 군사들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는 것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또 하나의 길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런데 모세는 믿음을 통해서 또 하나의 길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3-14절)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살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피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었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믿음을 통해서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 이를 때까지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주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애굽 땅 전역에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나일강에서 올라온 개구리가 온 땅을 뒤덮는 모습도 보았고, 땅의 티끌이 이가 되어 애굽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도 보았습니다. 들에 나가 있던 애굽 사람들의 가축들은 전염병으로 죽어갈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돌보고 있는 가축들은 한 마리도 죽지 않았습니다. 

메뚜기 떼가 애굽의 곡창지대를 훑고 지나가는 끔찍한 재앙도 친히 보았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는 기적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0번째 재앙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건너가고, 애굽 사람의 집에만 장자들이 죽는 불가사의한 재앙이 임하는 광경을 지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에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려 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10번째 재앙 이후에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방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를 얻어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길에서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오늘날도 이집트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전 국토의 3.5%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까지 다 합해도 5%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사막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머물러 살고 있는 곳이 아니면 어디를 가든지 전부가 사막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왕의 해방허락 명령이 떨어진 후 홍해에 이를 때까지 그들은 먼 사막을 가로질러 와야 했습니다. 사막은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여 온도가 40도 이상 올라가는 뜨거운 날씨가 계속됩니다. 반대로 밤에는 기온이 급속도로 내려갑니다. 두꺼운 옷을 입지 않으면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로 추위가 몰아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사막을 가로질러 오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스럽지 않게 사막길을 가게 해 주셨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를 이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또 얼마나 큰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여기서 꼭 죽을 것만 같습니다. 뒤쫓아 오는 애굽 군대의 칼날을 피해 전혀 살아남을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능력을 베풀어 주셨던 그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인생에 고통과 여러 가지 문제들이 가득 차 있어서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기도하며 달려왔는데, 앞뒤가 꽉 막혀서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신 대로 /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왔는데, 갑자기 길이 사라져버려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작은 선택을 할 때에는 우리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우리가 가야할 길,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깊이 고민하며 기도한 후에야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알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오랜 기간 동안 고민하고 기도해도 내가 선택해야 할 길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 바른 선택을 하려 해도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 우리는 길이 없다고 좌절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길은 언제나 있기 때문입니다. 

앞뒤가 꽉 막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혀 있고 뒤에는 애굽의 정예부대가 고함을 치며 따라오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는 이 난국을 극복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길 하나를 감추어놓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길입니다. 홍해를 가로질러 나 있는 길입니다. 그 길은 아무도 볼 수 없는 길입니다. 믿음을 가진 모세도 그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그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시는 길이 있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몰랐습니다. 그 길이 홍해 가운데로 나 있는 길임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그 길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자, 거세게 출렁이던 홍해가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안으로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아무도 한 번도 건너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 열려진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눈에 보이는 길조차도 바르게 찾아가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지도를 찾아보고 만반에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계획한 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처음 가는 길에는 언제나 혼란이 있고, 그 길을 가려 할 때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 인생의 길을 처음 밟으며 가야 합니다. 살았던 삶을 되돌려 다시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기에 우리는 우리 앞에 길이 있을까 늘 두려워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내가 가야 할 바른 길을 찾으며 가야 합니다. 
  
때로는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우리 앞에 놓인다 하더라도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새로운 길을 준비해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 길을 기대하며 찾아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만 우리는 감추어진 그 길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출렁이는 홍해 속에도 길을 만드시는 분입니다. 없는 길도 만드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나그네 두 사람이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아득했습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높은 산과 바다와 골짜기도 넘어야 했습니다. 한 나그네가 동행자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멉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면서 가노라면 목적지에 닿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그의 동행자인 다른 나그네가 이렇게 말합니다. “길은 땅에 있습니다. 땅을 보면서 걸어가야 합니다. 하늘을 본다고 길이 보입니까?” 그러자 나그네가 대답합니다. “하늘을 보면 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늘을 보고 가렵니다.” 그러자 동행자인 다른 나그네가 다시 대답합니다. “땅을 보아야 길을 찾을 수 있지요. 나는 땅을 보면서 가겠습니다.” 이렇게 두 나그네는 서로 자기 의견만 고집하다가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한 나그네는 부지런히 하늘을 보며 걸었습니다. 하늘의 해와 달이 길을 비추어 주었고, 별들이 반짝이며 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때로는 눈비가 올 것을 알려 주기도 하고, 바람이 부는 방향도 알려 주었습니다. 나그네는 하늘의 안내를 따라 열심히 길을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땅만 보며 가겠다던 나그네 역시 자기 생각대로 땅만 쳐다보며 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길이 끊겨버려 길이 없는 숲속을 헤매기도 했고, 골짜기를 건너 열심히 걸었지만 캄캄한 어둠뿐일 때가 많았습니다. 몇 날을 걸어도 산도 하나 넘지 못한 채 오던 길만 뱅뱅 돌고 있을 뿐,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길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을 찾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하나의 길이 있음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보다 먼저 믿음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은 세상 사람이 보고 간 길을 가지 않고, 믿음을 통해서 보여지는 길을 따라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믿음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홍해 한 가운데로 난 길 - 그 길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 앞뒤가 꽉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좌절하지 마십시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길이 있음을 믿고 사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린도후서 4:8-9) 

왜요? 우리에게는 능력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길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길을 찾아보십시다. 믿음 안에는 하나님께서 감추어놓으신 또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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