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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드로아 교회 (행 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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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아 교회 (행 20:1-12)


부흥회는 한국 교회에서 제일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겠지만, 한국 교회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가 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1900년 대 초기에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은 우리나라의 초기 기독신자들로 하여금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가운데 큰 회개운동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을 가져오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바로 초대교회 최초의 부흥회라고 할 만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소아시아의 작은 항구 도시 드로아에 있던 교회에서 어느 주일 저녁부터 밤새도록 모였던 '일일 부흥회'였습니다. 
  
본문 1절로 6절에 "1소요가 그치매 바울이 제자들을 불러 권한 후에 작별하고 떠나 마게도냐로 가니라 2그 지경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에 이르러 3거기 석 달을 있다가 배 타고 수리아로 가고자 할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4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5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 6우리는 무교절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 닷새만에 드로아에 있는 그들에게 가서 이레를 머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 교회에서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사역했던 사도 바울은 이제 그들과 "작별하고 떠나" 다시 예루살렘을 향한 길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그의 여정에 약간의 변동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원래는 "헬라" 즉 고린도에서부터 "배 타고 수리아로 갈" 계획을 세웠었지만, 자기를 해하려는 유대인들의 "공모"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게도냐로 돌아가는" 즉 그들을 피해서 돌아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런 일정 변경 때문에 뜻밖에 득을 본 사람들은 바로 드로아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쪽으로 돌아서 소아시아로 들어올 때 바로 이 항구 도시 드로아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덕택에 드로아 교회 교인들은 어느 주일 밤에 그 위대한 사도 바울을 모시고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그 날 밤에 드로아 교회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통하여 과연 어떤 교회가 진정 늘 '은혜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은혜로운 교회는 예배드리러 모이는 열심이 뜨거운 교회입니다. 

7절과 8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7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8우리의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모인 날은 "안식 후 첫날"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이므로 이 날은 바로 오늘날의 주일에 해당됩니다. 
그들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다"고 그 목적을 밝혔는데, 이것은 바로 성찬식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실들은 이미 초대교회 당시부터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켜 예배드리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이레를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드로아 교회에서 바로 그 주일 예배를 함께 드리기 위하여 일부러 그랬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지금 오순절 이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고자 하는 바쁜 여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더구나 원래 예정과는 달리 멀리 돌아가는 길이 되었던 까닭에 더욱 시간이 촉박했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빠듯한 일정에 쫓기고 있었는지는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라는 구절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드로아에 도착했을 때 일부러 일주일이나 머물렀던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즉 드로아 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일 드로아 교회가 주일 아닌 안식일에 정기예배를 드리고 있었더라면 그처럼 바쁜 사도 바울이 일부러 하루 더 기다리기까지 하면서 주일에 특별집회를 열 리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이처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주일이란 아무리 자기 일정이 바쁘다 하더라도 성도들과 함께 꼭 지켜야 했던 가장 요긴한 시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촉박한 분위기 가운데 드로아 교회의 주일밤 집회는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설교는 깊은 밤중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전하는 자에게나 듣는 자에게나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내일 아침이면 먼 여행길을 떠나야 되니까 적당한 시간에 설교를 끝내고 일찍 자는 것이 좋겠다.'라는 따위의 염려는 바울의 심중에 전혀 없었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그 드로아 교회 성도들에게 단 한마디라도 더 말씀을 가르쳐 주어야겠다는 간절한 심정으로 그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늦게까지 강론을 계속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심정은 드로아 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 역시 다음날이면 일터로 나가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그날 역시 하루 온종일 일을 하고 그 밤집회에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아직 주일이 법정 공휴일이 아니었던 까닭에 그들 대부분이 다 낮에는 생업에 종사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 피곤한 몸을 가지고도 주일 밤 집회에 모였던 것입니다. 
실제로 다음 절에 나타나듯이 그 중에서는 너무 피곤해서 졸다가 창에서 떨어진 청년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육신의 피곤이 드로아 교회 교인들의 모이는 열심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모여 앉은 다락방에 "등불을 많이 켜 놓고" 아예 밤을 지새울 자세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드로아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주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이유도 변명도 있을 수 없었고 오직 부지런히 모이는 열심과 즐거움만 충만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과는 달리 오늘날 모이기를 게을리 하는 현대교인들이 무슨 전가의 보도처럼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두 가지 핑계가 바로 '바쁘다'는 것과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치 자기네만 열심히 일하고 사는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는 자들의 말입니다. 
사람 사는 생활이 바쁘고 피곤하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정말 차이나는 것은 오직 교회에 모이는 열심, 그 어떤 상황이나 조건도 핑계로 심지 않고 오직 모여야 할 예배의 자리에 부지런히 모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서 무슨 파티를 열려고 할 때 가장 섭섭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파티에 빈자리가 생기는 일입니다. 
비록 다른 손님들은 와 있다 할지라도 꼭 왔으면 하고 바랐던 손님이 한 명이라도 빠지게 되면 주인으로서는 참 허전한 것입니다. 
불참하게 된 이유가 무슨 급한 병에 걸리거나 불의의 사고라도 생겼기 때문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그저 막연하게 '바빠서, 피곤해서 못 간다.'라고 말한다면 그 주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섭섭하게 들리겠습니까? 
우리가 사람에게도 둘러댈 수 없는 애매한 변명을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한다는 것은 실로 뻔뻔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받는 은혜는 일단 예배에 열심히 모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모이지 않으면 받을 것을 받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도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던"(행 2:46) 것이 아니겠습니까? '은혜 받을 만한 때'에 은혜를 받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도 우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과 같이 되지 말고 '서로 권하면서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예배에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은혜가 넘치는 교회는 기도로써 온갖 시험을 이기는 교회입니다. 

9절과 10절에 기록하기를 "9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10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그야말로 은혜 충만한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던 그 드로아 교회의 주일 밤 예배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한 장면이 구석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유두고라 하는 한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9절에는 "청년"이라고 번역되어 있고 나중에 12절에 보면 "아이"라고 되어 있어 조금 혼동이 되지만, 이것은 헬라어 원어의 뉘앙스가 우리나라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충 우리말의 청년보다는 젊고 아이보다는 좀 많은 '청소년' 정도로 보면 될 것입니다. 
또 이 "아이"라는 단어는 당시 집에서 잔일을 부리던 사환에게도 쓰인 말이었으므로, 어쩌면 그 유두고 청년은 남들보다 더욱 힘든 일에 시달려서 더 피곤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왜 창가에 걸터앉아 있었는지 그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자리가 가득 차서 앉을 자리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등불을 많이 켜서 공기가 탁한 가운데 통풍이 잘되는 자리를 골라 거기 앉았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많은 주석가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 모임이 지루했기 때문에 무관심한 태도로 창가에 앉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오히려 스스로 졸리는 기운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찬 기운 도는 창가에 걸터앉았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지 간에, 그 유두고가 창가에 앉아 졸다가 떨어져 죽게 된 것은 분명 드로아 교회로서는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예배는 당장 중단되었습니다. 
모든 드로아 교인들이 얼마나 당황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태가 발생했을 때 사도 바울이 즉시 "떠들지 말라"고 말한 것으로도 보아 알 수 있듯이 온갖 설왕설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고, 우리 교회에 이 무슨 불상사냐?", "어찌된 일인지 누가 본 사람이 있느냐?", "뉘 집 아들인고?" 등등에서부터 시작해서, 어쩌면 "그 애가 평소에 예배 시간에 잘 졸 때부터 알아 봤다."라는 따위의 말도 오갔을 것입니다. 
하여튼 보통 큰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그 모든 드로아 시민들 앞에서 교회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로 큰 시험을 당하여 드로아 교회 교인들 모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난리가 났던 것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지도자로서 해야 할 바를 정확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내려와서 그 청년 위에 "엎드려" 그의 몸을 "안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 선지자가 죽은 자를 살리기 위해 기도했을 때 취한 자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고 동요하는 가운데서 사도 바울은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무엇보다도 그 청년을 살려 주십사고 기도부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즉시 그 청년에게 새 생명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청년을 다시 살려 주신 것을 확신한 바울은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라고 성도들을 진정시켰던 것입니다. 

나중에 12절에 보면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위로"라는 말은 '안위'라는 뜻입니다. 
정말 큰 안심이 그들에게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 청년이 그대로 죽어 버렸더라면 그 사건은 드로아 교회에 두고두고 계속 악영향을 미치는 큰 시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교회 안의 분위기가 무겁게 되는 것은 물론, 온 사회로부터 비웃음거리가 되고 전도의 문까지 막히게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기도로 그 청년이 살아나게 됨으로써, 이제는 오히려 그 사건이 드로아 교회 성도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은혜로운 체험이 되었으며 불신자들 앞에서는 또 하나의 확실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기도로써 시험을 이기는 승리, 이것이 바로 그날 밤 집회에서 드로아 교회 성도들이 체험했던 또 하나의 놀라운 은혜였던 것이었습니다. 

지상 교회에는 시마다 때마다 크고 작은 시험들이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그런 시험을 당했을 때 그 교회의 교인들이 취하는 자세에 있습니다. 
자그마한 일만 터져도 크게 소란을 떨고 난리를 치는 모습만 보인다면 오히려 그 시험은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떠드는 교인'들은 항상 별 것 아닌 문제를 진짜 큰 시험거리로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한두 사람의 실족으로 약간의 시험이 생기더라도, 혹은 교회 전체의 존속을 위태롭게 할 만한 큰 시험이 있을지라도, 성도들이 대처해야 할 자세는 바로 조용히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밖에 없습니다. 
시험 속에 같이 휩쓸려 들어가지 말고 오직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다 놓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만이 항상 최선의 상책이며 유일무이의 해결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도를 드릴 줄 아는 성도들이 있을 때, 교회는 시험을 이길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시험들을 큰 은혜의 체험들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무기를 가지고 시험을 이길 줄 아는 교회가 되어야만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안위함을 누릴 수 있는 실로 은혜로운 교회로 성장할 수 있음을 늘 기억하면서, 교회에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각자의 '골방'에서 또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은혜 충만한 교회는 말씀 선포와 성례 시행이 계속되는 교회입니다. 

10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이미 드로아 교회는 놀라운 은혜 체험들을 했습니다. 
특히 죽었던 청년이 살아나는 사건은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그 교회에 함께 계심을 그 누구나 똑똑히 느낄 수 있는 엄청난 체험이었습니다. 
드로아 교회의 그날 밤 집회는 이 사건을 통하여 그 절정에 도달한 듯했습니다. 
이보다 큰 은혜는 더 이상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사도 바울이 이미 받은 이 벅찬 은혜의 체험들을 깊이 간직하자고 마지막 한마디 권면을 하고 그저 감사찬송 한 장, 감사기도 한 번 같이 드리고 끝으로 축도해 주면 그야말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기에 적절한 순간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놀라운 장면을 이어서 증거해 줍니다. 
바로 11절과 12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11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12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고 한 것입니다. 

그 큰 사건 이후에도 정말 놀랍게 그 드로아 교회의 밤 집회는 계속되었습니다. 
여기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라는 말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성찬식을 거행했다는 뜻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만약 친교의 저녁 식사였다면 그렇게 밤늦은 때에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던" 그 주일예배의 목적을 잊지 않았으며, 유두고 청년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도 그 예배 순서를 조금도 생략하지 않고 원래 그대로 성찬식을 집행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역시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난 후에 다음 날 아침 길을 떠났습니다. 
여기 "이야기했다"는 말은 모든 성도들이 둘러앉아서 한마디씩 돌아가면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원문에 이 동사는 3인칭 단수로 씌어 있습니다. 
즉 바울 혼자서 이야기했다는 뜻으로서, 다시 말하자면 유두고 청년의 추락 사건이 있기 전에 그가 하고 있던 "강론"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내 설교가 너무 길어서 큰 불상사가 생길 뻔 했으니 오늘은 여기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라는 따위의 생각은 바울의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지금 막 겪고도 드로아 교회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예나 다름없이 성찬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사람 하나 죽었다가 살아난 일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그가 원래 전하고 있었던 그 말씀을 바로 아까 하던 그대로, 그것도 밤을 꼬박 새우면서 계속 전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마 오늘날 어느 교회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틀림없이 그 살아난 청년을 중심으로 즉석에서 무슨 간증집회 따위를 열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드로아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물론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것도 엄청난 은혜임에는 틀림없지만, 성찬식을 나누고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은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은혜로운 순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청년의 부활 사건은 일시적이고 특별한 은혜 체험이지만, 말씀과 성례는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빠뜨리거나 줄일 수조차 없는 가장 요긴한 은혜 체험의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받는 은혜가 최고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적이나 특별 행사들을 통해서 받는 은혜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은혜, 진정 깊고도 오래 지속되는 은혜란 이처럼 우리가 주일마다 듣는 말씀 속에 있는 것입니다. 
매주일의 설교, 성경공부, 구역공부, 바로 이런 말씀 사역들이야말로 다른 어떤 특별행사와 비길 수 없는 가장 큰 은혜를 받는 시간들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 그 십자가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 얻게 되었음을 확증하는 세례, 이런 성례들이야말로 우리 피부로 와 닿는 그 어떤 특별은사보다도 더욱 뜨거운 은혜의 체험입니다. 
이 두 가지 성례는 예수님께서 '친히 본을 보이시고' 또한 '지키라고 명하신' 것인 까닭에 참되 교회라면 절대로 빼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별미나 배달음식은 물론 맛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항상 먹을 수는 없습니다. 
건강에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자주 먹으면 금세 싫증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먹는 세끼의 정식들이 정말 우리 몸의 건강을 지켜 주는 주된 영양 공급원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는 나가지 않고 그냥 무슨 기독대학생 단체 따위를 통해서만 신앙생활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자기 집에서 살지 않고 여관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와 기도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지는 못하고 그저 다른 청년회원이나 전도회원들과 친교하는 재미로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집에 살기는 하지만 어머니께서 차려 주시는 밥은 한 끼도 먹지 않고 과자나 간식만 먹고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건강한 성화 성장이 있을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유익하고도 풍성한 은혜는 바로 본인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를 통하여 받아 누려야만 합니다. 
자기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두고 '매주일 듣는 뻔한 소리'라고 생각하고 듣는 둥 마는 둥 무심코 넘어가는 교인은 마치 거식증에 걸린 사람처럼 그 영혼이 점점 더 쇠약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찬식에 참예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속량해 주시기 위하여 당신을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진정 뜨겁게 감사할 줄 모르는 교인은 그 시간에 은혜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항상 정기적으로 주어지는 강단의 말씀과 절기의 성례를 통하여 영적으로 가장 영양가 높은 은혜를 섭취하면서 강건하게 성장할 수 있음을 꼭 확신하고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드로아 교회의 집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열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기도로써 시험을 이기는 승리를 나누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디까지나 말씀과 성례를 통하여 가장 큰 은혜를 나누었던 교회였습니다. 

우리 경향교회가 지난 40년 동안 받아 누렸던 은혜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무슨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부흥강사를 모셔 와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 교단의 목사님들이나 선교사님들이나 혹은 원로목사님을 모셔서 말씀의 잔치를 해 왔습니다. 
우리는 교회는 무슨 '현대적인 목회'라고 해서 교회를 카페처럼 꾸미거나 강단을 공연장처럼 만들어서 '재미있는 예배'를 드리려 하지 않고, 그냥 장로교의 전통적인 교회관과 예배모범을 그대로 따라서 정기적인 예배를 드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향교회가 은혜로운 교회가 된 것은 그처럼 '부지런히 모이고, 열심히 기도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나누며 성찬을 시행하는 교회'에는 그 옛날의 드로아 교회와 똑같이 은혜가 넘치게 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께 모든 문제를 내어 놓고 간구하는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에 심취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례에 참예할 때 거기에 은혜가 넘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드로아 교회의 어느 주일 밤에 가득 넘쳤던 이 은혜들, '예배의 열심'과 '기도의 능력'과 '말씀과 성례의 은혜'를 이 경향교회를 통하여서도 계속하여 체험하고 앞으로 더욱 풍성히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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