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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늘까지 동행한 사람 (창 5: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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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까지 동행한 사람 (창 5:21-24)


I. 위기의 시대 – 감사와 인내

미녀와 야수 부부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못생긴 야수 남편이 낮잠을 자다 꿈을 꾸었습니다.
“여보, 내가 꿈에 천국엘 다녀왔는데 천국엔 감사하며 산 사람과 인내하며 산 사람에게 특별한 면류관이 있더군요.”
미녀 아내가 기쁨에 찬 얼굴로 말했습니다.
“아마 그 두 면류관은 당신과 나를 위해 예비한 면류관 일 거예요. 당신은 나처럼 예쁜 미인을 아내로 얻었으니 평생 감사하고 살잖아요. 나는 당신같이 못생기고 능력없는 남자와 살면서 평생 인내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 어느때보다 감사와 인내가 필요한 때입니다. 나라도 어지럽습니다. 
사회도 불안합니다.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위기를 느낍니다. 
이때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과 믿음을 꽉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잠시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주어진 환경과 분복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에덴 동산이후 인류역사는 언제나 위기의 시대였습니다. 
고통의 시대, 불안한 역사였습니다. 
창세기 초기 역사시대 죄악이 관영하고 불경건한 자들이 판을 치던 위기와 고통의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만 동행한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 하늘에 올라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한 에녹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하늘에까지 동행한 사람-에녹」입니다. 

II. What? 동행의 의미

오늘 본문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에서 노아까지 계보를 밝히며 인생 이력들을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소중히 여기는 부귀영화 학벌과 소유, 명예와 권세 따위엔 안중에도 없으시다는 듯 단지 “누구는 몇 세에 누구를 낳고 얼마를 살다가 몇 세로 죽었다”는 것 뿐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에녹에 이르러 그 필체가 바뀌어지고 그에 대한 설명이 첨가되고 있습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에녹은 아담의 7대 손이며 노아의 친할아버지입니다. 이 땅에서 큰 기적을 일으키며 살았던 사람도 큰 사업가도 위대한 정치가도 아니었습니다.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것이 그의 이력의 전부입니다.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 성경은 창세기 5장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이 한 마디를 위해 아담부터 노아까지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지냈다” 즉 lived - 살았다고 했는데 유독 에녹은 “동행했다” walked - 함께 걸었다고 합니다. 

또한 등장인물 모두에게 “죽었더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에녹에게 만은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표현합니다. 창세기 11장에도 족보가 등장하지만 여기서는 “죽었더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에서는 “죽었다”를 계속 강조할까요? 그것은 에녹이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않았다”는 이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 - 이것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엄청난 가치를 부여한단 말입니까? 「동행한다」라는 말은 함께 걷는다, 함께 산다, 함께 산책한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함께 지내다 보면 하루 해는 너무 짧습니다. 그래서 여자 친구의 집 앞까지 바래다 줍니다. 또 거기서 헤어지기가 아쉬워 이번엔 남자 친구 집까지 갑니다. 그리고 나면 또 여자 친구를 혼자 보낼 수 없지요. 다시 여자 친구 집까지 함께 걷습니다.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떨어져서는 못 살겠다! 그래서 한 집에 살자. 이것이 결혼입니다.
「동행한다」는 의미는 서로 떨어질 수 없어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 세상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사람이 예수님 외엔 꼭 둘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선지자 엘리야요, 또 한 사람이 바로 본문의 에녹입니다. 

전도사 시절, 오늘 짤막한 본문을 가지고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설교를 할 때 구연동화로 꾸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기 하늘집에는 하나님이 사셨고 여기 땅에는 에녹이 살았어요. 

하나님은 에녹을 너무나 사랑했고 에녹은 하나님을 너무나 따랐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노는 것이 너무 신났고 재미있고 행복했어요. 하나님도 에녹과 함께 노는 것이 좋았구요. 하나님은 해가 뜨면 에녹의 집에 와서 “에녹아 내가 왔다. 나가서 놀자.” 에녹을 불렀습니다. 에녹은 늘 기다렸다가 반갑게 나가 맞이하며 하나님의 손을 잡고 어떤 날은 산으로, 어떤 날은 바다로, 또 어떤 날은 함께 들로 나가 일도 같이 하곤 했습니다. 해가 지면 하나님이 에녹을 집에 데려다 주곤 했지요. 사람들은 다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에녹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리고 에녹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이 사랑은 300년이나 계속되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날씨가 너무 좋은날 에녹과 하나님이 손을 잡고 걷고 걷다가 너무 멀리 가서 해가 져도 돌아올 수가 없게 되었어요. 

아쉬운 이별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에녹을 혼자 빈들에 버려둘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녹은 이제 밤에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에녹아 그냥 우리 집으로 가자.” 그래서 에녹이 하늘나라로 갑니다. 어느 황혼녘 하나님과 에녹이 손을 잡고 하늘나라로 둥실둥실 올라가는 것 아니겠어요. 
사람들은 이곳 저곳에서 위를 바라보며 외쳤습니다. 
“저것 봐! 하나님과 에녹이 손을 잡고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있어.” 그래서 에녹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갔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동행”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좋고 하나님은 내가 좋고,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나 하나님 없이 살 수 없고 하나님 나 없이 살 수 없고. 이것이 동행입니다. 

본문 “하나님과의 동행”을 주석하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 이것이 곧 동행이다 라고 설명합니다.

III. 믿음 생활이란?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동행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그곳에서 쫓겨난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시대를 기록하는 창세기 6:3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있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이 없는 육신과는 함께 하지 않겠다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런 시대에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성경에 에녹이 특별히 훌륭하고 뛰어난 사람이란 기록이 없습니다. 당시 알려진 영웅도 아니었습니다. 가인처럼 큰 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라멕의 아들들처럼 대기술자도 대음악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생활이 무엇인가? 
결론이 분명해졌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삶이다.”

미가서 6: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 이 아니냐?”

믿음이란 큰 업적을 쌓고 대단한 자리를 차지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성공주의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지식을 쌓고 어떤 신비한 교리를 배우고 성경의 난해귀를 설명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대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 힘과 재주로 큰 일 하려다가 병들고 인격 망가지고 신앙 잃어버리게 됩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에녹이 살다간 삶의 가치를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녹의 묘비와도 같은 메시지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클래어 루스(Clave Boothe Luce)라는 훌륭한 신앙인은 
“이 땅을 마치는 날 살아온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의 일생은 어떤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까요? 
누군가 먼 훗날 저를 기억할 때 「류영모 목사는 한소망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만들어 한소망교회를 통해 한국교회를 살리고 한민족과 세계열방을 구원하기 위해 애쓴 사람」으로 기억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IV. 최악의 시대에 최선의 길을

우리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니까 무릉도원에 수도원 지어 놓고 거기서 하나님을 묵상하며 산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에녹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산채밥 먹고 조롱박으로 바위틈 생수 마시며 하나님과 동행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No. 아닙니다. 

반대로 에녹은 최악의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었습니다. 이 시대가 어떤 시대였습니까? 창4:23-24에 보면 가인의 7대손 라멕이 살상을 예찬하고 하나님의 벌을 비웃는 사악한 모습이 나옵니다. 

역사적으로 이 시대는 머지 않아 노아의 홍수 심판이 내려질 바로 그 상황이었습니다. 그 시대가 어찌나 악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사람 지었음을 한탄하셨습니다. 유다서에 보면 에녹은 날마다 당시의 편만한 불경건을 한탄 했습니다. 경건치 않는 자들을 바라보며 눈물로 심판을 선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건의 삶을 잃어버린 이유가 자신의 삶이 바쁘기 때문이라고 핑계하는 사람들을 에녹이 오늘 나무라고 있습니다. 환경과 현실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잃어버리고 마냥 세상과만 동행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오늘 본문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내가 죄속에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을 오늘 에녹이 책망하고 있습니다. 충성, 헌신, 봉사, 진실한 신앙생활, 애들 다 키워놓은 후에, 은퇴한 다음에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에녹이 말합니다. “나는 300년을 자식 낳으며 수 천명 자식을 키우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노라”

지금 해야 합니다. 병이 들어 있어도 병든 그 몸으로 하는 겁니다. 
돈이 없어도 없는 그 상태에서 하는 겁니다. 믿음이 연약해도 연약한 그 모습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건이요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에녹이 산아 제한없이 300년동안 자식을 낳았다면 적어도 수 천명은 가족으로 거느려야 했을 겝니다. 그 많은 자식을 키우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최악의 시대, 최악의 환경, 최악의 길에 서서 하루쯤, 한달쯤, 한 1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산 것이 아닙니다. 300년을 변함없이 동행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변덕쟁이입니다. 그러나 에녹 - 300년동안 얼마나 많은 문제와 갈등이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변함없이 동행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안되지요. 자식 때문에 속상하는 일이 오죽이나 많았겠습니까? 괴로울 때도 많았지요. 그러나 변함없이 동행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변함이 없는 것 -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겁니다. 
교회 충성에 변함이 없는 것 - 그것이 교회와 동행하는 겁니다.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 
교회를 섬기다 지칠 때 마다, 탈진이 올 때 마다, 갈등이 있을 때 마다 
기억하십시다. 「에녹은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V. 동행의 전환점(계기)

본문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우리의 눈길을 머물게 하는 한 단어가 나옵니다. 22절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므두셀라를 낳은 후」하는 말입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므두셀라를 낳게 된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고전어 연구가 뉴우베리(Newberry)라는 성경학자는 므두셀라라는 말의 뜻을 문자대로 하면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마을과 마을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한 마을을 정복하기 위해 제일 문제되는 것이 그 마을 입구에서 마을을 지키는 므두셀라, 즉 창을 던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적자들은 ‘창을 던지는 저 사람만 없어지면, 저 마을을 우리가 점령할 수 있을 터인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견해에 덧붙여서 므두셀라라는 이름에는 언제나 이런 의미가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When he dies judgement comes!) “그가 죽을 때 그 일이 일어나리라.”

“내가 죽으면...이 온다. 내가 죽으면...이 쏟아 진다.” 뭐가 온다는 말일까요? 내가 죽으면 홍수가 온다. 홍수가 쏟아진다. 심판이 온다. 심판이 쏟아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날 사랑하는 에녹을 찾아 오셨습니다. 
“에녹아 세상이 많이 타락했지, 내가 이 세상을 심판할 수밖에 없다. 
  네가 자식을 낳게 될텐데 이름을 므두셀라라 하라. 
  이 아들이 죽는 날 세상에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다.”

아, 인생에 끝이 있구나. 역사에 심판이 있구나. 이 진리를 깨닫는 데서부터 모든 신앙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이 있음을 민감하게 느끼고 살 때 우리의 삶에 변화가 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의 생명이 오늘이라도 끝날 수 있다. 당신의 건강이 오늘이라도 끝날 수 있다. 당신의 기업이 오늘이라도 끝날 수 있다.
이 사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경건의 삶에 어떤 계기를 줍니까? 어떤 통찰을 줍니까? 어떤 결단을 줄 수 있을까요? 
그래야 신앙인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산수 놀이를 해 보십시다. 가지신 주보를 펴 보십시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 노아가 태어날 이때 할아버지 므두셀라 나이는 369세가 됩니다. 
창세기 7:11-12에 보면 노아의 나이 600세되던 해에 홍수가 쏟아졌습니다. 이날은 바로 므두셀라의 나이 969세로 므두셀라가 죽자 홍수 심판이 내려졌다는 얘기가 됩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산 사람입니다. 므두셀라가 장수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이 올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계셨던 것이지요. 오늘 여러분 개인을 향한 심판 그리고 이 땅에 심판이 더디게 느껴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VI. 영원한 나라를 향한 동행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인생과 역사의 끝이 있음을 깨달은 이후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상하셨나요?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히11:5)

여러분! 이 세상 밖에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모든 신앙의 문제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 것 같지만 영원한 저 나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두들 이 땅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여기서 모든 것을 가지고 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요. 영원한 나라가 있습니다. 지구 저 건너편에 미국이 있고 브라질이 있듯이 이 세계 저 위에 영원한 한 나라가 있습니다. 
에녹은 이사 가듯이 여행을 떠나듯이 영원한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를 한번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이 땅을 탐욕하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그 나라를 진실로 믿는다면 이 땅만을 위해서 목숨을 걸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남한의 풍성한 식탁을 맛본 사람이 어찌 북한 주민들의 옥수수 죽을 탐하며 살겠습니까? 이곳에서 모든 것을 다 가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참으로 좋은 것은 다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때문에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최고의 기쁨은 최고의 기적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 동행은 영원한 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살 것을 약속 받고 맛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영원한 나라에서 동행하게 될 우리가 이 땅에서도 그분의 손을 붙잡고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박종렬 목사님이 어린 시절 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겨울 방학을 맞이하여 충청북도 고향에 머무는 동안에 20리나 떨어져 있는 용정 교회에 가서 설교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주일밤 설교를 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평양으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밤이 늦었지만 용정에서 내곡이란 곳으로 급히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멀리서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멀리 어둠 속에서 “종렬아~ 종렬아~󰡓부르며 누군가가 좇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동네에 박 전도사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교인들 밖에 없는데 그들이 ”종렬아~ 종렬아~󰡓라고 부르며 좇아 올리는 만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누굴까? 도둑놈일까? 도둑놈이 박 전도사의 이름을 알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누굴까? 귀신일까? 박 전도사는 너무 무서워서 속도를 내어서 더욱 빨리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뒤에서 따라오는 그가 사람인지 귀신인지 더 빨리 따라오면서 더욱 더 크게 “종렬아~ 종렬아~”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10리 이상을 계속 뛰어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었는데도 내복이 물에서 건져낸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사건이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그동네 사는 친척 아저씨가 마침 용정에 있는 처가에 다니러 갔다가 박 전도사가 설교를 마치고 밤늦게 혼자 집으로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걱정이 되어서 동행해 주려고 좇아 왔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그 친척 아저씨가 박 전도사를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종렬아, 너 걸음이 왜 그렇게 빠르냐? 
네 걱정을 하면서 계속 좇아왔는데 너를 따라 잡지 못했다.”
박 목사님은 지금도 그날 밤의 일을 회상하며 많은 것을 깨닫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길을 혼자서 걸어가는 나를 걱정하시는 주님께서 나를 좇아오시는데도 나는 그것도 모르고 혼자서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모든 것을 나 혼자 내 힘으로만 감당하려다 지치고 쓰러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십시다. 주님께서 멈추라 하시면 멈추고 쉬자 하시면 쉬고 달려가자 하시면 달려가는 겁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기적 중 하나는 죄인된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살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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