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새사람으로 삽시다 (고전 15:20-22, 골 3:1-10)

첨부 1


부활의 새사람으로 삽시다 (고전 15:20-22, 골 3:1-10)

고린도전서 15:20-22,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골로새서 3:1-10,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생을 얻는 영광의 부활!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첫 손가락에 꼽는 소망일 것입니다. 사실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의 결실이 영광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39-4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이 영광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부활에 동참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영광의 부활은 십자가의 죽음을 지나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부활의 아침에 상고할 말씀은 ‘부활의 새 사람으로 삽시다.’라는 주제를 달았습니다. 

※ 본문말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리고 부릅니다. 영광으로의 부활의 신비를 소상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으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증거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와 주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부활의 확실성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을 밝히면서 끝까지 흔들리지 말고 믿음을 지킬 것을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내용 중에서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리스도인들의 부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이 영광의 부활을 이루신 첫 열매이시고, 그 뒤를 이어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부활의 열매가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그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골로새서의 말씀은 이 부활을 얻은 사람들이 무엇을 멀리하고 무엇을 추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1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위의 것”이란 ‘영적인 삶’을 뜻하며, ‘부활의 새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 내용은 본문 다음의 12-17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5-9절에는 아래의 것 즉 세상적인 욕망을 따르는 것으로써 새사람이 버려야 할 것들입니다. 왜 이렇게 세상적인 욕망을 버리고 영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까? 그것은 본문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니라.” 즉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의미들을 살펴봅시다.

※ 부활의 새사람으로 살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죽는다니?! 어떻게 죽으라는 말입니까? 골로새서 본문 5-9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바로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즉 세상에서 육신의 욕망을 따르는 삶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어떤 청년이 자신의 신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당시의 유명한 스승인 ‘성 마카리우스’를 찾아왔습니다. 청년이 물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성자는 대답은 하지 않고 청년에게 이렇게 시켰습니다. “지금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에 대고 욕을 한 바탕 퍼붓고 오게.” 청년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성자가 시키는 대로 하고 왔습니다. 그러자 성자는 청년을 다시 공동묘지로 보내면서 “이번에는 자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칭찬을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다시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성자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욕설을 퍼부어 대니까 시체들이 성을 내던가?” 청년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럼 칭찬을 하니 그들이 좋아하던가?” 이번에도 청년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성자는 청년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네.”

여러분도 경험하셨겠지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오른 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도 주고, 오리를 가게 하면 십리까지도 동행하는”(마 5:39-42) 뿐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마 18:21-22). “종이 되고 섬기는 자가 되라.” 등등. 

이런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내가 참아야지!’ ‘내가 죽어야지!’ ‘내려놓아야지!’ ‘맡겨야지!’ 라고 다짐해보지만 돌아서면 또 다시 옛 모습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마카리우스’의 말처럼 그렇게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이 자신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렵다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술과 담배와 마약, 도박 등 자신의 습관 하나 바꾸는 것도 엄청난 결단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충만하심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나쁜 습관들은 사탄의 세력들이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28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리고 마가복음 9:29절에서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셨는데, “이런 종류”란 바로 ‘사탄의 세력’을 의미하며, “기도”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능력만이 사탄의 세력을 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8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 죽기를 원한다면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묵상과 순종으로 주님과 동행하여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만일 세상에 대하여 죽기를 거부하여 육신의 욕망대로 따라간다면 천국을 포기해야 합니다. 

로마서 8:12-13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미 나 지신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부활의 새사람은 하늘의 삶으로 채워야갑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하여 비어지고 죽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부활의 영광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새사람이 되었으면 비어진 마음에 하늘의 삶으로 채워야 합니다. 

골로새서 본문 1-4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새 삶을 얻게 되면 세상의 것들이 싫어집니다. 예전에는 세상 유행가가 좋았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방탕하던 삶이 좋았지만 그런 것들이 싫어지고 의미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죄로 죽었던 나의 영이 생명을 얻어 성령께서 내 안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내 삶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시면 하늘의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골로새서 3:12-1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렇다면 이 새로운 삶을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 Booth) 장군이 런던에서 구세군의 일을 시작했을 때의 일입니다. ‘부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 일을 두고 어떤 사람들이 비난했습니다. “그런 일은 인간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책임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부스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발에 동상이 걸려 썩어 가고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만으로 따뜻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인가?”(약2:15-17).

‘지스문트 겟치’라는 화가의 작품 중에, ‘버림받은 예수’란 그림이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성 바울 대성전’의 계단에 예수님이 서 있습니다. 그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스포츠 신문에 열중한 청년, 휴가 여행을 위하여 택시를 잡으려는 남녀, 길을 가면서도 시험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과학자,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이 거기에 서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습니다. 신부 서너 명이 둘러서서 팔을 휘두르며 열렬히 토론하고 있지만 역시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한사람, 간호원 제복을 입은 여성만이 잠깐 멈추어 곁눈으로 예수님을 보는 장면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분명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의미를 줍니다. 부스 장군의 반문 속에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균형 잃은 관심’을 보여주고, ‘버림받은 예수’의 그림은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의 새사람의 삶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삶입니다. 많이 알고 있는 신앙이론보다는 사랑으로 행하는 작은 실천이 필요합니다. 직장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부활의 새사람으로써 선한 행실로 사랑과 섬김과 봉사의 일을 해야 하며, 용서하고 이해하고 베풀고 돕는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시며, 요한일서 3:18절에서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신 주님으로 확신한다면 부활의 새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대로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하늘의 별들의 빛을 색으로 표시했습니다. 해는 황금색, 달은 은색 또는 녹색, 화성은 적색, 수성은 청색, 목성은 오렌지색, 금성은 백색, 토성은 흑색 등이었습니다. 이렇게 별들의 색깔이 다르게 표현되듯, 부활도 다 똑같은 부활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이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5:40-41절을 봅시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살지만 하늘에 속한 부활의 새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는 우리가 행한 대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니 염려가 됩니까? 이처럼 세상에 대하여 내가 죽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어떻게 매일 예수님만 생각하고 살지? 자식도 키우고 사회생활도 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지? 등등.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주님 안에서 살면 오히려 이전의 세상의 것들이 정말 하찮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마음은 더 평안하고 기쁨은 이전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도 조금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기쁨과 영광이 가득한 날에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부활의 새사람으로서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며, 영원한 영광의 부활의 날까지 흔들림 없이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