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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 (왕상 2: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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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 (왕상 2:36-46)

다윗의 치세 가운데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인물들 가운데 시므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두 번씩이나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 번째는 죽임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바후림에 이르렀을 때 그를 저주하고 티끌을 날리며 돌을 던졌습니다(삼하 16:5-8, 13).

이 광경을 목격한 다윗의 이복누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그의 목을 베려는 것을 다윗은 한사코 만류했습니다. 
다윗왕의 은혜로 시므이는 살게 되었습니다(삼하 16:9-11).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생애 첫 번째 재앙이었습니다. 

그 후 압살롬이 죽고 그의 군대가 진멸되자 그는 요단 나루터에서 승리한 다윗왕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는 다윗이 승리하게 될 줄은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그는 후한이 두려워서 다윗왕이 요단을 건너기 전에 베냐민 족속 천명을 거느리고 와서 환도하는 다윗 앞에 빌었던 것입니다(사무엘하 19:16-20).

다윗은 자기 아들 압살롬도 애비를 죽이려고 하는 마당에 하물며 시므이겠느냐 하고 시므이의 저주를 달게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사무엘하 16:10-12). 
이때 다윗은 자신의 죄를 생각하면서 하는 말이 사무엘하 16장 11-12절에 『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하고 』라고 했습니다.

시므이가 용서를 빌 때 아비새가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저주했으니 그로 인해 죽어야 마땅하다고 했습니다(삼하 19:21).
다윗은 아비새를 만류하고 시므이에게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삼하 19:23). 시므이는 회개함으로 다윗왕의 은혜로 두 번째 재앙에서 벗어나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훗날 다윗왕이 죽을 날이 임박해오자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게 됩니다. 여러 유언 중에 맨 마지막으로 시므이에 대한 처분을 아들에게 맡겼습니다. 

열왕기상 2장 8-9절에 『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저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찌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찌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아들에게 맡겼습니다.

요한복음 5장 22절에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부왕의 유언을 따라 시므이를 불렀습니다.

열왕기상 2장 36-37절에 『 왕이 보내어 시므이를 불러서 이르되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고 했습니다.

시므이도 좋게 생각했습니다(왕상 2:38). 이로부터 삼년이 지난 후에 자기의 두 종이 가드왕 마아가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도망을 갔습니다(왕상 2:39).

시므이는 자신의 두 종을 찾으려고 나귀를 타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 종을 찾아왔습니다(왕상 2:40).
솔로몬왕은 시므이를 불러서 자신과 맹세한 것을 다시 한 번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왕은 부왕에게 행한 악한 행위를 언급했습니다(왕상 2:43-40).
솔로몬왕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하여 시므이를 쳐서 죽게 했습니다(왕상 2:46).

시므이는 자신의 악행에 대해 다윗에게 두 번씩이나 은혜를 입었습니다. 세 번째는 시므이 자신의 삶과 죽음이 솔로몬과의 약속 이행 여부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마지막 세 번째 약속은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백발에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왕상 2:9)는 다윗의 유언에 따라 솔로몬 왕은 열왕기상 2장 44절에 『 왕이 또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무릇 네 마음의 아는 모든 악 곧 내 부친에게 행한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 보내시리라 』고 했습니다.

시므이의 생애를 한국 기독교회와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의 재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한국기독교는 세계기독교사에 유래가 없는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6.25 동족상잔의 비극 가운데서도 한국기독교는 은혜와 징계가 반복되는 가운데 1,200만 성도 5만 교회, 10만 목회자라는 인적자원, 공간자원, 물적자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외 선교사 35,000명을 파송한 일은 한국 기독교의 긍지입니다. 한국기독교의 재산은 인적자원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그 통계가 불분명합니다. 
한국 기독교회가 경험한 세 가지 재앙입니다. 

Ⅰ. 첫째 재앙은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입니다.

신사참배 문제가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때는 1935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였습니다. 원래 신도神道라고 하는 것은 일본 민족의 정신생활에 기본이 되는 일본 고유의 사상으로 일본의 조상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의식입니다. 특히 천황을 현인 신으로 숭배하는 국가 종교적 사상입니다.
일제는 1938년 9월에 있을 제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안이 가결되도록 하기 위해 은밀한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친일파 목사 박응률朴應律에게 신사참배 안을 제안케 하고 박임현朴臨鉉에게는 동의를, 길인섭吉仁燮에게는 재청하도록 각본을 세웠습니다. 예정대로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로교 제27차 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각본에 따라 불법적으로 신사참배 안이 상정되었습니다.
이때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경찰의 감시망이 삼엄한 가운데 가可를 물었으나 부否는 묻지 않은 채 가결을 선포했습니다. 불법적인 가결에 대해 선교사 방위량(W. N Blair)과 그의 사위 한부선(Bruce F. Hunt)선교사가 항의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마침내 신사참배 안에 대한 성명서가 발표되었습니다. 

"신사가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이행하고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총후"라는 말은 여자적으로 총銃 뒤後라는 의미인데, 후방이란 의미입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임으로 전쟁 수행중인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 같은 전방이 아니라 후방에 있는 천황의 백성으로서 신사에 적극적으로 참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평양기독교친목회 심익현 목사의 즉시 실행 요청에 따라 김길창 부총회장의 인솔로 23명의 총회임원은 평양신사에 참배하였습니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굴욕이자 수치였습니다. 한국의 장로교회도 태양신 숭배사상을 수용한 것입니다.
당시의 총회현장 증언에 의하면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교회당 내외에는 수백 명의 사복경관으로 완전 포위되었고, 강대상 아래 전면에는 평남 경찰부장을 위시하여 고위경관 수십 명이 긴 검을 번쩍이면서 기라성같이 자리를 잡고 앉았고 총대들의 좌우에는 그 지방 경찰관 2명씩이 끼어 앉았고, 실내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100여명이 눈을 부라리고 서 있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주기철 목사, 이기선 목사, 김선두 목사 등 신사참배를 적극 반대하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은 사전에 모두 구금되었고, 저들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끌려온 27개 노회 대표 목사 88명, 장로 88명, 선교사 30명, 합계 206명이 넋을 잃고 앉아 있을 때에 10시 50분 이미 조작된 각본대로 평양, 평서, 안주 3노회 연합대표 박응률 목사의 신사참배의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긴급제안이 있었고, 평서노회 박임현 목사와 안주노회 길인섭 목사의 동의와 재청이 있었다.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이 안건이 가하면 예라고 대답하십시오."라고 물었다. 이때에 제안자와 동의, 재청자의 10명 미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예"라고 대답을 했고 그들 외의 전원은 침묵을 지켰다."라고 했습니다. 


Ⅱ. 두 번째 재앙은 남부총회가 조선신학원을 조선신학교로 개칭하고 남부총회 직영신학 교로 가결한 것입니다. 

1) 조선신학원의 설립입니다. 

일제의 한국교회를 향한 친일정책은 신학교육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보수주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가 1938년에 폐교되었고 기관지 신학지남神學指南도 폐간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서 교육받은 자유주의 신학자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 김우현, 함태영 등이 김대현 장로가 기부한 25만불(30만원)로 채필근을 위원장으로 가칭 조선신학원 설립위원회를 조직하고(1939.3) 조선 신학원 설립취지서를 발표했습니다.
이에 조선신학원이 1940년 3월 22일 경기도지사로부터 1년마다 갱신되는 강습소 인가를 받아 1940년 4월 19일 서울 종로구에 소재한 승동교회 지하실에서 개교했습니다. 

조선 신학원의 설립은 장차 한국교회의 불안한 미래를 암시했습니다. 당시 조선신학원이 총회의 인준을 받지 못하고 경기도로부터 강습소 인가를 받은 것은 폐교된 평양신학교가 채필근에 의해 다시 총독부로부터 인가를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김재준, 채필근, 송창근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된 조선신학원은 평양신학교와의 신학적 단절, 성경무오거부, 세계 조류의 수용, 그리고 유수한 신학 학교 조류의 수용, 그리고 유수한 신학교 육성을 목적으로 출발했습니다. 

2) 황국신민 개종을 위한 지도자 양성소가 된 조선신학원입니다. 

한국장로교회는 일본도와 펄럭이는 일장기 아래서 독자적인 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평양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 평양신학교"를 설립했고 서울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조선신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 학교들은 정통신앙을 가진 기독교 신자들을 일본민족주의 정신으로 개종시킬 "교회사敎誨師"(지난 날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는 교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습니다.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는 그 태생적 성격에서부터 황국皇國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조선신학교가 민족이나 민족적 자주성이나 민족 독립의 의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일제의 황민화 기관으로 세워졌다는 것은 총회록에 실린 "조선신학원 설립 보고서"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복음적 신앙에 기基한 기독교신학을 연구하여 황국皇國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일제의 비호 아래 개교한 학교들은 한결같이 일본 민족주의의 시녀였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학교의 설립과 존립이 불가능했습니다. 

3) 남부대회와 남부총회입니다.
남한에서는 해방과 더불어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려는 움직임이 모든 교단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중에서도 신사 참배문제가 가장 심각했습니다. 신사참배자들과 출옥 성도들 간의 대립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신사 참배자들의 대부분은 일본기독교조선교단 소속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들의 계속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교권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1945년 9월 8일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남부대회는 남한지역만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남부대회라고 했습니다. 

이 대회의 목적은 하나의 개신교를 유지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이후 남부대회를 명실상부한 교회통치조직으로 개편하여 1945년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조선기독교 남부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것이 실질적인 제1차 남부대회입니다. 
1946년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정동제일교회당에서 제2차 남부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남부대회는 제2차 대회를 마지막으로 8개월 만에 해체를 선언했습니다.
제2차 남부대회가 해체되던 다음날 5월 3일,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60여명의 장로와 목사들은 다시 교단 재건을 논의 했습니다. 

이 모임에서는 "조선예수교장로회남부노회연합회"(가칭)를 발족하여 1946년 6월 11일에 창립총회를 새문안교회에서 갖기로 결의했습니다. 
마침내 장소가 새문안교회에서 인사동에 소재한 승동교회로 바뀌면서 "조선예수교장로회남부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일명 "남부총회"라 불리는 이 총회는 사실상 남부대회를 계승한 것이며 변질된 교회의 개혁을 위한 총회는 아니었습니다. 

남부총회는 중요한 안건들을 결의했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① 헌법은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개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 ② 제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는 이를 취소한다. ③ 조선신학교를 남부총회 직영신학으로 한다. ④ 여자 장로직의 설정문제는 남북통일 총회시까지 보류한다."
여기서 한국교회는 당시 남부총회의 결의 중에 중요한 범죄 행위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제27회 총회가 범과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는 내용입니다. 
과거 신사참배를 결의한 일부의 총대들이 지금 남부대회의 총대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한다는 것은 당시 자신들의 결정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먼저 회개해야 함이 옳습니다. 성경과 헌법에서는 개인적으로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회개해야 하고, 공적으로 범죄 했을 경우에는 공적으로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분명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찬성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였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죽음을 통과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친일파 전통, 최덕성 저). 
둘째, 자유주의 신학교인 조선신학교를 총회직영 신학교로 결정한 사실입니다. 
언급했듯이 조선신학교는 사상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설립된 학교이며 정치적으로 조선총독부의 도움으로 일본 교수를 채용했던 신학교입니다. 이런 성격의 신학교를 총회직영 신학교로 운영한다는 것은 당시 총대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영적으로 어두웠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제27회 총회가 한국교회의 외적, 행동적 신앙의 타락이었다면 이 남부총회는 영적, 신학적 타락이자 변질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신학교가 남부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하게 된 경위는 친일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의 은밀한 공작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때는 과거 평양신학교를 지켜오던 인물들이 해방 후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이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보수계 지도자들도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조선신학교 측으로서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해가 바뀌어 제2회 남부총회가 1947년 4월 대구 제일교회당에서 열렸습니다. 이 총회에서는 지난해에 열렸던 제1회 남부총회를 제32회 총회로, 1947년 현 총회를 제33회 총회로 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총회에서는 다음해에 회집되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한국대표단을 파송할 것과 중국 산동성 선교를 계속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안과 밖의 시선은 좋지 못했습니다(친일파 전통, 최덕성 저). 

4) 한신대학교의 역사날조입니다. 
한신대학교(전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정하은 교수는 일제 시대의 순교자와 출옥성도들을 폄하하며 지탄했습니다. 
한신대학교는 몇 가지로 역사를 날조했습니다.

첫째, 조선신학교의 설립 목적이 "복음적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 신학을 연구하여 현 조선교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황국의 교역자 양성"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둘째, "본교의 설립 취지와 교육이상은 한국민족과 한국교회가 새 역사를 맞을 준비 작업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의 설립취지와 교육 이상은 황국신민으로 개종시키는 지도자 양성기관이었습니다.

셋째, 한신대학교는 이사장 명단에서 진정률 장로(1948-1953)를 초대 이사장으로 내세웁니다. 문헌에 따르면 초대 이사장은 함태영 목사였고, 그 다음은 일본인 마츠모토 다따오였습니다. 1943년경 이사장은 일본인 무라야마 키요히꼬였습니다. 초대 이사장 다음으로 2대에 걸쳐서 일본인들이 이사장을 역임했습니다.
넷째, 전직 교수 명단에서 일본인 교수들의 이름은 삭제해 버렸습니다. 미국인, 캐나다인 교수들의 이름은 포함시키면서 일본인들의 이름을 빼버린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현재 한신대학교는 역사인식을 바로 해야 합니다. 출옥 성도들을 향해 독선주의자니 메이첸파니, 칼빈파니 하는 것부터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친일파 전통, 최덕성 저).

이러고도 한국교회는 발전하고 부흥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한국교회가 하나님 앞에 두 번째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솔로몬에게 시므이가 살아 있지만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라고 했듯이 회개하지 아니한 자들을 죄 없다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음주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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