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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삿 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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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를 구하소서 (삿 3:7-11)     

우리는 오늘도 예배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 자리에 나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행위의 원인이요, 목적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뵙게 되길 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이시기에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것일까요? 그 분이 누구시기에 그 분을 믿고, 그 분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일까요? 

<사사기>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의 공식을 보여줍니다. 이 공식에는 몇 가지 이야기가 단계별로 전개됩니다.  

그 첫 이야기는 <여호와는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기본 관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당신의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을 보면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오, 아버지이십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요, 아버지이심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모든 관계는 여기 기초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우리는 굳이 그 분을 의식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방탕하게 살아서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눈물로 권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들은 집을 나갔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더 타락하여 교도소 신세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년이 흐른 후 아들은 정신을 차렸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염치가 없었습니다. 아들은 부모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만약 지금도 저를 아들로 여기고 계시다면, 지금이라도 저를 받아줄 생각이 계시다면, 제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집을 바라볼 테니, 뒷마당 나뭇가지에 노란 손수건을 걸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의 집은 철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기차를 타고 갈 날짜와 시간을 알려 드렸습니다. 드디어 그 날이 왔습니다. 아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창가에 앉아 고향마을과 고향집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고향 마을을 보니, 온 마을의 나무마다 모두 노란 손수건이 걸려 있었습니다. 온 마을에 노란 꽃이 핀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들은 집에 돌아가 부모님 품에 안겼습니다. 알고 보니 부모님은 노란 손수건을 뒤뜰 나무에만 매달면 혹시 아들이 못 볼까 염려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마을의 모든 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매달았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아들은 왜 부모님 집에 돌아갈 생각을 했을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분들을 자신을 낳고 기르신 부모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그 분들을 부모로 여기지 않는다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분들을 생각하면서 마음 아파할 필요도 없고, 죄송할 필요도 없습니다. 돌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부끄러움과 죄송함을 느끼는 이유, 돌아갈 생각을 하는 이유 등 모든 것은 그 분들을 부모님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또 그 부모님은 나무마다 노란 수건을 매단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를 아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하나님을 생각하는 이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 싶고, 그렇게 노력하는 이유, 그 분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을 죄송하게 여기면서 회개하는 이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창조주요, 아버지로 믿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고, 우리의 그의 자녀이며, 그의 백성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며,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무한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는 출발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두 번째 이야기는 <죄>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보냈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축하하면서 부활절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든 일들은 무엇 때문에 필요했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우리가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될 존재였다면, 하나님께서도 구원자가 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우리는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될 존재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인간은 굳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인간은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백 퍼센트 순결하게 죄 없는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그 후에 죄만 짓지 않는다면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고, 따라서 굳이 하나님의 은총이 없어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4세기의 영국 수도사인 <펠라기우스>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잘 압니다. 우선 로마서 3장 10절은 말씀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죄성, 원죄를 안고 태어납니다. 그렇게 해맑던 아기들도 가르치지 않아도 죄를 짓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펠라기우스도 자신의 주장은 이론적로만 그러할 뿐이며, 실제 세상에서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사람, 따라서 구원의 은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모든 사람이 은총으로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펠라기우스의 주장은 공허한 이론일 뿐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짓는 사람의 이야기는 하등 이상할 게 없습니다. 모든 언론이 죄를 지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도합니다. 그런데 그게 당연한 우리의 실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죄를 지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땅이었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주신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 7절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형편없는 백성으로 타락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실망시켰습니다. 

여러분, 죄를 지어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인 저의 가장 큰 문제는 말과 행실이 불일치하는 것일 겁니다. 교우님들에게 여러 가지 설교를 하지만, 정작 저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저 자신에 대해 어울리지 않는 자부심을 가질 때도 있으니 교만하기도 합니다. 교회와 교우님들의 사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할 때가 많으니 충성되지도 못합니다. 

중요한 것을 결정할 때, 어떤 때는 제 기준에 따라, 제게 유리하도록 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 떨쳐 버리지 못한 세상적인 욕망도 많습니다. 
이 세상에 죄로부터, 죄로 인한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도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고백했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길 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자신을 <곤고한 자>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이 죄는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 파국을 가져올 수 있는 무서운 적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세 번째 이야기는 <고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숭배한 결과로 적의 손에 떨어져 지배를 받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 동안 섬겼더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죄로 인해 남의 손에 넘어감으로 자유를 잃었습니다. 자유를 잃고 지배를 받는 그들의 모습은 과거 애굽에서 노예로 살 때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죄는 그들을 다시 과거로 후퇴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죄는 생명 없는 돌처럼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죄는 꿈틀거리면서 사망이라는 새끼를 낳습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사망을 가져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서도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습니다. 

죄가 사망을 가져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부터 이미 말씀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지은 죄 때문에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인생들은 흙에서 왔으므로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즉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가득한 한숨소리,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을 가져오는 질병들, 깨어진 관계로 인한 눈물들, 세월이 흐를수록 늙어 병들고 죽어가는 우리네 인생의 모습들, 이 모든 것들은 다 죄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그 곱던 얼굴들에 주름이 내리고, 백발이 덮이는 이유도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 포함되어 있는 네 번째 이야기는 <회개>입니다. 

죄가 가져온 고통들로 인해 세상에는 종교가 생겼고, 철학이 생겼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불행한 원인을 묻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 해법이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로부터 극단적인 고행과 수련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의 손에 떨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본문 9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으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울부짖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울부짖는 사람에게는 이미 체면 따위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여유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울부짖고 매달리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들은 비록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하나님께 부르짖어 그 은총을 얻는 것보다는 자신이 노력하여 품위 있게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마음을 굳게 먹고 철저하게 계획대로 살아감으로써, 그리고 저지른 죄에 대해 속죄의 삶을 살아감으로써 은총 없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많은 동양종교들이 참선을 하고 도를 닦음으로써 구원에 이르고자 했습니다.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고자 했던 율법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의 결심과 노력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조금 나은 상대적 의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절대 의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부질없는 것입니다. 

어떤 한 남자가 오래된 물건의 가치를 가리는 TV 프로그램 <진품명품>에 출연을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문서를 들고 나와 자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감정한 결과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이 문서는 종 문서입니다. 내용으로 볼 때, 선생님 조상들이 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문서를 자랑거리로 여겼으나, 결국 조상이 종이었음이 밝혀졌을 뿐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죄악과 사망과 사단의 종이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받아 충성한다고 구원을 얻는 것일까요? 추운 곳에 사는 사업가 김 집사님이 동남아 더운 나라로 출장을 갔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아내에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실수로 아내의 이메일 주소 바로 아래에 있는 다른 사람의 주소로 잘못 보냈습니다. 그 메일은 며칠 전에 별세하신 목사님 때문에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사모님의 메일 주소였습니다. 메일을 확인한 사모님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습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메일 내용을 확인해 보니, 기절할 만도 했습니다. <여보, 나야. 좀 힘들었지만, 무사히 도착했어. 그런데 이곳은 정말이지 무척 뜨겁구려! 당신처럼 약한 사람은 올 곳이 못돼. 잘 있어요! 당신을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여러분,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목사였다는 것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직분자였다는 것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믿었다는 것 자체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얻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네가 죄인임을 인정하라>고 분명하게 요구합니다. 회개란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이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임을 자처하면서 버티기를 포기할 때, 구원의 은총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라고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이 고통에서 하필 하나님께 부르짖었을까요? 그 이유는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 그대로입니다. 그 분이 자신들을 지으신 분이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나온 아들이 세상 그 어느 곳도 아닌,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부르짖을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요청할 대상은 오직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그 다음 이야기는 <은혜로운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본문 9-1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여호와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갈렙의 조카인 옷니엘을 사사로 세우셔서 메소포타미아를 물리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옷니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옷니엘을 세우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우신 분은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구원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메소포타미아로부터의 일시적 구원이었다면, 예수님을 통해 주신 구원은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구원을 기뻐하며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옷니엘과 비교될 수 없는 완전한 구원자입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그 땅이 평온한 지 사십 년에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더라>고 했습니다. 옷니엘은 위대했지만, 영원히 이스라엘을 지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저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도왔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영원한 구주이십니다. 우리가 그 분을 의지하는 한 영원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또 다시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지 말고, 끝까지 주님 안에서 천국을 향해 나아가길 원합니다. 

마음에 외치십시오. <난 하나님의 자녀이다. 난 구원받았다. 내 주님은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난 영원히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것이다!> 이 확신과 기쁨으로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다가와도 구원자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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