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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질문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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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질문 (요 21:15-17)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아주 중요한 3가지 질문을 했고, 베드로는 그 질문에 모범적인 대답을 했다. ① (마16:1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었고, (마16:16中)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대답했다. 예수님이 주님이고, 그리스도(구세주)이심을 분명히 했다. 
이는 “신앙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신앙은 주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즉 베드로에게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가를 물으셨다. 신앙이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주님이요, 구세주가 되심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②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예수님을 떠나갈 때, (요6:67下)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신앙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나를 따르는 목적이, 떡과 고기를 얻기 위해서인지, 혹은 병 낫기 위해서인지, 영생을 위해서인지 물었다’ 만일 너희들이 무엇을 위한 것이라면, 그 목적이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영생의 말씀이라는 답변은, 주님을 기쁘시게 했고, 정확한 신앙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③ 예수님은 부활했지만,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옛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로 제자들을 찾아가셨다. 주님을 떠난 제자들은, 아무것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했다. 그대로 순종하자, 물고기를 그물 가득히, 잡을 수 있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은, 숯불에 생선과 떡을 구워서, 제자들을 먹이시고, 사랑하는 제자 시몬에게 물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3번 물었다. 이 질문은 ‘신앙의 동기가 무엇이냐?’는 물음으로 “신앙의 실패의 원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동기가 없는 신앙은, 실패뿐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난 다음 ‘내 양을 먹이라’고 했다. 사랑을 확인하고 맡겼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사랑하게 하고, 자녀를 허락하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려는 뜻이 있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어부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그는 다혈질이고 활동적이며, 외향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 최후만찬 때 예수님께 (마26:33)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다. 

또 예수님이 (막14:30)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막14:31中 )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요6:68)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베드로의 다짐과는 달리,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요18:27).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부인했다(마26:74). 

십자가 행렬에서도 빠져있고, 십자가 밑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요21:3上)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가노라…”며, 다시 옛날생활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15中)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가지고, 함께 은혜를 나누자. 

1.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깨달아,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음성이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베드로, 게바라는 새 이름을 주셨다. (1:42中)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그러나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의미의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하지 못했다. 듣기만 하는 시몬으로, 연약한 모습이었기에 ‘시몬아’라고 불렀다. (15中) 이 사람들보다는 ‘이것들보다’로도 해석될 수 있다(중성 복수). 베드로는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주님을 배신했다. 그러니 ‘목숨보다’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생선이 앞에 놓여 있으니, 먹는 문제보다 더 사랑하느냐는 말도 된다. 삶의 터전이 바다와 그물, 배들보다 더 사랑하느냐는 말도 된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이, 내가 사랑하는 것들(게임, 잠, 돈, 명예, 친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우리말은 전혀 구별이 되지 않지만,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는, 의미와 대상에 따라서 사랑을, 4가지 단어로 구별한다. ① ‘에로스’ 남녀 사이에 이루어지는 이성간의 사랑 ② ‘스토르게’ 가족 간에 주고받는 사랑 ③ ‘필리아’ 친구간의 사랑, 우정이다. 이 3가지 사랑의 공통점은, 모두 조건적이다. 

④ 이러한 조건적인 사랑과 구별하여, 사용되는 헬라어가 바로 ‘아가페’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한다. 상대방의 상태나 수준, 나에 대한 상대방의 태도와 상관없이 행하는, 헌신적 사랑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다. 
어떤 사람을 기뻐하다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싫어지고, 상대방의 잘 됨이 배가 아프고, 시기심이 일어나고, 상대를 짓밟아버리고 싶어진다면, 이는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다. 아가페는 조건을 따지지 않기에,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거나 변함없는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는 질문이다. (아가파스 메), 그러자 (15下)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필로 세),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고백한 사랑은 ‘친구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알고 계신다.’고 말했다. 
베드로가 말한 필리아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에 불과했다는 말이다.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아가파스 메)”,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쉬 오이다스 호티 필로 세)” 

예수님은 아가파오의 사랑으로 물었고, 필레오의 사랑으로 대답했다. 아신다는 말은, 경험했다는 말이다. (17上)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필레이스 메)” 예수님이 세 번째는 베드로의 수준에 낮추어서, 질문하셨다. 
이렇게 질문할 때, 베드로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거듭되는 질문 속에서, 베드로는 커다란 찔림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17中)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여기서 근심하다는 말은 ‘뤼페오’인데,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다거나, 비탄에 빠진다.’는 의미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었을 때, 엉뚱하게도 필리아의 사랑을 고백한 베드로가, 수준을 낮춰 물었을 때, 그는 가슴에 찢어지는 아픔을 느끼며, 비탄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예수님의 이 질문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죄인 됨을 깨닫게 되었다. 삶의 공허함과 무가치함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동시에 이런 죄인도, 용납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고,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요구도 알게 되었다. 

주님은 우리의 죄인 됨을 아신다.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임을, 주님은 너무나도 잘 아신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죄를 친히 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고, 삼일 만에 부활했다. 피 값을 주고 우리를 사신 주님이, 우리를 향해, 나만 사랑하라고 한다면 잘못인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는 이 음성은, 명예나 권력이나 황금이나 자존심이나 감정이 아니라,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네가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너도 나만을 사랑하라는 음성이다. 

2. 자아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음성이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주님을 따르려고 했고, 자신의 힘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했으며,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결심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예수님을 배반하여, 주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했지만, 오히려 결과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여 맹세도 했다. 옛날의 생활인,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거듭 질문하심은, 

자아를 포기하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사랑하라는 음성이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하나님인 나를 사랑하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은, 친구의 우정으로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랑의 수준에 낮추어, 말씀하셨다. 
그러자 오히려, 베드로는 가슴에 찢어지는 아픔을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실상을 비춰주는, 거울이 되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수준으로 낮춰주고, 있는 그대로 품어주었을 때, 그 사랑 앞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았다. 자신의 불완전함과 형편없음과 한심함을, 처절하게 확인했다. 

불과 열흘 전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저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주님을 버리고, 배신하지 않았는가? 어디 그뿐인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까맣게 잊은 채, 갈릴리에서 헛된 그물만 던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향해 두 번씩이나, 주님을 사랑한다고 어리석게 고백했으니, 자기라는 인간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존재인가? 베드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과, 자신에 대한 비탄을 금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런 처절함 속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17中)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이 마지막 답변은, 자기 수준의 불완전함을 깨달은 자의, 겸손한 회개로써 바로 다음과 같은 의미였다. ‘주님, 저는 주님께 등을 돌렸던 배신자였다. 아직도 저는 허물투성이다. 주님을 향한 저의 사랑은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다. 
저는 예수님이 말씀하는,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하기 원하는 저의 중심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신다. 베드로는 주님과의 대화중에,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하나,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아를 포기한 베드로를 받으시고, 이제 너의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나만을 의지하라고, 불러주시는 음성이었다. 바울은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라고 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면서 탄식했다. 육신적 자아, 옛 사람으로는,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주님을 위해 일하고 봉사해도, 나의 옛사람인 육신적인 자아가, 주를 위해 일하고 봉사한다면, 성경적인 믿음이 아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11:6). 그래서 우리 옛사람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 어떠한 사람이 될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슨 일을 행하기를 원하시는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의 자아를 하나님 앞에 양도하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왕좌에 모셔야 한다. 이제 자아가 무엇을 하려고 하던 그 노력을, 주님의 인도만을 따를 때, 주님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된다. 

3.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음성이다. 

(1)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했다. 제자들이 돌보도록 위탁받은 양들은, 제자들의 양이 아니고, 예수님의 양이다. 
예수님의 양을 성도라고 한다. 이런 양들은 돌봄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네가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몸이 되는, 하나님의 교회의 양을 먹이고, 치고, 먹이라는 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이다. 모든 인류와 문화와 역사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주적 질서의 교회다. 바울은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바울은 고백했다.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우리 주님을 사랑합니까? 교회를 사랑하라. 

(2) 자신을 희생함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18-1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원하지 않는 일들을 주님을 위해서 하고,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희생이, 사랑이다. 

로마에 가면 유명한 교회가 2개 있다. 하나는 성 베드로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성 바울 교회이다. 두 교회들은, 두 순교자의 터전 위에, 세워졌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기에, 평생을 수고하고 희생하지 않는가? 주님 역시 우리를 사랑하기에, 주님의 살을 영생하는 만나로 주었다. 주님의 피를 우리에게 주어서,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게 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주는 것은, 아깝지 않다. 그러나 우리들은 육신도, 물질도 너무나 아낀다.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는 길은, 고난과 역경의 길인데, 희생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 

(3)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베드로에게 가르쳤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로, 재산을 몰수당했다. 공직에서 쫓겨났다. 노숙하고 토굴 속에서 유리했다. 로마의 형장에 끌려가서, 짐승에게 처참하게 찢기어 죽기도 했다.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이렇게 죽어가며 순교했다. 베드로는 교회의 지도자였다. 당시의 성도들은 베드로를 아껴서, 피신시키게 된다. 베드로는 로마를 탈출하여 ‘알바니’라는 언덕에 이르게 된다. 먼동이 훤히 떠올라오게 되었다. 

찬란한 해살 속에서, 낯익은 한 사람이 자기에게, 가까이 걸어오는 것을 보게 된다. 자세히 보니까 바로 주님이었다. 그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자, 주님이 말씀하기를 “네가 내 백성을 버리고 가니, 내가 로마에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러 간다.”고 하셨다. 
정신을 차린 베드로는 다시 로마에 들어가서, 전도 활동을 하다가, 급기야 체포되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똑바로 못 박혔지만, 나 같은 자가 어떻게 예수님과 똑같이, 달릴 수 있느냐며 자원하여서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해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고 한다. 

(19下)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말씀은, 주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든지 끝까지 따르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 롯은 가나안 땅을 가다가, 자기 삼촌과 헤어진 후에, 소돔성에 들어갔다. 
소돔성에 죄악이 가득하자, 하나님이 불과 유황으로 심판했을 때, 겨우 목숨만 건졌다. 그의 아내는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고, 두 사위는 소돔성의 심판을 받아, 함께 멸망했다. 반면 하나님을 사랑했던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라. 

(딤후4:7-8上)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라고 고백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갈 때, 최후의 한 말씀은 ‘다 이루었다.’고 했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고,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이 되어야 하겠는가?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든지,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왜 많은 사람이,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왜 많은 사람이 근심하는가? 하나님이 아닌 자질구레한 다른 생각, 복잡한 생각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모든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그런데 우리 생각이 너무 복잡하다. 
하나님이 아닌 명예나, 권력, 지식, 돈과 감정, 자존심을 사랑하기에 많은 문제가 생긴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이것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주님이, 이 시간 우리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응답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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