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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겨자씨의 비유 (마 13: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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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의 비유 (마 13:31-32)
 
 
마 13:31-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오늘은 우리가 마태복음 13장에 기록되어 있는 세번째 비유인 겨자씨의 비유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번은 사막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가도가도 끝이 없는 모래벌판만 계속되었습니다. 또 태양 볕은 사정없이 내려 쬐고 있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물도 이미 오래 전에 바닥이 났습니다. 두 사람은 지칠 때로 지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급기야 아들은 체념한 듯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힘들게 걸어가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차라리 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달래었습니다.
"얘야,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걸어가면 틀림없이 시원한 오아시스가 우리를 반겨줄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앞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걸어갔습니다. 한 동안 걸어가던 그들의 눈앞에 몇 개의 큰 무덤들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본 순간 아들은 절망한 듯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보세요. 이 사람들도 결국은 죽어서 여기에 묻히고 말았지 않습니까? 우린들 별 수 있겠습니까?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얘야, 이제는 우리가 정말 안심해도 되겠구나! 여기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산 사람들이 이들을 여기에 묻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틀림없이 이 근처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있을 것이다."
과연 얼마가지 않아서 큰 오아시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동안 갈했던 목을 시원하게 적실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일화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점이 무엇입니까? 소망의 중요성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소망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겨자씨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그것이 자란 후에 커서 나무가 되는 것을 보셨습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셔서 그 가지에 새들이 깃들여 지저귀는 아름다운 노래 소리를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소망입니까? 예수님이 가지셨던 이 소망을 우리도 마음에 품고서 매일 매순간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참으로 악합니다. 우리가 이미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길가, 돌밭, 또 가시떨기가 나있는 밭처럼 마음이 굳게 닫혀서, 아무리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가라지처럼 온갖 불법을 자행하면서 주변에 있는 곡식들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와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들으면서 마음 한 구석 속에는 일말의 불안한 생각도 가졌을 것입니다. 

"저 무수한 가라지들 때문에 곡식이 어떻게 자랄 수가 있겠는가? 저러다가 곡식들마저도 질식해서 죽지 않겠는가?"
이런 불안한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로 제자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그들에게 소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떤 사람이 밭에 나가서 겨자씨 한 알을 심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시골에 가면 마찬가지입니다. 마당 한 가운데 채소밭을 일구어 놓습니다. 그리고 가지, 고추, 상추 등등 간단한 채소를 심어서 먹습니다. 그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자는 톡 쏘는 맛이 있습니다. 그래서 양념이라든지 향료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약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잎과 줄기는 먹기도 합니다. 

그런데 겨자씨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작다는 것입니다. 눈에 잘 뜨이지도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무엇을 작다고 할 때 깨알같이 작다고 합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겨자씨만큼 작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깨알씨보다 훨씬 더 작습니다. 눈에 잘 띄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농부가 자기 밭에 그 작은 겨자씨를 한 움큼 심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두 알도 아닌 한 알을 심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겨자씨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습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랍니다. 

싹이 틉니다. 일단 싹이 트게 되면 쑥쑥 자랍니다. 적어도 그 키가 2m, 또 큰 것은 5m이상으로 자라기까지 합니다. 또 버드나무 가지처럼 양사방으로 그 가지를 뻗어 냅니다. 그러니 한 알만 심어도 채소밭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겨자씨는 새들에게 있어서 좋은 먹이가 됩니다. 그래서 공중의 나는 새들이 그 가지에 둥지를 틉니다. 그러면 어미 새는 일부러 먹이를 구하기 위해 멀리 날아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천국의 특성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간단하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습니다.

천국의 시작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작은 데서 출발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보다도 앞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천국은 예수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너무 미미했습니다. 그래서 요1:46에 보면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예수님은 시골에서 목수 일을 하던 무명의 존재, 곧 겨자씨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수가 고작 12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실패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배운 것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제자들을 이끌고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하니까, 그 당시 종교 지도자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웃기게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눅17:20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눅17:20∼21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또 중요한 뜻이 있는 줄 압니다. 그 당시로서는 백성들의 수가 너무나도 작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처럼 미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겨자씨에는 놀라운 생명력이 있습니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나중에는 심히 창대해 지는 것이 바로 천국의 특성입니다. 따라서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겨자씨처럼 미미할지라도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일이 겨자씨처럼 하찮게 보인다할지라도 그것을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싹트고 확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서 태평양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 줌의 눈도 그 무게가 얼마 되지 않지만, 계속해서 쌓이면 나무의 가지를 꺾어버리는 것입니다.
미국의 석유 왕이었던 쟌 록펠러(John Rockefeller, 1839∼1937)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세 가지의 기적을 일으킨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첫번째 그는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일당 4센트의 적은 돈을 받고 땡볕에서 하루종일 감자 캐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자수성가해서 세계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두번째 그는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은 돈을 남을 위해 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일평생 동안 자선사업에 희사한 돈이 7억 5000만 달러였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 돈으로 계산해도 1조에 가까운 돈입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는 얼마나 큰 금액이었겠습니까? 또 그의 후손들과 자식들이 함께 자선사업에 쾌척한 돈의 액수를 모두 합치면 25억 달러가 넘습니다. 아무튼 그는 세상에서 남을 위해서 가장 많은 돈을 쓴 사람입니다. 아직까지 그 기록을 깬 사람이 없습니다.

세번째 그는 한 때 건강이 아주 악화되었습니다. 의사가 얼마 살지 못한다고 진단했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루에 비스킷 한 조각과 우유 한 잔이 다였습니다. 그런 그가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면서도 그의 치아는 하나도 썩지 않았습니다. 
록펠러는 세계에서 제일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남을 위해서 가장 많은 돈을 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절대로 작은 돈이라고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단골로 가는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자기를 위해서 봉사하는 종업원에게 언제나 15센트의 팁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식사를 하고 나서 팁을 주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더니 5센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업원에게 5센트만 팁을 주었습니다. 평소에도 작은 팁에 불만이 많았던 종업원은 결국 록펠러에게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록펠러씨, 내가 만일 당신 같은 부자라면 그까짓 10센트 때문에 쩨쩨하게 굴지 않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록펠러는 종업원을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업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네. 부자인 나도 10센트를 아끼는데 어떻게 자네가 10센트를 하찮게 여기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 처지가 겨자씨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이고, 내가 하는 일이 시원찮아 보인다 할지라도 절대로 그 일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다. 겨자씨 같은 적은 물질, 겨자씨 같은 적은 시간, 겨자씨 같은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것이 심히 창대해 지는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겨자씨는 자란 후에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됩니다.

천국의 두번째 특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시작은 미약합니다. 그러나 점차 확대되어서 나중은 심히 창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배척했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만 죽이면 모든 문제는 끝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과연 그들의 생각대로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겨자씨 한 알이 골고다 언덕 위에 심겨졌습니다. 사흘 후에 싹이 텄습니다. 쑥쑥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가지를 뻗어 나갔습니다. 

가지는 예루살렘을 넘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로 뻗어 나갔습니다. 안디옥을 거쳐서 소아시아로 뻗어 나갔습니다. 지중해를 건너서 마게도냐로, 로마까지 뻗어 나갔습니다. 온 유럽을 복음으로 점령했습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120년 전에는 그 가지가 우리 나라까지 뻗어 나왔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며 천국의 특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현실이 지금 겨자씨처럼 미미합니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될 줄 압니다. 

인도의 수녀 테레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시 그는 알바니아의 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몸집도 작았습니다. 인물도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겨자씨 한 알처럼 미미한 존재였습니다. 그는 늘 자신 스스로를 가리켜서 즐겨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I am nothing(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979년, 그가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을 때도 그는 연설 가운데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I am nothing(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런 테레사가 인도의 빈민촌에 뛰어 들었습니다. 사랑을 품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버려진 사람들, 병든 사람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돌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뭇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킨 사랑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빈민굴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1997년 그가 죽었을 때, 인도에서 국장으로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 세계에 그의 장례식이 방영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겨자씨 같이 작게 시작했던 그의 삶이 놀랍도록 성장해서 큰 나무처럼 된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주일학교 교사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교회를 가는데 골목길에서 코흘리개 아이들 네 명이 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잘 설득해서 교회로 전도했습니다. 사랑을 다해서 매 주일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당시 아이들에게 심겨진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큼 미미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삼십 수년이 흘렀습니다. 그는 생일을 맞아 네 통의 축하 전보를 받았습니다. 삼십 수년 전의 코흘리개 어린 아이들이 모두 장성해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선생님의 생일을 기억하면서 축하 전보를 보내온 것입니다. 

첫번째 사람은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미국 연방 은행의 총재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번째 사람은 백악관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네번째 사람은 바로 백악관의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국의 31대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클라크 후버(Herbert Clark Hoover, 1874∼1964) 대통령으로 우리에게 후버땜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떠한 사명과 직분을 주셨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하십시다. 지금 시작은 미약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습니다. 나중은 반드시 창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생명력입니다. 천국의 특성인 것입니다.

셋째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게 됩니다. 

여러분, 나무로 인해서 누가 혜택을 본 것입니까? 새들이 혜택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세번째 특성이 여기 있습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곳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놀라운 혜택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든지 아니든지 간에 상관없이 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20년 전에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놀라운 혜택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곳곳에 병원과 학교가 생겼습니다. 문맹이 퇴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천민들의 인권이 향상되었습니다. 어린 아이와 여성의 권리가 향상되었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 경제적으로 잘 살고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축복인 줄 압니다.
그러나 문을 닫아놓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북한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꿈대로 지상의 낙원이 되었습니까?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병들어도 좋습니다. 광우병에 걸려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니 도살하는 소들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앙상한 뼈마디만 남은 손을 내밀어서 도움을 청하고 있는 비참한 나라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하나님은 지금도 그 믿음의 후손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니라."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잘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나로 인해서 내 가정과 내 이웃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복을 누리면서 살아간다면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배를 타고서 로마로 후송이 됩니다. 배 안에는 모두 276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동안 평안하던 바다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 바람에 모두가 죽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선장, 선주, 또는 백부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바울아,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승선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너의 손에 붙였노라."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사도 바울 한 사람 때문에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헤르만 헤세의 작품 가운데 어거스터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모가 있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의 이름이 바로 어거스터스였습니다. 그가 태어나기 전 한 신비한 노인이 밤중에 산모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그 아이를 위해서 내가 꼭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습니다.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거스터스의 어머니는 곰곰이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살게 해 주십시오."
그의 소원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는 자라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선생님의 사랑도 받고, 친구의 사랑도 받고, 이웃의 사랑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은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사랑만 받고 베풀지 못하니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거스터스는 노인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외롭고 비참한 삶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신비한 노인이 또 나타났습니다. 노인은 어거스터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삶에 만족합니까?"
어거스터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도 한 가지 소원을 이루어주겠습니다. 소원이 무엇입니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사랑 받으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받기 보다 베풀어 주고,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해 주고,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으로 축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씨앗입니다. 그러나 자란 후에는 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공중의 나는 새들도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 우리의 현재 삶이 겨자씨처럼 미미하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슬퍼하지 마십시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에서 큰 나무를 보시며, 그 가지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셨던 예수님의 소망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로 인해서 내 가정과 내 이웃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누리는 삶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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