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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만나 변화된 여인의 이야기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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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만나 변화된 여인의 이야기 (막 5:25-34)


태초에 만남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만남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너와 나의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베푸신 기회와 시간의 공간에서 내가 너를 만나고 네가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삶이 아닙니까?  무릇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다 서로를 만나는 것입니다.  부모를 만나고 자식을 만나고, 형제를 만나고 시대를 만나고, 다 만남입니다.

그런데 이 만남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행복한 만남이 있는가 하면 불행한 만남도 있습니다.  축복된 만남이 있는가 하면 고통스러운 만남도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힘든 사람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을 만났더니 살맛이 날 수도 있고, 그 한 사람을 잘못 만나서 죽을 맛이 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뭄에 단비를 만나듯이 그 영혼에 맑은 샘이 솟는 그런 사람을 만날 때가 있는가 하면, 염치도 가치도 없는 삶을 불행의 흙을 퍼 안기듯 떠넘기는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끝없이 의미 있는 만남들을 사모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아름답고 소중한 만남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만남에는 그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만났다가도 고통과 아픔을 안고 헤어질 때가 있습니다.  웃으며 만났다가도 울며 헤어질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만남들은 낙심과 환멸을 느끼게 하고, 그 마음 속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는 그 모든 것들이 다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만남은 언제나 그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참되고 진실된 만남이 있습니다.  끝이 있는 만남이 아니라 한 번 관계를 갖고 만나면 결코 헤어짐이 없는 영원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모든 인생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알게 할 뿐 아니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사망이나 위험이나 그 어떤 것도 내 안에 있는 사랑의 힘을 빼앗아가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 속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이 만남은 모든 인생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사모해야 하는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이 만남을 사모하십시오.  오늘 이 시대는 인생들이 정말로 찾아야 할 것을 찾지 않습니다.  만나야 할 것을 만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거짓과 허풍과 기만으로 자신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파수꾼이 진정으로 사모하고 기다리는 것은 아침입니다.  우리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 천년 전, 동방의 박사들이 그 멀고 험한 여행을 해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류의 소망이요, 구원자이신 메시아를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기대였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인류의 희망을 찾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동방박사들의 이 행렬에 합류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서 마지막 희망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이 만남이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에 해답을 줄 것입니다.  이 만남이 내 영혼의 가식과 숨기고 있는 그 깊은 곳에 존재하고 있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밝은 빛을 비쳐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모두는 이 한 말씀을 붙잡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에서 경험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오늘 교회에 다니면서 소위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믿지만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들에게는 예수를 믿으면서 재물도 있어야 합니다.  명예도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즐거움도 있어야 합니다.  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런 것들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런 것들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반열에 함께 올려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면서 살려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자세는 결국 십계명에서 제1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계명에서 제1 계명을 아십니까?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창조자이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그 무엇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는 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목사 노릇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집사 권사 노릇을 한다고 해서 마지막날 주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시라는 참된 신앙을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고, 우리의 몸과 마음과 뜻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만 향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신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해서 드러난 그 사실만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를 보십니다.  우리의 미래를 향한 계획이 어떠한가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자녀들을 향한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예수님만이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제일 우선 순위에 두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지난 주간에 어느 회의에 갔다가 서울에서 내려오신 목사님을 통해서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전에도 종종 들었던 이야기였지만 직접 들으면서 제 마음에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끊임없이 밀려왔습니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인 즉, 서울에 5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 초중고등 학생들의 주일학교 숫자가 30명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이 지난 겨울에 대구에 천명이 넘는 어느 교회에 고등부 수련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그곳에 모인 숫자가 20명이 조금 더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학생회 부장 집사님에게 "이 교회 항존직분자들의 자녀들 가운데 고등학생들이 몇 명 정도 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족히 100명은 넘는다고 했습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항존직분자들조차도 자녀들에게 예수님만으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이들에게 예수님만으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예수님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공부님'이십니다.  그래서 주일에 교회에 나오기보다는 학교와 학원으로 보내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열심히 공부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 다음에 네가 대학교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믿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마십시오.  다년간 현장에서 대학생들을 만나고 있는 저의 경험으로는 중고등학교 때 신앙을 접어둔 아이들이 대학교에 가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이미 이 아이들은 세상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에는 타락한 세속 문화가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대학교에 가서 신앙생활을 한다고요?  꿈에서 깨어나십시오.  이 아이들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집을 떠나고 부모의 품을 떠납니다.  무한한 자유가 저들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 아이들이 책임 있는 자유를 넘어서 방종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만났던 아이들 가운데 대학교에서 심하게 방황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저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집에서 대학교에 다녀도 이 아이들은 교회에 가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 교회에 탐방을 왔던 한 아이도 엄마는 교회에 나가는데 자신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아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하는 신앙생활을 보면 하나님은 안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해답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한다면 다른 그 무엇도 필요하다고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만으로 만족한다고 입으로는 고백합니다.  우리는 찬양도 그렇게 부릅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였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솔직히 지금 우리의 삶은 이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의 몸과 마음이 세상을 향하면서 하나님을 저버려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헤아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생각을 하든 그분은 자신이 친히 불꽃같은 눈동자고 보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나오는 입술의 고백에서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이런 인생들을 향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번역과 다른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조롱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기를 원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세상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썩어질 것을 거두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사람들은 그 썩어질 것을 거두기 위해 생명을 걸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비전을 품으십시오.  썩어질 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을 영생을 거두는 인생들이 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한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말로만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에 보면 아주, 참으로 불행한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여인이 왜 불행한 여인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왜 불행합니까?

첫째로, 이 여인은 질병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본문 25절은 이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2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본문에서는 이 여인을 불행하게 만든 매개체는 혈루증이라고 하는 질병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혈루증이라고 하는 것은 피를 계속해서 쏟아내는 병인데, 여인에게 있어서 만성 하혈증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혈증이라고 했을 때, 한 달 동안 계속해서 하혈을 한다고 해도 사람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병에 한두 해도 아니도 12년 동안이나 붙잡혀 있었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은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혈루증에 걸린 사람을 만지는 것도 부정하며, 성전에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모임에도 나가지 못하였고, 남편에게는 이혼을 당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여인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 주위에 보면 영적인 혈루증에 걸린 불행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그의 심령을 살찌우거나 인격을 성숙시켜주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그 말씀을 쏟아버리는 참되지 못한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12년은커녕 하루도 못 갑니다.  하루가 아니라 한 시간도 못 갑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이 여인이 왜 불행한 것은 이 여인은 그 좋은 날들을 아무런 의미도 없이 세월을 허송했습니다.
이 여인은 12년 동안이나 병에 매여 전전긍긍하며 고생했습니다.  여기에서 12이라는 것은 하늘의 수인 3과 땅의 수인 4를 곱한 일종의 만수로서 긴 세월을 가리킵니다.
단테는 그의 신곡에서 "가장 현명한 자는 허송세월을 가장 슬퍼한다" 라고 말합니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12년은 참으로 안타까운 세월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여인은 물질을 허비했습니다.
본문 26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혈루증으로 12년 동안의 기나긴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이 여인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있던 것들도 다 허비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병이 오랫동안 계속되면서 가산은 다 탕진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가 받은 정신적인 고통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도 무섭지만 그러나 정신적인 질병이 더 무서울 수도 있습니다.
12년 동안 이 여인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허비하였어도 그 결과가 좋으면 괜찮습니다.  육체적인 질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여도 그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 여인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다 허비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더 심각해진 질병이었습니다.  이제 이 여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내일이 없습니다.  이 여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더 심각해진 육체적인 질병과 부정적인 시각으로 가득 찬 정신적인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절망적이었던 이 사람에게, 소망이 없는 이 여인에게 놀라운 구원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본문 27절에 보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대해 들었다고 했습니다.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 여인에게 어느 날 이상한 소문이 들려옵니다.  그래서 그녀는 수소문해서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는 모든 소식을 들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렇게 놀라운 기적을 한 두 번도 아니고, 수없이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행하신 사건을 이 여인은 갈급한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여기에서 '듣다'라는 말은 '아부아'라는 헬라어인데 로마서 10장 17절의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 여인은 믿음을 동반하고 들었습니다.  선조를 통해서 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메시아가 이러이러한 이적을 행하신다고 예언하셨는데, 그 분이야말로 메시아가 아니겠느냐고 이렇게 믿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분에게 가면 12년 동안 나를 괴롭혔던 이 질병에서 나음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우연히 길을 걸어가다가 들려오기 때문에 듣는 무의식적인 들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들을 때에 이 여인과 같은 동일한 기대와 믿음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과 그 믿음에 전적으로 동참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에 동참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는 동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솔직히 진실된 행동이 없는 입술만의 신앙을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보아왔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앞에 서서 그 믿음에 동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대와 흥분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축복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은 부모와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가난한 몸이 되었습니다.  친구들도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외로운 여인은 이제 그야말로 빈손입니다.  붙들만한 재산도 없습니다.  함께 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그 절망적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인생에서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환난의 바람이 불어오고 문제가 닥쳐오고 마음 속에 절망과 슬픔이 다가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고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세상과 문제는 간 곳 없이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십시오.  당신의 손을 내 밀어 예수님의 옷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옷을 붙잡는 순간 여러분이 가슴에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다 풀려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율법은 피가 흐르는 이 여인을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찍었습니다.  자신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이 만지는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이 부정해집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제 예수님은 부정해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예수님이 부정해 진 것이 아니라 부정한 이 여인이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이 오염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이 정결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신비가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죄를 정결하게 해 주시는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힘 주시고 나의 추악함을 보혈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 주시는 주님께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옷자락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에 씻음을 받으십시오.  비록 누구처럼 환상을 본 적도 없고,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오늘 말씀을 듣고 찬송하는 중에 내 영혼이 주님의 옷깃에 접촉되기를 바라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내 영혼이 주님의 옷깃에 접촉되면 내 육신이 안고 있는 모든 질병들이 깨끗이 낫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다 떠나가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 이 시대를 가리켜서 믿음의 열정이 사라진 시대라고 말합니다.  구원의 여정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시대라고 말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있지만 쉽게 감동하지를 않습니다.  과거처럼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나도 은혜를 받고 싶다.  나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고 싶다."  이런 간절함이 없습니다.  머리 속에는 지식으로 충만한데 그 지식이 목구멍을 타고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입은 앵무새처럼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뜨거움이 없습니다.  마치 영적 뇌졸중에 걸린 사람들처럼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래서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믿어서는 자녀와 후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너무나도 자주하는 말이지만 예수를 제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기 전에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그 모습 그대로 여러분의 자녀들과 그 후대들이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만 잘 믿어야 한다고 백날 말해도 아이들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천만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진실한 몸부림 있는 신앙이 아이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영적 흔적을 남겨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오늘 이 여인처럼 예수님만이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주 앞에 서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만나십시오.

때때로 살아가다 보면 말할 수 없는 문제와 어려움들이 우리를 둘러쌀 때가 있습니다.  동서남북 그 어디를 바라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들려오는 이야기는 절망의 이야기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동서남북 모든 것이 다 가로막히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절망하는 것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또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리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를 고통 가운데 빠지게 하는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를 듣지 마십시오.  절망의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내 자신을 바라보면 절망이고, 환경을 바라보면 절망이고, 듣는 이야기가 절망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갈 때 놀라운 은혜와 축복과 기적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못 고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못 고칠 병은 없습니다.  사람은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불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믿고 의지할 때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다가올 것입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어부생활을 하던 베드로가 밤새 그물을 던지고 또 던지고 또 던졌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빈 배를 끌고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사랑하는 여러분, 갈릴리 호숫가에, 그것도 낮에, 깊은 데로 가라고 하십니다.  경험상으로는, 이론적으로는 그곳에는 절대 고기가 있지 않습니다.  그물을 던져도 잡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던지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어서 옆에 있는 이웃의 배를 불러서 두 배가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밀어내면서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어쩌면 예수님의 발등을 밟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주님 앞에서 부딪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뒤에서 밀고 밀리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옆에서 부딪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지만 의미 없는 부딪힘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제자들마저도 옹위하여 길을 가고 있었지만 저들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아주 작은 기적조차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능력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12년 동안이나 괴롭혀 왔던 그 질긴 병이 나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우리들의 예배가 예수님과의 의미 있는 영적 부딪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분의 보혈의 피에 내 죄가 용서를 받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뜨거운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이 한 가지만은 분명히 고백하고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는 예수님만이면 만족합니다.  예수님만이 나와 내 가정과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렇게 찬양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오늘 본문 3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12년 동안이나 질병으로 힘든 삶을 살았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손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세상을 향해 평안히 나아가십시오.  주님이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과 승리,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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