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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 (느 5: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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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 (느 5:14-19)

우리는 그동안 느헤미야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깊은 신앙과 민족에 대한 남다른 사랑으로 다 무너지고 불타버린 채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재건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재건하는 과정을 살펴왔습니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같은 외부의 극심한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부문제도 생각보다 심각했었습니다. 

성벽재건 도중 백성들은 경제적인 문제와 이것을 이용한 지도자들의 탐욕으로 인한 고통으로 마침내 원망과 불평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고통과 부르짖음을 듣고 성벽 재건 공사를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상황을 둘러보고 그 문제의 원인을 파악했습니다. 

5:9절 말씀에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러한 악행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의 욕심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보다 물질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잊으면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지도자들을 향하여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내부문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했습니까? 

백성들의 지도자의 잘못된 행위를 지적하고 중단을 촉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느헤미야가 자신이 먼저 모범을 보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느헤미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느헤미야가 모범을 보여준 일은 총독의 권리를 포기하였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시면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으로 12년을 봉사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비용을 백성이 내는 공적 세금으로 충당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의 정책은 총독이 왕과 중앙정부에 바칠 세금뿐 아니라, 자기 개인과 자기 수하의 관료 및 가솔들의 생활비, 그리고 외교행위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거둘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이런 권한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 때 얼마나 많은 물질을 가지고 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는 자기와 자기의 식솔들을 부양하고, 관료들과 외부귀빈들을 접대하는 모든 비용을 개인적으로 부담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자신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돕는 고위관료들 까지도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느헤미야의 모습은 느헤미야 이전의 총독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세요.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이란 느헤미야 이전의 총독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으로 착취를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전 총독들만 백성들을 착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총독의 하위 관리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총독들과 총독 밑의 고위관리 뿐만 아니라 하위관리들까지 백성들을 착취하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처럼 이전 총독과 그의 수하에 있는 관리들의 나쁜 소행을 따라 하지 않았습니다. 

2. 느헤미야가 모범을 보여준 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 보시면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당시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빚을 갚을 수가 없어서 땅을 팔아야 할 때, 돈 있는 지도자들이 헐값에 사서 자기 소유의 땅을 늘리거나, 비싸게 되팔아서 부를 축척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의 지위와 부를 이용하여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니라 그의 수하에 있던 하위관리들도 오로지 성벽공사에만 전념하며, 백성을 상대로 고리대금을 하거나, 땅을 사고 넓히는 일에 관심 갖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3. 느헤미야가 모범을 보여준 일은 백성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17-18절을 보세요.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이방 족속들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페르시아 왕궁에서는 흔히 왕의 식탁에 귀족들이 함께 하곤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제국의 유다 총독으로서 페르시아의 관행에 따라 식탁에서 자기의 고위관료들과 함께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돕는 측근들과 다른 지역의 고관들이 방문하면 이들도 접대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식사 때마다 수백 명분의 음식을 마련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그 모든 식사비용을 백성의 세금으로 충당하지 않고 개인 부담으로 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지위와 권력이 주어지면 어떻게든지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압제하고, 불의를 행하며 높임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어떠한 불의도 행하지 않고, 오히려 백성들이 성벽 재건 공사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알고 조금이라도 부담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백 년 동안 12대에 걸쳐 만석의 재산을 유지했던 경주 최부자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장기간 한 집안이 부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합니다. 최부자 가문이 이처럼 계속적으로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습니다. 가정에 내려오는 가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①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 ②1년에 1만 섬 이상 재산은 모으지 말라. ③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지 말라. ④집에 온 손님은 융숭하게 대접하라. 

⑤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⑥가문에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부자 집안이 칭송을 받는 것은 부를 많이 축적했고,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자이지만 많은 선행과 독립운동의 후원자 역할을 통하여 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느헤미야가 총독이라는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느헤미야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이미 많은 돈을 가지고 있기에 더 이상의 물질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까? 오늘 말씀에 그 원동력에 대하여 분명하게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15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코람데오”의 정신입니다.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방법으로 힘을 사용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을 그 지위에 놓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루살렘에 보내신 분도, 자신을 총독의 지위에 올려놓으신 분도, 자신에게 책임을 주신 분도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인 줄 알았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물질의 유혹에 대하여 깨끗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는 다른 분명한 차이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고백처럼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한다."는 고백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하여 "왜 당신은 손해 보면서 어리석은 삶을 사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의 답변은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상의 고백과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채 살게 된다면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코람데오의 신앙, 하나님을 경외하며 두려워하는 삶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가 권력과 힘이 있는데도 이처럼 깨끗한 살았던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해야 할 목표에만 충실하였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유다의 총독을 자원한 이유는 성벽을 재건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성벽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주위의 공격과 어려움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만 신경 쓴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은 어떻게 했든지 간에 그는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느헤미야는 총독의 자리에 올랐을 때 마음만 먹으면 큰 부자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총독으로 있었을 때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결코 물질에 집착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압제하거나 불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유다의 총독이 된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의를 행하고 백성들을 압제하여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지도자가 된 것은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그의 목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목표는 성벽을 재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지도자의 자리에 들어서면 목표를 상실합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느헤미야 이전의 총독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힘을 이용하여 오로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을 취하여 부를 축척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도자된 목표가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지도자로서의 목표의식이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소유 지향의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지도자는 소유를 위해 일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지도자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무언가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목표 이외에 다른 요소가 그 지도자를 사로잡기 시작하면 그의 리더십은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표에 의해 움직이는 삶, 목표에 의해 움직이는 교회가 되어야 우리는 썩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고, 변혁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내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 동기가 되고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을 위해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셔야 합니다. 특별히 직분을 맡고 있는 분들은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직분은 나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귀한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느헤미야처럼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직분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물질과 모든 것을 내어놓고 성도와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지도자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힘을 함부로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은 권력을 남용하지 않습니다. 힘이 주어지면 사랑하는데 사용하여야 합니다. 힘이 있습니까? 사람을 사랑하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나라와 민족과 교회와 성도와 이웃을 사랑하는데 사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알량한 힘으로 다른 사람을 시험 들게 하고, 피곤하게 만드는데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혹 비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다면, 이제는 본질인 복음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교회는 무엇을 위한 곳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진지하게 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질을 찾지 못하면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로서 우리 모두가 느헤미야처럼 개인적인 욕망과 욕심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목표와 사명을 위해 헌신하며, 충성하는 삶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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