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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정체성 (엡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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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정체성 (엡 2:1-9)   
 
죽은 사람 살려 주면 사례비를 얼마 줘야 할까? 우리의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아주 실력 있고 신통한 사람이 그 사람을 살려 준다면 그에게 사례비를 얼마나 줘야 할까? 살려 줘도 사례비를 안 주면 될까? 반드시 줘야 한다. 우리는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십계명 중에 5계명이 무엇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이다. 아멘.

그렇다면 우리는 부모님께 사랑의 빚을 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몰라도 성장한 성인이라면 반드시 매달 효도 비를 내야 한다. 효도 비를 내지 않는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단돈 만원이라도 내라.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 문제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효도 비를 낼 돈이 없으니 안 내도 되는가? 물론 돈으로는 낼 수 없지만 부모의 속을 썩이지 않고,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부모를 기쁘게 하는 효도일 것이다. 이렇게 살지 않고 매일 부모의 근심 걱정거리만 되는 행동과 삶을 살아간다면 이것은 개만도 못한 인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인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 이것을 본문을 통해서 찾아보고 그 교훈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서 배은망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

먼저 우리의 정체성,우리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1, 5a)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 ‘허물로 죽은 우리’(5a)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전 인류의 대표 첫째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를 범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정녕 죽으리라’라는 말씀대로 아담만 죽은 것이 아니다. 다음의 본문을 찾아보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우리는 확정을 지어야 한다. 나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살아가야 한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생명줄이 끊어졌다는 말이다. 마치 몸이 목숨 끊어지면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것이다. 따라서 죽었다는 것은 의식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 등지고 세상 풍속과 악령을 따라 다니는 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좀 더 실감나게 알 수 있는 장면이 누가복음 15장 11절 이하의 둘째 아들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아버지의 품이 싫어 아버지의 품을 떠난 아들은 나중에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품에 다시 들어가서 종살이라도 하며 생명을 연장시켜야겠다고 다짐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때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둘째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

“죽을 수밖에 없는 나”가 아니고 “죽었던 나”임을 잊지 말라. 그래서 우리 해성교회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기도하거나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죽을 수밖에 없는 나”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성경을 모르는 행위요, 부인하는 행위며,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을 섭섭하게 하는 행위이다. 우리 한 번 더 같이 따라 합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

이것이 우리의 마음과 몸에 본능이 되기까지 새겨야 한다. 그래야 정상적인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기초가 닦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확정이 되지 않아서 구원에 대한 감사도 없고, 자신이 잘나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교만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간가 하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던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

모든 인간은 범죄의 결과로 악한 세력의 지배를 받고 하는 일마다 죄 된 본성을 따라 행하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던 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속에 있는 성령과 영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라 악령과 자기 자신의 육체와 마음의 욕심을 따라서만 사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본문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라고 정의한다. 

이는 인간으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쌓으며 악과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 본질과 습관은 얼마나 변화가 잘 되지 않는지 모른다. 예수를 믿은 지 이후로도 이런 우리의 죄악 된 본질과 본성이 얼마나 잘 나오는지?

성을 내지 말라 했음에도 성내는 것은 본능적으로 전문가들 아닌가? 거짓말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어린 꼬마 아이부터 늙은 노인까지 얼마나 잘하는가? 미워하는 것, 눈 꼬이는 것, 다른 사람의 물건이나 사람을 탐내는 것, 시기, 질투, 욕설 등 참으로 입에 담기 어려운 말은 스스럼없이 내 뱉는 것이 인간들이다. 

또 세상 사람들처럼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고 하면 얼마나 아첨도 잘하고, 가식도 잘하고, 진실치 못한 외식쟁이로 잘 살아가는지? 그래서 겉과 속이 전혀 다른 모습을 연출하는 전문가들 아닌가? 

“아, 나는 그렇지 않은데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 봅시다. 우리도 예외 없이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우리의 정체성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존귀케, 영화롭게, 찬송하며 살아가라고 지은 인간이었지만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화나게 하고, 속상하게 하고, 분개(憤慨)하게 만드는 전문가들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희망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다. 아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한다. 인터넷이나 신문, 우리 주변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욕하는 글과 사건들을 많이 보게 된다. 우리는 그런 것을 접할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을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습니까? 그들은 아직까지 무엇을 얻지 못해서 그럴까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죄, 사망, 마귀의 수하에 있어서 그러니까 우리는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하고, 복음을 전하여 구원하여야 할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의 은혜와 선물로 구원함을 받은 우리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4-9)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우리의 본래 실상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아니라 완벽한 멸망에 처했던 가장 희망이 없는 우리였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었는데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은 자들이 되었다(롬 5:10). 할레루야!!!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놀라운 일을 계획하셨다. 바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을 통해 새 생명을 얻어 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또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우리를 다시 살리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해 주셨다(6절).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있게 해주셨다는 말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분과 소속이 완전히 바꾸어 주셨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부활이라고 하면 몸의 부활만을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분명히 부활을 말할 때 몸의 부활뿐 아니라 죽었던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까지 말씀하고 있다. 즉 중생을 부활로 보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중생, 부활, 구속, 재창조를 다 같은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참조. 요 3:6; 롬 6:8, 11; 갈 2:19-20).

따라서 우리가 받은 구원은 자비로우시며 우리를 무한히,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선물이다(4-10절). 우리 자신들의 노력의 결과로 얻은 것이 전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겸손해야 한다. 나의 실상을 인식하고 빚쟁이의 심정으로 죽도록 충성하며 살아가라

그러면 이제 서론에서 질문 드렸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죽은 사람을 살려 주면 얼마의 사례비를 주어야 할까요? 그렇다면 죽었던 우리를 사활대속의 공로로 살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는 얼마만큼의 사례비를 주어야 할까요? 일억 십억 무한히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그 구원에 대한 값으로 계산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입 싹 닦고 있으면 될까요? 계산으로 댈 수 없으니 할 수 없다 하고 모른척하고 지내야 할까요? 죽을 때까지 사활대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을 계속 부르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경우도 그를 배반하거나 그의 분노를 쌓거나 화나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것은 죽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그를 가까이하며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한 번 같이 합시다.

“은혜의 대가는 감사이다.”
“은혜의 대가는 감사이다.”
“은혜의 대가는 감사이다.”

항상 감사하며 살 뿐 만 아니라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자신을 자랑하거나 자기가 잘나서 뭐가 된 것처럼 교만하거나, 이정도 충성했으면 되었다고 판단하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 죽도록 충성하고도 무익한 종으로 살아야 한다. 아멘!! 이렇게 살지 않았던 과거를 회개하고 이제 정신을 차립시다. 재정립을 합시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의 실상을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 전적 사활대속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에 대한 빚을 평생 청산해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쟁이임을 명심하며 살아야 한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구원 받기 전의 나 자신의 정체성에서 구원 받은 이후의 변화된 정체성을 항상 인식하고 살아가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그분을 경외하며 그의 명령인 진리와 영감에 순종함으로 그를 기쁘시게 존귀케 영화롭게만 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가 주님의 다시 오심 재림을 제대로 준비하고 맞이하는 정상적인 신앙인이다. 이러한 주인공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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