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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만에서 겸손으로 (대상 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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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에서 겸손으로 (대상 12:1-12)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알렉산더 대왕 휘하에 대왕과 같은 이름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병사가 형편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난 알렉산더 대왕이 그 알렉산더라는 병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네 이름을 바꾸어라. 그렇지 않으면 네 삶을 바꾸어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알렉산더 대왕의 마음과 같지 않으실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같은 명을 내리시지 않으실까요? “네 삶을 바꾸어라!”

오늘 본문에는 그 삶을 바꾼 사람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르호보암 왕 이야기입니다. 르호보암 왕은 하나님을 분노케 하던 삶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그 삶을 바꾸었습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교만에서 겸손으로’ 그 삶을 바꾸었습니다.

교만에서

르호보암은 교만했습니다. 오늘 본문 1 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른 직후의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솔로몬의 뒤를 이어 르호보암이 왕 위에 오를 때 나라가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런데 북왕국 여로보암이 우상숭배를 하며 영적으로 나라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북왕국에 있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대거 남왕국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11:16-17에 이 내용이 보다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마음을 굳게 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레위사람들을 따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고자 한지라 그러므로 삼년 동안 유다 나라를 도와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을 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리가 삼년동안을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하였음이더라.”

남왕국으로 피난 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남왕국 유다 백성들과 함께 힘을 합해서 3년 동안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왕국 유다를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넷째 해부터가 문제입니다. 르호보암이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북왕국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남왕국 유다 백성들까지 모두가 르호보암 왕처럼 율법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른 제 5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르호보암은 왕위에 오른 뒤 나라가 견고해지고 세력이 강해지자 교만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자기가 왕 위에 오른 뒤에 처음보다 나라가 점점 더 강성해 졌습니다. 그리고 북왕국과 비교해 볼 때 점점 더 국력의 차이가 커졌습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게 됐던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실 르호보암은 처음 왕이 됐을 때 무척이나 불안했습니다. 자기가 왕이 되면서 나라가 분열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점점 강성해졌습니다. 

그러자 르호보암은 착각하게 됐습니다. 마치 자기가 통치를 잘해서 그렇게 된 줄로 알게 됐습니다. 자기가 대단한 왕인 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교만하게 된 것입니다.

이솝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질 무렵 길을 거닐던 이리가 자기의 긴 그림자를 보고 탄복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내가 이처럼 덩치가 크다니... 그런데도 난 사자를 두려워했잖아. 이것 보라고. 내 몸의 길이가 3미터도 넘겠어." 그 순간 이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내가 왕이 되어야지. 그래서 모든 동물을 다스려야지. 물론 사자도 내 밑으로 오게 해야지“
그러면서 으스대며 만나는 동물들에게 횡포를 부렸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 이 이리가 사자를 만나게 됐습니다. 역시 사자 앞에서도 거만하게 굴던 이리는 단번에 물려 죽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교만이란 자신에 대한 착각에서 시작됩니다. 실제의 자신보다 자신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강한 존재인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능함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능력이 있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자신이 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심할 경우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도전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렇게 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이것이 교만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착각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어있는데 마치 내 힘으로 내가 되어있는 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내가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있는 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내가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겸손하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성품이 좋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착각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런 교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깨뜨려 놓습니다.

겸손으로

다행히 르호보암은 교만에서 스스로 돌아섰습니다. 6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이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다음 몇 가지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겸비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는 ‘카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원 뜻은 ‘무릎을 꿇다’입니다. 그러니까 르호보암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이 왜 스스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을까요?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깊이 깨닫게 됐기 때문입니다. 

르호보암은 왕이 된 뒤 승승장구하자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줄로 착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이 쳐들어왔습니다. 유다 여러 성들을 정복하고 자기가 있는 예루살렘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이제 자기 힘으로 저 애굽 군대를 막아낼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제야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올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평상시 이 사실을 깨닫고 사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아니 매사가 다 잘될 때 승승장구할 때 이 사실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정말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난 뒤에라도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도 겸손한 사람입니다.

다음으로 르호보암이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라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할 때 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르호보암은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교만했던 것을 깊이 죄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고 보니 그동안 교만했던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교만했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자신이 교만했음을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우리 심령 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라는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가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교만의 증거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아주 작게 여기지만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겸손을 대단히 크게 여긴다.” 그러니까 겸손한 사람은 늘 자기의 교만을 찾아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늘 자기 안의 겸손을 찾아내서 자랑합니다.

또 하나 하나님께서 르호보암의 스스로 겸비함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목하여 살펴보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르호보암이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고 겸손으로 돌아선 것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의 겸손을 인정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겸손이어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겸손은 참된 겸손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겸손하다고 말해주는 겸손도 참된 겸손이 아닙니다.

사실 겸손이라는 말은 성경에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일반 세상에서도 이 겸손이라는 말이 쓰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겸손과 일반 세상에서 사용하는 겸손이라는 말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일반 세상에서는 겸손을 한 사람의 성품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겸손이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내 보이는 사람됨의 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이 무엇인가(what)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겸손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겸손이란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보이는 태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이 무엇인가(what) 보다도 누가 겸손한가(who)에 관심을 가집니다. 
작곡가 하이든은 겸손한 음악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항상 작곡을 시작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항상 작곡을 마무리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썼습니다.

어느 날 영국 여행 중에 헨델의 [메시아]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작품을 작곡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매일같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영감과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작품이 [천지창조]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 천지창조가 공연되었습니다. 그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고 공연장에 입장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관중들이 하이든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쳤습니다. 그 때 하이든은 손을 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 음악은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겸손은 늘 하나님을 인정하고, 늘 하나님을 의지하고, 늘 하나님을 높이고,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평상시 늘 하나님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늘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높이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교만에서 겸손으로

오늘 본문을 보면 르호보암이 교만에서 겸손으로 삶이 변화된 비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의 일로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하셨단 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애굽 왕 시삭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남왕국 유다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때 르호보암 왕과 나라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선지자 스마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르호보암 왕이 이 자리에서 선지자 스마야의 말씀을 경청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르호보암을 변화시켰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이 시 119편입니다. 무려 176절이나 됩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이 알레프’(א)에서 ‘타브’(ת)까지 22개입니다. 22개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시를 각 8절씩 써놓았기 때문에 176절이나 됩니다.
이 176절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쓴 노래입니다. 한 절도 빼놓지 않고 다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복입니다.

그 중에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는 기원이 8번이나 나옵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이것을 “주의 말씀대로 소성케 하소서”라고 번역했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주의 말씀으로 죽어가던 영혼을 다시 살려주소서’, ‘주의 말씀으로 잠자던 영혼을 깨워주소서’, ‘주의 말씀으로 죄에 빠져 신음하던 영혼을 건져주소서’, 그리고 ‘주의 말씀으로 교만한 심령을 겸손케 하소서’

그렇습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를 살아나게 합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경청하게 될 때 그 말씀이 우리 심령에 들어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을 때 그 말씀이 우리 심령에서 영적으로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우리를 살아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로호보암은 선지자 스마야의 말씀을 통해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마치 머리를 쇠망치로 맞은 것처럼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교만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감히 하나님을 버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자기는 하나님을 잘 믿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직도 자기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자신을 다시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놀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 우리의 속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자신의 교만을 보아야 합니다.
자칫 말씀 속에서 자신의 자랑거리를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말씀 속에서 다른 사람의 약점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말씀을 통해 더욱 교만해 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씀을 자기 스스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교만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우리 심령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겸손한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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