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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 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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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 9:1-22)
  

들어가는 말

2007년 4월 8일 터키에서 독일인 선교사와 현지 목사 그리고 성도 한 분이 이슬람 과격단체 청년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독일인 선교사 털만은 156번, 네자티 현지 목사는 100번, 현지인 성도 우르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당한 후 모두 목이 잘려 순교했습니다.
이 참혹한 일을 당한 후 더욱 놀랍고 감동적이었던 것은 순교자의 가족들이 보여준 신앙과 용서의 고백이었습니다.

독일인 털만 선교사의 부인은 “저들을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저들이 한 일이 무엇인지 진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터키와 터키인들을 사랑합니다.”라고 사랑과 용서의 고백을 공개적으로 했습니다.
현지인 목사 네자티는 생전에 “나는 무슬림으로 태어났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며 일사각오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의 죽음 후에 그의 부인은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정말 의미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네자티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었습니다. 나는 그와 인생을 같이 했다는 것 자체를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는 영광의 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저 또한 이 영광에 합당하게 살기 원합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평신도 우르 형제도 “나는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을 전하다 죽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라고 한 그의 고백대로 고귀한 순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믿음이 무엇이길래 이렇게 죽고,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의식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이란 만남입니다.

본문의 말씀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바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최대의 사건은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복음이 이방 세계로 전파되어 전 인류가 축복을 받게 된 일이 바로 이 청년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 사울은 누구입니까?

사울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고, 유대 전통과 히브리 율법에 아주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다소라는 곳에서 자랐습니다.
그 당시 다소는 헬라 문화와 철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다소 출신이라는 것 자체가 헬라 문화에 상당한 식견이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시민권이란, 오늘날 미국 시민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지위를 부여하는 자격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당대 석학이라고 일컬어졌던 ‘가말리엘’선생의 문하였습니다.
그는 지성을 갖췄습니다.
대부분의 지성인들에게는 행동이 없습니다.
머리는 분명히 뛰어나고, 판단력도 빠르고, 비판력도 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지성인이 가진 약점입니다.
‘실천하는 지성’이 못 된다는 얘기지요
하지만 사울이라는 청년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목숨을 걸줄 아는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지성인 사울은 그렇게도 기독교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고 있었습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로마 황제 시이저의 반역자요, 유대 민중의 선동자가 되어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선택받은 유대민족이 기다리는 메시아라는 기독교인들의 주장은 유대인 식자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은 자입니다.

신21:23절을 보십시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무에 달려 하나님께 저주받은 예수를 어떻게 유대민족이 기다리는 거룩한 메시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정통 유대인으로서 견딜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불경한 기독교 무리들을 박살내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의 의무로 여겨졌습니다.
사울은 ‘실천하는 지성’으로서 대제사장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아 다메섹을 향하여 사납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9장1절에 보면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고 사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등등하여’라는 말은 헬라어로 ‘숨을 내쉰다’는 의미입니다.
즉 분노하여 씩씩거리며 숨을 거칠게 내쉬는 흥분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2.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현장으로 가봅시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었을 때에, 성경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3절)”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려졌습니다.(4절)”
사울이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사울의 교만한 지성이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아가 깨어지고, 겸손하게 참으로 겸손하게 땅에 이마를 대고 엎드리지 않고는 주님을 만날 수 가 없습니다. 
그렇게 사납게, 자신 있게 그리고 당당하게 걸어왔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앞에 쓰러졌습니다.

8절에 보면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경학자 글로악(Gloag)은 “이렇게 해서 사울은 그가 계획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다메섹에 들어갔다. 즉 남여 신자들을 끌어다가 감옥에 집어넣는 대신 그 자신이 초라한 모습으로 눈까지 먼 채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힌 자가 되어 이끌려가게 된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던 그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에 붙잡혀 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포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증오와 혈기의 노예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제 9절을 보십시오.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이 기간 동안 사울은 실존적인 고민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고민이 깊어지면 밥맛도 입맛도 떨어지게 되지요.
먹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깊은 내면적인 갈등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태까지 걸어왔던 길이냐? 아니면 이제 새롭게 발견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냐?’ 

그에게는 선택과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부와 명예와 안락과 지위와 특권 그리고 세상 친구들의 기대와 그들에 대한 의리를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이것들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세상의 것들과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끌어 갖다 놓아도 저울추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기웁니다.
그는 결단했습니다.

빌3:7-9절에서 후에 사울은 그 때의 결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3. 회심 후 사울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어떤 삶의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1) 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시각변화)

18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시각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비늘이 벗어진 것입니다.
세상적인 가치에서 벗어나서 하늘의 가치로 살게 되는 변화 말입니다.
동물처럼 본능으로만 살던 사람이- ‘누가 앞서느냐, 누가 좀 더 버느냐, 누가 좀 더 욕망을 만족시키느냐, 누가 좀 더 좋은 옷을 입고 사느냐, 누가 좀 더 많은 땅을 차지하느냐 라는 가치관에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가치관을 배우고 따르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고, 영원의 세계를 그리며 살고,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주일 예배를 못 드리는 분들의 이유가 참 다양하더라고요.
‘몸이 피곤하여’ ‘한 주간 동안 바쁘게 지나다 보니, 노는 날에는 집안일을 챙겨야 하니까’
‘게을러서’ ‘비가 와서’
이런 이유들을 들으면서 ‘예배가 그렇게 하찮게 여겨지는가?’라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졌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런 일에 밀치고, 저런 일에 밀치고, 이런 일로 양보되어야 하고, 저런 일로 우선순위가 뒤틀리는 그런 분이신가?’
사울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다르기에 이렇습니까?

비늘이 벗어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소경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비늘이 벗어질 때 하늘나라가 보이게 됩니다.
욕망과 정욕의 비늘이 벗어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게 됩니다.
육의 비늘이 벗어져야 영의 눈이 밝아집니다.
은혜를 받으면 시각변화가 먼저 일어납니다.

2) 말하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고백의 변화)

20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2절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그리스도의 대적이었던 사울은 지금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의 그리스도이시라’
하나님을 만난 사람,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자주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밥을 먹든, 공부를 하든, 잠을 자든, 강의를 하던 장사를 하든, 김을 매든.......
언제나 그의 입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꽉 차있습니다.
입만 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입니다.

강단에는 환경에 대한 얘기가 있어야 합니다. 
사회정의에 대한 얘기가 있어야 합니다.
민주화에 대한 얘기도 있어야 합니다. 
남북통일에 대한 얘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강단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가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얘기가 넘쳐나야 합니다.
은혜를 받으면 그의 입은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집니다.

3) 사명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아그립바 왕에게 변명할 때, 자기 자신의 회심에 관하여 증언합니다.
그의 증언은 이렇습니다.
행26:16-18절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함이니”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증인으로서, 이방인에게 파송된 자로서 자신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이 사명을 발견한 후로 순교하는 순간까지 이 일에 정진했습니다.
한 순간도 좌우로 곁눈질 하지 않았습니다.
달려가다가 한 순간도 후회하거나 회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앞을 바라보다가 한 순간도 뒤를 돌아보거나 멈칫멈칫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왜 사는지, 왜 일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새벽기도회 때 드린 말씀입니다.
1995년부터 16년 동안 지금까지 쉬지 않고 캠퍼스 전도를 하고 있는 윤원석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명문대학에 들어갔지만 삶에 대한 허무감과 두려움에 시달려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음란물과 게임에 빠져 폐인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배를 통하여 성경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말씀을 묵상하며 비참한 운명을 찬란하게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면서 그의 인생에도 그런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가복음 2장을 묵상했습니다.
중풍병에 걸린 슬픈 운명의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My son, your sins are forgiven. 막2:5)”
초등학생 때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육신의 아버지가 없었던 그는 그것이 큰 상처가 되어 늘 패배감과 절망에 짓눌려 살았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나님은 그를 ‘내 아들아’(My son)라고 부르시며 죄 사함의 은혜가 무엇인지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말씀이 믿음으로 그의 마음에 와 닿자 중풍병자가 운명의 자리, 슬픔의 자리, 상실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회복되었듯이 그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의 믿음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전도 받았던 모교에서 복음을 전하는 교수이자 전도자로 헌신하게 되었다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운명을 탓하며 좌절하던 중풍병자와 같은 나를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아들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나는 이 말씀을 힘입어 오늘도 나를 아들이라 불러주시는 하나님, 그 분 안에서 참 평안과 자유를 누린다. 그리고 내가 만난 그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오늘도 말씀을 가지고 캠퍼스 안으로 힘차게 나아간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기에 그분을 만나면 사람이 이렇게 뒤집어집니까?

나가는 말

4월 28일은 우리 교회의 총력전도주일입니다.
이 날은 우리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소개하는 날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의 학문 세계가 결정됩니다.
어떤 부모님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과 인생의 큰 줄기가 결정됩니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가정의 행복이 결정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는 그 인생의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인생과 그렇지 못한 인생은 그 출발부터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교우 여러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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