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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버리겠느냐? (요 13: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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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버리겠느냐? (요 13:36-38)


어느 날 사탄이 지금까지의 사업을 정리하고 그 동안 사람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모든 연장들을 모아 경매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사탄은 인간들의 마음을 미혹하고, 넘어지게 했던 그리고 망하게 하며, 약하게 만들고 타락시켰던 연장들을 진열하였습니다. 시기심, 고집, 욕심, 보복심, 미움, 교만, 혈기, 열등의식 등 실로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그런데 연장들이 놓여있는 맨 끝에 아주 비싼 가격에 나와 있는 잘 포장된 도구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비쌌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탄은 그것이 “실망” 이라는 무기로써 얼마나 위력이 있었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단히 훌륭히 일하던 사람도 이 실망으로 공격하면 일을 멈추었으며, 교사도, 집사도, 임원도, 권사도, 장로도, 목사도 이 무기 앞에서 꼼짝 못하고 무기력한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더라는 것을 입에 거품을 토하며 신나게 설명했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사탄에게 질문하였습니다. 
“혹시 그 연장을 사용하여도 넘어지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었는가?”라고 묻자 사탄은 “이 연장을 사용하여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들이었습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 무기가 아무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범사에 감사하면 사탄도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하게 될 줄 믿습니다.
시련 없이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시련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을 더욱 단련하시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자 과정입니다. 
“잔잔한 바다에서는 좋은 뱃사공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영국 속담처럼 시련 없이 성공한 사람 없고 시련 없이 훌륭한 성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훌륭한 작품은 그만큼 더 많은 시련을 거친 결정체입니다. 
그러므로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시련이란 진리로 통하는 으뜸가는 길이다”라고 하였으며, 세네카도 “거친 땅 위에서 굳어진 발굽을 가진 짐승은 어떠한 길이든 걸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쇠붙이를 달구지 않고서는 도구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시련 없이 인간을 훌륭한 인격자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폭풍은 참나무가 뿌리를 더욱 깊게 박도록 한다”는 G. 허버트의 말처럼, 실로 시련은 인간을 만드는 계기이며 보다 나은 상태로 변화시키기 위한 진통입니다. 시련은 인간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보지 않은 자는 작은 시련에도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인생을 성공시키는 원동력이며 매사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추진력이 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롬 5:3,4)는 성경 말씀처럼 시련 극복의 의지는 인내를 기르고 소망을 키웁니다. 생활 속에서 오는 시련을 잘 견뎌내고 희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다면 앞으로 더욱 큰 시련이 닥친다 해도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작은 일에도 금방 낙심하고 좌절하지는 않는지요? 

먼저 생각할 것은 자신만만한 베드로입니다.
사실 꿈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꿈 하나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부여잡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요셉이 형들 앞에서 자기가 꾼 꿈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를 할 때 그 말을 기분 좋게 들었던 형제들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형제가 다 요셉 앞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더라고 하는 그 말을 들을 때 어떤 의미에서는 동생이 형들보다 잘 돼서 나쁠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형만 한 아우 없다고 하는데 이왕이면 형들이 더 잘 됐으면 하는 마음도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 형들 입장에서도 이왕이면 형이 돼서 동생만 못하면 되겠나 하는 마음도 있을 테니 요셉의 말이 결코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데 사실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형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들이긴 했어도 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정을 모릅니다. 물론 서모가 그들 돌보았고 아버지가 다른 형제들보다 더 요셉을 사랑하였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어머니 없는 그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그들이 하는 일이 양치는 목자입니다. 그래 봤자 떠돌이입니다. 양떼를 따라 늘 이동하며 살아야 하는 나그네 생활입니다. 거기다가 유대 땅은 양을 치기에 적당한 일기가 보장된 곳도 아닙니다.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형들에게 인사 받는 위치에 선다고 하면 그것이 뭘까요? 그가 특별히 무슨 나라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하면 그럴 입장도 못 됩니다. 

그런데도 막연하기는 해도 요셉은 그 꿈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그 꿈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셉의 앞길에 험난한 여정을 펼쳐 놓으십니다. 처음에는 왜 그래야 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나중 애굽의 총리가 되고 난 다음에야 그 모든 이야기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혜와 복을 누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고 하나님께 칭찬받는 그런 자리에 나아가고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복을 받아 누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우리 가운데 또 누가 있겠습니까? 

사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좇았을 때 그에게는 큰 포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심히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의 수제자로서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그가 그만큼 예수님을 잘 섬겼다는 뜻도 됩니다. 한데 그의 성격이 좀 급합니다. 아니 자기감정에 솔직하다고나 할까요? 그는 남의 눈치보다 할 말 못하는 그런 성격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보다 앞서서 하고픈 말을 다 하는 그런 성격의 사람입니다. 

그는 일찍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하는 고백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사실 주님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그는 많은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적도 그가 처음 주님의 부름을 받을 때의 감격에는 비할 것이 못 됩니다.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참으로 이상한 날, 평생 고기를 잡았어도 그런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던 참으로 이상한 날이 지나고 날이 샐 때 그는 예수님과 맞닥뜨립니다. 

전에 동생 안드레가 메시야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소개를 하였지만 그는 큰 감동을 받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랬는데 참으로 이상한 날 아침 그가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막 배를 호숫가에 대려고 하는 순간 그 예수님이 무리들과 함께 호숫가로 오시더니 잠깐 배를 좀 쓰자고 하시더니 배에 올라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는 문득 베드로를 돌아보시더니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무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 마음에 깊은 찔림이 있었기에 베드로는 감히 아니라는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하는 말이 “밤새 수고하였으되 아무 것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그리고는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렸는데 그 순간 그는 눈을 의심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물을 내리자마자 고기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몰려와서 스스로 그물 속으로 빨려들 듯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두 배에 잠기도록 고기를 잡은 그는 너무도 두려운 마음에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한번 주님의 초청을 거절했던 베드로입니다.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 그 뒤를 따를 수도 있었건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베드로입니다. 그래서 더욱 두려운 것이요 죄송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래 두 말 할 것도 없이 주를 따랐던 베드로입니다. 

그날 이후 베드로는 한 번도 딴 마음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헌신적으로 따랐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서슴지 않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백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래 궁금한 나머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사실 이 말은 베드로의 진심이었습니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결코 헛소리가 아닙니다. 그만큼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누구보다도 앞서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고백했던 저였기에 더욱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주를 위해서라면 자기 한 목숨 어떻게 돼도 좋다고 할 만큼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그를 신뢰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습니다. 어떤 신념을 위해서도 목숨을 버리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 나를 가장 존귀하게 여겨주는 사람을 위해서 어찌 한 목숨 아끼겠습니까? 
그건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의 장담만큼이나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또 우리 모두는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서 항상 주님 앞에 있기를 다 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뜨겁게 섬기고 있습니다. 한데 문제는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이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를 실망케 하는 일들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고 하는 것이요 우리가 믿음만을 이야기하기에는 세상 일이 너무도 힘이 들고 또 복잡하고 일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마음과는 달리 한 시간 성도로 끝나는 경우도 생기게 되고 마음으로는 다 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를 않아서 결국 나는 안 되는가 보다고 하면서 스스로 포기를 하게 되는 경우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고 하셨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가 연초 하나님 앞에 올해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약속하고서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결국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듯 우리는 영의 사람이지만 육신에 매여 살 수밖에 없는 슬픈 인생들입니다. 그리고 그 육신에 대한 염려 때문에 우리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에 옮기지를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육신을 핑계로 삼아 스스로 포기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지금의 마음은 조금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자기가 말한 대로입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기도 하거니와 또 그만큼 자신만만했습니다. 
자신만만한 모습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을 하든 당당하게 해나가야 합니다. 베드로 그는 지나칠 정도로 당당했습니다. 무엇이든 참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속에만 담고 살지를 못하는 성격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 하던 베드로는 성격적으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다른 제자들 보다 앞서서 말을 꺼냈던 것이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어떤 길로 가시든 그 길 자기가 못갈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설사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 해도 저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설사 주를 위해서 죽으라 한다면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베드로의 이 마음, 이 당당함이야말로 오늘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것은 아닙니까? 

왜 우리가 앞뒤를 재고 따지고 멈칫 거리고 그럽니까? 그것 역시 우리의 성격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 나쁘다고만 하지 마세요. 그래서 문제라는 생각도 버리십시오. 당당한 사람도 있고 매사에 주춤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들의 자세입니다. 베드로의 당당함이야말로 우리들이 본 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주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당당하게 고백하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의 마음처럼 그리고 우리의 고백처럼 당당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주님의 답변입니다.
한 가난한 소년이 있었어요. 그는 학교에 갈 만큼 넉넉하지도 못했고 어느 공장에 들어가 일할 만한 기술도 없었죠. 그러다가 하루는 사진술을 배워 사진 기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진술을 엮어 놓은 책을 주문했죠. 아 그런데 서점의 착오로 사진술에 대한 책이 온 것이 아니라 엉뚱하게 발성법에 대한 책이 온 겁니다. 소년은 너무 가난하여 그 책을 돌려 보낼만한 우송료도 없었고 거기에 더하여 어떻게 반송해야 하는지도 몰랐어요. 

그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그때 소년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는 사진작가가 되기를 원해서 사진술을 엮어 놓은 책을 주문했는데 엉뚱하게도 발성법에 대한 책이 왔네요. 그렇다고 실망만 하고 있을 순 없어서 하나님께 맡깁니다. 여기에는 무언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으니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리고는 발성법에 대한 책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 소년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악가가 된 챠리 맥카시였죠. 

그러니까 불평과 실망에 사로잡히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베드로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하지만 주님은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지금은 아니라고 하는 그 말씀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당장 오늘 밤 새벽이 되기 전 그러니까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그 말씀이야 말로 정말 베드로가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무리 주님의 말씀이지만 그건 지나친 말씀이 아닙니까? 주님이시라면 베드로의 이런 당당한 고백에 그래 고맙다 네 말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하셔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주님은 현실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고 하신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제자들과 함께 나가셔서 습관을 따라 기도하시고자 할 때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몇 걸음 더 나가시면서 간절히 부탁을 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괴롭다 그러니 나를 위해 깨어 있어 기도해 다고.” 하지만 제자들은 기도는커녕 끄떡끄떡 졸다가 잠에 빠지고 맙니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한 시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고 주님이 탄식하시지만 그들은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론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시지만 여전히 제자들에게는 그건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건 있을 수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혼자서만 심각한 거예요. 제자들 가운데 누구도 답답한 사람이 없습니다. 내일이면 예수님이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제 당장 죽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래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고 하시는 것은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네가 나를 위해서 기꺼이 죽게 될 거다 하시지만 베드로는 당장 주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으니 내가 따라가지 못한 곳이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를 했던 것이요 그건 솔직한 베드로의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기는커녕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당장 오늘 새벽이 오기 전에 그렇게 되리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 네가 말하는 것이 틀렸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보다는 현실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는커녕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게 될 거다.”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정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베드로의 마음을 몰라서도 아니고 베드로가 그렇게 할 만한 위인도 못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 가운데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면 공부 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들 공부 잘 하고 싶고 시험도 잘 보고 싶고 그래서 좋은 대학 들어가고 싶지 이왕이면 서울에 있는 대학 소위 서울 대학에 가고 싶지 저 지방 대학에 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왜 그래요? 우리 마음과 현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는 내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나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한두 가지 잘 안 되는 것들이 내 발목을 잡습니다. 그러다보면 스스로 포기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해 내고 말 거야 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아무래도 나는 안 되는 가봐 그러면서 포기하더란 말입니다. 나는 원래 그래. 그런 말들도 합니다. 그래요 나는 원래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내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어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게 될 거라고 하시는 것은 너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는 결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당당하게 말할 뿐 자기가 그렇게 시험에 들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상과 현실이라는 이 두 가지를 저는 혼돈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가 있습니까?

그건 요셉에게서도 보듯이 오래 참아야 합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선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들 앞에 펼쳐 놓으시는 모든 현실은 그냥 지나쳐 가는 시간들이 아닙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 우리들이 준비하도록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왜 안 됩니까?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안 돼, 나는 못해. 어차피 나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거야.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까?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 안에 계신 것이 맞습니까?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금 내 안에 계시고 그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우리가 못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힘을 주시고 그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대로 채워주시고 붙들어주시고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한데 사실은 우리들 스스로가 우리들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는 나는 가진 것이 너무 없어. 나는 이래서 안 되고 나는 그러기에는 너무 피곤하고 아마 그러다가는 쓰러지고 말 걸. 나는 그것까지 하기에는 내가 감당할 힘이 없고 나는 지혜도 부족하고 지금 먹고 살기에도 너무 힘이 들어. 하물며 어떻게 그것까지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게 뭐에요? 결국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새 힘주시면 되고 하나님이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면 되고 하나님이 지혜주시면 되고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나로 하여금 강하게 풍족하게 만들어 가시면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대접했던 사르밧 과부는 당장 먹을 것도 모자랐지만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놀랍게도 자기도 살고 엘리야도 섬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나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왜 믿음이 없습니까? 내 힘만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누구는 할 수 있습니까? 보세요. 야고보서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지혜가 부족하냐 그렇다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그런데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십시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 보셨나요? 나는 너무 피곤해서 안 된다고 하시죠? 잠자기도 부족하다. 또는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피곤하고 아프다. 그래서 날밤을 새운다. 거의 잠도 자지 못했다. 내 입장이 되어 보세요. 

다 맞는 말입니다. 한데 그러면 하나님께 새 힘을 주시도록 구해 보셨나요? 아니면 그렇게 서로를 위해 중보하며 축복해 보셨나요? 보세요. 야베스는 이름처럼이나 고통 속에 살아가던 아이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족보 이야기만 쭉 나오는데 거기 야베스에 대한 이 이야기를 살짝 집어넣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오늘 우리들의 삶도 야베스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구하는 믿음입니다. 지혜도 구하면 주신다고 했습니다.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여 주시고 그 지역을 넓혀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들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막 11:24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되고 싶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 내가 그렇게 누리고 싶다고 말만하지 말고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포기하고 나는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 입장이 돼 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나를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힘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누구는 나보다 나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들을 할 것입니다. 나름대로 타당성 있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다 틀린 말입니다. 실제로 그 입장이 되어보면 그 사람도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고 사정이 다 있습니다. 그에게도 힘든 구석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입니다. 우리 생각입니다. 우리 믿음이란 말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말이 있죠. 그런데 과연 우리는 할 수 있다, 나도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물론 그런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쉽게 포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역시 나는 안 되는 가봐. 그리고는 기도하기를 포기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지만 성전에 나오지 못하면 성전을 향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도 다 들어주신다고 주님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핑계만 대고 있습니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 결국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가 육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사람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사람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만큼 현실적입니다. 현실은 있는 그대로입니다. 있는 그대로 말하고 보고 하는 것만큼 정확한 것도 없습니다. 없는 것을 없다고 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이 보는 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러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 현실을 극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민수기에 나오는 제사장의 축복에서도 뭐라고 그랬습니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제사장 된 너희는 이렇게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축복한 대로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나님이 약속하셨단 말씀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믿음입니다. 이걸 주문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다고 뭐가 되겠느냐고 하지 마세요. 솔로몬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더니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왕 같은 제사장 된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지혜를 구해야 하지 않겠고 자녀를 마음껏 축복해야 되지 않겠으며 가족 뿐 아니라 이웃들을 이렇게 축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데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그런다고 될까? 아니 그런다고 될까라니 그게 누구 말입니까? 하나님은 된다고 했는데 그런다고 될까라니요? 결국 그건 내 생각이 아니라 내가 사실은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 현실을 생각해 보라고 네 입장을 생각해 보라고. 그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인데 왜 기도가 안 되고 왜 기도를 못할까요? 그게 바로 육신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그랬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힘으로는 안 되지만 성령이 내 안에 힘을 주시고 나를 강건하게 하시고 주님이 나로 능하게 하시면 우리는 주 안에서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힘들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을 붙들고 때를 기다리십시오. 보세요. 

요셉도 결국은 길이 참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그 꿈을 붙들고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더니 드디어 기회가 오지 않았습니까? 그는 단순히 꿈만 해몽하지 않았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바로 앞에서 말했습니다. 칠년 풍년이 지나고 더 혹심한 칠년 흉년이 올 것인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그 때를 대비해야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때를 대비하는 것이냐 하면 풍년의 때에 소출의 오분의 일을 거두어 지역마다 창고를 지어 창고에 아 흉년의 때를 대비하게 되면 나중 아무리 흉년이 심해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지혜로운 사람을 세워 이 일을 차질 없이 진행하도록 하면 하나님이 알려주신 대로 7년 풍년이 지나고 나중 다시 7년 더 심한 가뭄이 와도 능히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왕에게 이야기했단 말입니다. 왕이 그런 지혜까지 구한 것이 아니에요. 그건 요셉이 그 기회를 잡아 왕에게 그런 말을 드린 것이란 말입니다. 그랬더니 요셉의 그 말이 왕에게도 모든 신하에게도 맞다 맞아 그렇겠네 하는 마음이 들게 되었다는 것이죠. 결국 왕이 뭐라고 합니까? 그렇다면 이런 지혜를 말한 네가 그렇게 하면 되겠네 해서 그에게 총리의 자리를 선뜻 내 주지 않습니까? 어떻게 요셉이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그는 단지 때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 때를 위한 준비를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서 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게 뭐에요? 그 첫째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꿈의 사람이었다는 말은 단지 꿈만 꾸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결코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잠시 그도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도 있었지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말씀도 바로 그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그렇다면 왜 시험에 드느냐 하면 그 시험이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 입장입니다. 내 입장이 돼 보라고 합니다. 맞는다고요 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이 뭡니까? 현실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어떻게 현실을 뛰어넘어요? 안 되는 걸 어떻게 되게 만들 수 있어요. 그건 입장을 바꾸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괴로워만 하지 말고 그걸 하나님께 기도할 기회로 잡으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어 주십시오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힘주시면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힘들거든요. 그래서 포기해요. 역시 힘 드는구나. 역시 안 되겠네, 하지만 보세요. 싹이 나올 때도 단지 껍질만 깨면 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딱딱한 땅도 뚫어야 돼요. 그런데 돌처럼 딱딱하면 어떻게 뚫습니까? 그래서 농부가 흙을 부드럽게 갈아엎어주는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들의 길을 이렇게 열어주십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 알 내 씨를 감싸고 있는 그 딱딱한 껍질을 깨야 됩니다. 나만의 생각 내 생각이라고 하는 껍질 내 현실이라고 하는 껍질을 깨시란 말입니다. 결국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나는 그 아픔을 딛고 앞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나를 손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래서 나는 여전히 못한다고 합니다. 보세요.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왜요? 매여 있단 말입니다. 빚에 매여 있고 아픔에 매여 있고 일에 매여 있고 가족에게 매여 있습니다. 그거 풀어 놓으세요. 누구 때문에 안 되고 무엇 때문에 안 되고 못한다고 하지 마시고 믿음으로 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역시 힘들어 하지 마시고 그렇기 때문에 더 한다고 아니 더 해야 된다고 하십시오. 아니 어차피 잠을 못자는 거라면 그 시간 왜 힘들어 합니까? 그 시간을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으로 삼으세요. 어차피 가진 것이 없어서 살기 힘들다면 차라리 그걸 가지고 더 줄여서 엘리야를 공궤하듯 하나님께 드려보세요. 그리고 떠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세요. 왜 힘든 짐을 내가 지고 끙끙거립니까? 왜 혼자서만 큰소리치다가 넘어집니까? 안 되는 것은 안 되니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주님이 해 주시도록 구하란 말입니다. 아이는 자기가 하다가 안 되면 자기가 못하면 엄마한테 징징거리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엄마가 해 주거나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 않나요? 나는 그렇게 하면서 왜 아버지 되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안 하는 겁니까? 

결국 뭐에요? 내가 하지 않았고 내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고 내가 그렇게 못한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슬픈 자화상은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나는 아예 하려고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없긴 왜 없어요? 안 되긴 왜 안 돼요? 안 하니까 안 되는 거고 믿지 못하니까 안 하는 거죠? 결국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왜 믿지 못합니까? 육신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누가 성령의 사람입니까? 말씀의 사람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현실을 앞에 두고 코치를 하고 계시잖아요. 그러면 코치가 가르치는 대로 따라하면 됩니다. 포기하지 않으면 돼요. 믿음은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신다. 그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신다. 이런 믿음의 사람 이런 고백의 사람 그래서 날마다 이기고 또 이기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떡잎을 보면 그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그 떡잎이란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더 이상 육신이나 환경 내가 가진 것 내 입장 핑계만 대지 마십시다. 이제는 일어나 가십시다. 돌이 많으면 치우면 되잖아요. 나 혼자서 안 된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구하세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세요. 우리가 뭐를 할 때 혼자서 못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잖아요? 마찬가지입니다. 그 도움을 하나님께 청하란 말입니다. 그게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는 슬픈 현실이 아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신 약속대로 이룸 받는 기도의 사람 응답의 사람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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