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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 (요 19: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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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못 박은 사람들 (요 19:23-24)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요 19:22-23) 

사형을 집행한 로마 군병들

예수님을 처형한 자들은 로마 군병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침 뱉고 얼굴을 때리고 조롱한바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19:23) 당시에는 사형 집행인들이 사형수의 유품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유품이래야 별것이 없습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의복이 전부입니다. 군병들은 네 명이 한 조가 되어 있었으므로 우선 겉옷을 네 몫으로 나누었습니다. 옷을 네 조각으로 찢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겉에 걸쳤던 물건들, 예를 들면 겉옷, 허리띠, 머리 수건, 신발 따위의 물건들을 네 몫으로 나누었다는 말입니다. 별것 아닌 물건들이지만 그들은 보다 나은 몫을 차지하기 위해 도박하는 심정으로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속옷이 남으니까 다시 제비를 뽑았습니다. 속옷은 호지 않고 통으로 짠 것이기 때문에 가장 나은 물건이었고, 그것을 얻는 자는 횡재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난닝구 하나 얻었다고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군병들의 소행을 보면서 무정하고 무심한 인간의 모습을 봅니다. 산 사람을 매달아 놓고 곁에서 태연히 도박을 합니다. 매달린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들려와도 무감각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면서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저가 왜 죽임을 당할까? 일말의 관심이나 동정심도 없습니다. 동정심은커녕 오히려 파리 목숨을 죽이듯이 덤덤하게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와 다른 별다른 인간들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과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왜 타인의 삶에 무감각해질까? 이 세상 삶이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이 세상 삶은 전투적입니다.  타인을 이겨야 하고, 제압해야 하는 삶의 구조 속에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군병들은 전 세계를 정복했던 사람들입니다. 무수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사람 죽이는 일에 무감각해졌습니다. 월남전에서 한 미군 장교가 양민 학살 죄로 기소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양민을 학살하려고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전우들이 하나 둘 베트콩에게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낮에는 아군이요 밤에는 적이 되는 베트콩들, 난 데 없이 나타나 사람을 죽이고 달아나는 베트콩들을 증오합니다. 사랑하는 전우들이 무참하게 죽는 것을 보다 못해 복수심이 발동합니다. 월남인이면 무조건 증오하고, 마침내는 한 마을 전체를 다 죽여버렸습니다. 이 세상은 삶의 전쟁터입니다. 경제 전쟁, 지식과 정보의 전쟁, 권력의 전쟁. 한 쪽에서 빼앗아 가면 한 쪽에서는 빼앗깁니다. 

보편적인 전쟁 원리가 그렇습니다. 이기는 자가 있으면 패한 자가 있습니다. 내가 모으면 누군가는 잃어버립니다.  물론 돈 버는 것이 국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닙니다.  합법적인 게임입니다. 이 세상에는 경쟁시험도 많습니다. 합격자가 있으면 낙방자들은 더 많습니다.  선거라는 것이 뭡니까? 결국은 남을 밀어내고 내가 권좌를 차지하겠다는 합법적인 전쟁입니다.

모든 전쟁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상대를 제압해야만 내가 이긴다는 점입니다. 비록 상대를 죽이지는 않는다 해도 어떤 식으로든지 상대를 누르거나 빼앗거나 밀어 내야합니다. 그래서 전쟁터에 사는 사람들은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삶의 전쟁터에서 우리는 타인의 생사에 무감각해집니다. 오늘 로마 군병들의 모습에서 인간 영혼에 무감각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무지의 비극

그러나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무감각이나 잔인성이 아닙니다. 로마 군병들이 누구를 죽였는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죄 없고 거룩한 분을 죽였습니다. 평생 선한 일만 하신분, 병든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신 분을 죽였습니다.  남이 만지지 않는 나병 환자, 중풍병자, 귀신들린 사람, 혈루병자, 앞 못 보는 사람들을 다 고쳐주신 분, 배고픈 사람들 불쌍히 여기셔서 양식을 마련해 주신 분을 죽였습니다.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오직 모든 것을 나눠주신 예수님, 마지막에는 가장 소중한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아래서 그 분의 옷을 제비뽑았습니다.  이런 엄청난 잘못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로마 군병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빌라도 총독의 명령이 아니라 티베리우스 황제의 명령이라 해도 예수님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장 내 목이 날아가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의 머리터럭 하나 손대지 않았을 것입니다. 손대는 게 다 뭡니까? 오히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했을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들의 목자들처럼 예수님 앞에 엎드려 경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가 누군지 몰랐습니다. 메시아를 몰라보는 것이 이렇게 큰 불행입니다.  
  
일찍이 호세아 선지자는 자기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고 했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무지는 불행과 비극의 원천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식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자신을 무지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첫째로, 죽음에 대한 무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죽음의 끄나풀만 다가와도 두려워 떱니다. 병드는 게 두렵고, 사고 나는 게 두렵고, 강도 만나는 게 두렵고, 전쟁 나는 게 두렵습니다. 평생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다가 오면 가버립니다. 그 누구도 죽음에 대한 대비책이 없습니다. 죽음에 대한 대비책이 있다면, 기껏 해야 생명 보험이나 들어 놓고 무덤 자리나 마련해 두는 정도뿐입니다. 그런데도 왜 죽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은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둘째로, 인간이 뭔지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인간을 연구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철학이 별견한 유일한 진리는 사람이 뭔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생물학자들은 미생물에서 인간의 기원을 찾으려고 합니다. 의학자들은 뇌의 기능에서 인간의 정신을 찾으려고 합니다. 우주 과학자들은 외계에서 인간의 기원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假定(가정) 일'뿐입니다. 인간이 어디서 왔으며, 왜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여러분!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아십니까?  부모가 누구라는 사실과 본적지가 어디라는 사실 외에 별로 아는 것이 없어요. 요즘은 그것도 별로 신뢰할 수 없습니다. 내 영혼이 어떻게 돼 있는지, 영혼이란 게 도대체 어디 있는지, 어디서 사는지, 어떻게 될 것인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는 종교성이 있습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신을 찾는 작업은 계속돼 왔습니다. 인류의 선조들은 신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도 열심히 섬겼습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신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습니다. 소위 말하는 지성인들은 인간을 신에게서 독립시킨 것을 최대 성과로 여깁니다. 지성으로 신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신은 사색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신을 연구하는 것을 신학이라고 합니다. 어떤 신학 책을 보니 어려워서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자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그들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에게 물었더니 나도 잘 모르겠다고 했답니다.  하나님은 연구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이 이성의 한계입니다.  
  
넷째로, 이 모든 무지 가운데 가장 큰 무지는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를 알지 못하는 무지입니다. 죽음이 뭔지 몰라도 좋습니다. 인생이 뭔지 몰라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몰라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를 모르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알려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주님을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도 알게 됩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질문의 해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모르는 것은 가장 큰 비극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9-11) 

오늘 우리에게 최대의 비극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다 몰라도 좋으니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알고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만사는 해결입니다.  


군병들이 예수께 얻은 것

로마 군병들은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었습니다. 낡은 옷입니다. 검소하신 주님이 좋은 옷을 가졌을 리 만무합니다. 싸구려 낡은 옷 한 벌! 군병들은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예수님께 옷 한 조각만 얻어도 다행으로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십니까?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의복 한 벌입니까? 집 한 채입니까? 배부른 양식입니까? 좌의정 우의정 자리입니까? 예수님이 여러분께 주실 수 있는 것이 그것이 전부입니까?  
  
똑 같은 자리에서 엄청난 축복을 받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 곁에서 함께 매달렸던 강도입니다. 그는 평생 강도질만 하다가 붙잡혀 사형당하는 신세였습니다. 그는 자기 곁에서 죽으시는 예수님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생전에 무엇을 하셨는지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평생 사람을 죽이고 남의 재산 강탈하는 짓만 했는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먹여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쳐주는데 보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이 왜 죽으시는지를 알았습니다. 자기는 자기 죄로 죽지만 예수님은 절대로 자기 죄 때문에 죽으시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를 조롱하는 동료를 책망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로 죽어 마땅하지만 이 분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눅23:41) 그는 예수님의 죽음에서 거룩한 왕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왕권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겼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 

당장 살려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장차 주님의 나라가 분명히 임하실 터인데 그 때에 자기를 부탁한다는 말입니다. 내세의 소망과 주님의 구원을 함께 믿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그는 영생 약속을 받았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군병들은 낡은 옷 쪼가리를 받았고, 한 강도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십자가가 왜 서 있습니까? 영생을 주시려고 세운 십자가입니다. 그 아래서 영생을 얻어야지 왜 낡은 옷 쪼가리를 얻습니까?
  
사마리아 수가성을 지나시던 주님은 우물 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물 한 모금을 얻어 잡수신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4:10) 

여인은 예수를 야곱같이 우물 파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으로 알았어요.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집 마당에 우물이나 파 주셔서 이렇게 멀리까지 물 길러 나오지 않게 해 주세요! 이 여자는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여러 차례 결혼에 실패하고, 사람들에게는 천한 여자로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우물물보다도 영혼을 채우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주님은 그 여인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영생이 없으면 제아무리 훌륭한 남편이 있어도 목마름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영생이 없으면 재산이 있어도 목마릅니다. 영생이 없는 사람은 천하의 권력을 가져도 여전히 만족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주님은 이 여자의 영혼에 영생을 채워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물동이를 놔두고 동네로 달려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 내 인생을 다 아는 사람을 내가 만났다! 그는 인생의 해답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말을 듣고 예수를 청하고 믿었습니다.  
  
공생애 중반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적을 보려고 왔다가,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베드로는 다시 대답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있는 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의 심판과 죽음의 자리에서 속죄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삭개오는 아끼던 재산을 구제에 사용하고 주님을 집에 영접해 들였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마태는 세관의 자리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며, 영생을 얻기 위해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많은 제자들이 배와 그물과 집을 떠나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주님에게 영생을 얻어야합니다.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영생은 무덤 자리보다 중요하고, 생명보험 보다 중요합니다. 영생은 집보다 중요하고, 출세보다 중요하고, 의복보다 중요합니다.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먼저 해야 될 것이 있고 나중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많은 분들이 영생 문제를 뒤로 미루고 다른 일에 매달립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당장 목숨을 거두어 가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예수님께 영생을 얻으세요. 골고다 언덕에 십자가가 서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목적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낡은 겉옷이나 나누고 앉아 있는 군병들은 얼마나 한심합니까? 그들은 바로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한 편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강도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를 지나친 사람들

안타까운 일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바로 곁에 두고 지나쳐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베들레헴의 여관 주인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마구간을 내어 줬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해서 무시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무수히 많은 이적들과 교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 하였으리라....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마11:21-24)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가까이서 만났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사두개인들과 제사장들, 그들은 예수님과 대면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 헤롯, 가야바, 안나스, 공회원들. 예수를 직접 대면하고 대화를 나눈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영접치 않았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면서 대면한 구경꾼들, 그리고 사형장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를 대면했던 군병들과 강도들. 다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오직 한명의 강도만이 예수를 영접하고 영생에 들어갔습니다.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엉뚱한 데 관심 팔려서 구원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요즘 사람들 관심 있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주식 투자 하는 사람들은 주식 동향에 끼니를 거릅니다. 연예인 좋아하는 사람들은 연예인들 일정표 보면서 따라다닙니다. 운동선수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응원합니다. 

유명 인사에 관심 많은 사람들은 명망가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둡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죄의 문제, 영혼 문제, 영생 문제, 구원이나 내세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당연히 예수님께 관심이 없습니다.  두루미에게 천국 얘기 했더니, 반문했다고 합니다.  “천국에도 우렁이가 많으냐?”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1-3) 

예수님은 관심 끌기에는 너무 초라해 보입니다. 너무나 천해보이는 탄생의 현장, 가난한 목수 집안과 유년 시절, 머리 둘 곳 없이 청빈하게 사신 공생애 기간, 그리고 로마 군병들에게 조롱당하시던 모습, 빌라도의 심판 앞에 무기력하게 못 박히신 모습. 이 모든 것들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는 것들입니다. 관심이 딴 곳에 가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곁이 있어도 믿을 기회를 놓칩니다.  
  
예수님은 관심을 끌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셨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이 갑자기 내려 와서 로마 군병들에게 명령했다면? 예수님이 자기를 체포하러 왔던 로마 군병들을 진멸하고 빌라도 총독 관저에 나타났다면? 예수님이 호화로운 옷을 입고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등장하셨더라면? 로마 군병들이나, 유대인들이나,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다 혼비백산하여 엎드렸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더라면 인간들의 죄는 영원히 씻겨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죽음을 당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낮아지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속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진리를 사람들이 몰라요.  너무 무관심해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18,22-24) 
  
십자가가 우리 가까이 서 있습니다. 십자 위의 주님은 끝까지 내려오시지 않고 그 위에 계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마다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구원의 기회, 주님을 영접할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주님의 십자가 아래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이 입었던 옷가지 밖에는 얻지 못했습니다.  

우편의 강도는 임종의 순간, 천재일우의 기회에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어 영생을 얻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오늘 내 앞에 있습니다. 기회는 오늘 뿐입니다. 그 십자가의 주님을 무심히 지나치지 마세요. 주님을 중심에 구주로 모시고, 영생 얻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영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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