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주의 궁전에 거하는 자의 복 (시 84:1-4)

첨부 1


주의 궁전에 거하는 자의 복 (시 84:1-4)


이어령 씨가 그의 저서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왜 교회에 가는가라고 비난조로 묻는 사람들이 있지요. “당신은 지성인인데 집에서 찬송가 부르고 성서 읽고 기도하면서 책 읽으면 되지 무엇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서 예수 믿는 티를 내느냐?”는 겁니다.
그럴 때 제가 하는 말이 있죠.
“배가 고프면 어디에 가지?” “식당에.”
“뭔가 알고 싶을 때는?” “도서관 가면 되지.”
“심심하면?” “극장가서 영화 보면 돼.”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지.”
“그럼 먹어도 배고프고 마셔도 갈증 나고 놀아도 심심하고 배워도 답답하면 어디를 가나.” “그건 뭔데?”
“배고픈 것처럼, 갈증나는 것처럼, 영혼이 굶주려 있을 때.” 그러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 때 가는 곳이 교회란 말이야.”

그러면 또 교회에 대한 욕을 합니다. 싸우고 소송하고 사교 같은 이상한 짓을 한다는 교회를 들어 그런데 왜 가느냐고 합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식당이라고 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던가. 병원 간다고 다 의사가 명의라 병이 낫던가. 극장가면 재미있는 명화만 트는가. 그래도 배고프면 식당을 찾아가듯이 모든 교회가 다 탈속하고 영적인 것은 아니지만 역시 영혼이 메마른 사람이 찾아갈 곳은 교회가 아닌가. 부패한 교회가 있다고 해서 교회를 가지 말라는 것은 병원 의사가 오진하여 죽었으니 앞으로 병이 나도 병원 가지 말라는 말과 같은 거지.”

그리고 시편 42:1을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사슴이 목마를 때 골짜기에서 간절히 물을 찾듯이 우리는 영혼의 목마름을 적시기 위해서 주님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유일한 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영혼의 만족을 줄 수는 없습니다. 육신은 먹고 마시고 쉬고 즐기면 만족합니다. 혼은 지식을 탐구하고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면 만족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영은 신을 만나는 기능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 무엇으로도 만족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말하기를“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으로만 채울 수 있는 별도의 공간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는 물이 있어야 만족합니다. 목이 말라 입안이 타들어가는 사람에게 진수성찬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배고파 허기진 사람에게 밥이 아닌 물을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추위에 벌벌 떨고 있는 사람에게 밥이나 물을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사회는 먹을 음식, 마실 물, 입을 옷은 넉넉합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영적 해갈입니다. 이 영적 해갈의 방법을 제시한 것이 본문입니다. 

시편 84편은 온 정성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신실한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을 한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성전을 그리워하던 순례자가 드디어 하나님의 집에 도착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면서 부른 노래가 본문입니다. 성경에는 고라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라자손이란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레위지파의 후손을 가리킵니다.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수종드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신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본문을 고라자손이 지은 것은 아니고 이 시편을 보관한 사람이 고라자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남달리 하나님의 전을 사랑한 다윗이거나 아니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어느 제사장이었을 것으로 추측을 합니다. 

본문 1~2에“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순례자는 성전이 마치 자신의 애인라도 되는 것처럼 너무도 사랑스럽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상사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그 사랑 때문에 쇠약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의 소중함을 깨달은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성전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상의 축복으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본문의 저가가 깨달은 성전의 소중함을 우리도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주의 궁전에 거하는 자의 축복”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본문 2절에“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저자인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는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성전에서 마음껏 부르짖고 기도했습니다. 

본문의 저자만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떤 기도의 제목이든지 주의 성전에서 부르짖고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큰 축복입니다.마가복음 11:17 말씀에“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하셨습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1:22에 말씀하시기를“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성전을 건축하고 봉헌 기도를 마쳤을 때에 하나님께서 열왕기상 9:3에서 말씀하기를“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에 편만하십니다.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의 눈길과 하나님의 마음이 항상 거하시는 곳이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디에서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서의 기도는 다른 곳에서의 기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9:12 말씀에“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건물들이 있습니다. 건물마다 쓰이는 용도가 다 다릅니다. 각각 용도에 맞게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잠실에 올림픽 주경기장이 있습니다. 거기에서도 축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월드컵을 위해 상암 경기장에 축구 전용 경기장을 또 만들었습니다. 어느 분에게, 올림픽 주경기장이 있는데 거기서 하면 되지 왜 또 많은 돈을 들여 상암 경기장을 만들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 사람의 대답이“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은 축구 전용 경기장이 아니라서 그렇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 축구 전용경기장이 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축구 전용경기장은 축구하기에 가장 이상적으로 설계가 된 경기장이기 때문입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어디에서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 가장 이상적인 공간으로 만든 건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예술의 전당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기도하기에 적절한 처소가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듣기에 적절한 구조로 지어졌고 환경을 꾸몄습니다. 성전은 예배와 기도를 위한 구조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히 임재하신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1:17에“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기도하면 기도의 집중이 잘되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36~38에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안나라는 여선지자가 특별히 아기 예수를 만난 사실을 기록했습니다.“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이 성전에서 우리의 소원을 내어 놓고 부르짖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요즘처럼 층간 소음으로 살인까지 일어나는 아파트에서 내 집이라고 목청을 높여 부르짖어 기도하겠습니까?“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마가복음 11:17)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집에서 부르짖어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4:6~7에 약속하시기를“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하셨습니다. 

둘째, 안식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에“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 시편기자는 예루살렘성전 어느 모퉁이에 참새와 제비가 둥지를 튼 것을 본 것 같습니다. 새들마저 둥지를 틀고 안식하는 곳이 성전이듯, 내 영혼의 보금자리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했습니다.“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개인 관계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만군의 여호와여”라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찮은 새들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안식을 얻는다면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이야 더할 나위가 없지 않느냐는 의미입니다. 

성도여러분,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어디에 참된 안식처가 있었던가요? 진정한 안식처는 오직 하나님의 품속뿐입니다. 젖 먹는 어린 아기에게 어머니의 품속 외에 참된 안식처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이처럼 나약한 인간이 쉴 곳은 하나님의 품인 성전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하셨습니다. 또한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하셨습니다. 

미술가이며 시인인 제임스 스메탄이라는 사람은 몹시 가난 하게 살았습니다. 그에게“당신은 왜 교회에 나갑니까? 하고 묻자“축복을 받으려고 나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무슨 축복입니까?”하고 묻자“분노와 경멸, 그리고 냉대를 갖게 하는 유혹이 사라지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하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만족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둡고 복잡한 생각으로 꽉 차서 교회에 가면 평안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오지요.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내가 구원받은 기쁨과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지요.”라고 말했습니다. 

프랑스의 영웅인 나폴레옹이 구라파의 모든 나라를 정복한 후 세계 정복을 꿈꾸다가 워터루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참패의 원인은, 전투 장비를 진지에 배치하고 승리의 꿈을 키우고 있던 중 갑자기 내린 비로 진지는 온통 진흙구덩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흙구덩이 안에서 전투 장비를 실은 마차가 꼼짝할 수 없는 사이에 적의 공격을 받아 그만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습니다.“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장담한 세계적인 영웅이었지만 잠시내린 비 앞에서 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그 후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한 기자가 그를 찾아와 물었습니다.“페하! 평생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그러자 나폴레옹은 조용히 눈을 감고 과거를 회상하는 듯 하다가 말하기를“전투가 치열하던 어느 날 아침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리던 때였노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쉼을 얻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새 힘을 얻습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사도행전 2:46에 기록하기를“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했습니다. 반면 세속에 물들어 안일을 추구하던 나태한 심령들에 대해 히브리서 10:25에 권면하시기를“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성령이 충만하면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지만 세속에 미혹된 나태한 심령 즉 성령과 멀어진 심령들은 성전에 모이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 몽골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용규 선교사가 쓴“내려놓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명예와 미래가 보장된 사람인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몽골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평신도 사역자입니다. 이분이 쓴“내려놓음”가운데 이러한 일화가 있습니다. 

“나는 유학 생활과 몽골 선교를 통해, 내려놓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것을 받는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체험했다. 2005년 봄, 몽골 이레교회에서 개척한 베르흐 지역의 예배 처소를 방문해서 예배드리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벌러르라는 자매가 예배 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다. 그녀는 몇 달 전 우리 팀의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다.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으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를 버려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하나님께 그녀가 소가 아닌 예배를 택한 그 믿음의 결단을 부끄럽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 자매가 소를 다시 찾을 수 있게 해달 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힘을 의지하다가 안 되면 자신의 실패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다가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기도했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를 먼저 찾아온 것이다. 소가 아닌 예배의 기쁨을 선택한 소녀는 예배와 소, 두 가지를 함께 얻었다. 먼저 믿은 우리 중에는 소 대신 예배를 택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묻고 싶다.” 

그래서 하나님은“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25)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의 은총을 내리시는 곳이 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사랑하시며 성전을 즐겨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 은혜를 내리시고자 기다리고 계십니다. 

셋째, 영적 생명력을 얻는 축복이 있습니다.
본문 4절 말씀에“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항상 주를 찬송한다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건강한 영혼을 의미합니다. 누구에게나 가정이나, 재산이나, 건강을 관리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 특히 힘든 것은 영적관리입니다. 누구든지 성전중심으로 살아가면 영적생명이 항상 활기차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적 삶에도 건강이 제일이듯, 영적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영혼건강이 제일입니다. 영혼이 건강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삼서 1:2에“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시편 50:14~15 말씀에“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찬양하는 사람에게 환난에서 건져주시는 기도의 응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찬양의 능력에 대하여 사도행전 16:24~26에 기록하기를“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는 곳에 얽매인 것이 벗어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J. C. Penney 에게 “백화점 왕”이라는 별명이 따라 다닙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심한 재정난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시간주‘베틀크릭’에 있는 격리병원에 수용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낙심하고 좌절한 그에게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는 무심코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한 건물 특별실에서 기도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라는 찬송을 절실한 마음으로 따라 부르던 페니의 마음이 갑자기 뜨거워지며 마음 깊은 곳에서 믿음의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소서." 페니는 순간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로 옮겨지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걱정 근심으로 마비된 심령이 주님 주시는 은혜로, 그를 얽어맸던 모든 무거운 짐들을 벗어 버리고 참된 평안과 해방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는 끝내 크게 성공하여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페니의 백화점은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하와이를 제외한 49개 주와 푸에르토리코에 1,067개의 백화점을 운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찬양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4절에“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에 거하는 것은 축복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집 성전에 거하는 것은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삶의 지혜입니다. 

부르짖고 기도하여 응답받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험한 세파에 지친 심령들이 안식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잘되므로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하는 곳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편 84:1~4)라는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신앙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