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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살 것인가(2) (눅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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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2) (눅 16:19-31)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우리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멀쩡히 살아가는 것 같지만 언제라도 누구라도 죽을 수 있습니다. 

한 환자가 병원에 갔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의사가 진료카드에 작은 글씨로 "소근암" 이라고 적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환자는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놀라며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어떤 병에 걸린거죠?" 의사가 대답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집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면 금방 회복하실 겁니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환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사실대로 얘기해주세요. '소근암'에 걸리면 얼마나 살수 있죠?"

잠깐 동안의 침묵 후에 드디어 의사가 대답했다.
"소근암은 제 이름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금기시 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외면한다고 외면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 안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필연적인 한 부분입니다.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늘을 사는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잠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전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이 사실은 인생을 가장 잘 사는 사람입니다.

옛날에 사냥꾼이 있었는데, 사냥꾼이 독수리를 잡으려고 화살을 겨누면서 독수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독수리는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독수리는 뱀을 잡으려고 노려보고 있었다. 사냥꾼이 뱀을 쳐다보았더니 뱀도 어딘가를 노려보았는데, 뱀은 꼼짝도 하지 않고 개구리를 노려보았다. 개구리도 마찬가지로 꿈쩍 않고 뭔가를 보고 있었는데, 개구리는 무당벌레를 잡으려고 노려보았다. 무당벌레도 꼼짝 않고 있었는데, 진딧물을 잡아먹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사냥꾼은 그 먹이사슬을 보다가 슬그머니 화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누가 나를 잡아먹으려고 노려보는 것은 아닐까?'
사냥꾼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입니다. 인간은 죽음에 의해 잡아먹힐 수밖에 없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대가로 인해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와같이 자신을 삼키려고 하는 죽음(사망)에 대해서 생각지 않고 살아갑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삶,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멀게만 여기다가 갑자기 맞이하여 당황하면서 후회 막심한 인생을 산다면 
어리석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이 세상 살 때 부귀영화를 듬뿍 누린 사람입니다. 
호의호식하고 날마다 잔치나 하고 희희낙락하며 살았습니다. 
반면 거지 나사로는 문자 그대로 상거지입니다. 음식 쓰레기나 주워먹고 질병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음과 더불어 완전히 입장이 역전됩니다.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을 보면 이 부자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을 생각해 볼 때 이 부자는 어떤 끔찍한 죄를 지은 일도 없습니다. 
꾸중을 들을만한 특별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외면적으로 볼 때 이 부자가 지옥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부자가 지옥간 이유는 "불 신앙"때문이었습니다. 

① 그는 사람이 죽은 후에 내세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②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불 신앙은 무서운 죄입니다. 
이 불 신앙이 이 부자를 꺼지지 않는 저 무서운 지옥에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나사로는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 실패한 인생입니다. 돈 한푼 없는 거지입니다. 
육신은 병들어 앓고있는 신세입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의 이름이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헬라 말로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다."는 뜻입니다. 
그는 불행했지만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자가 그토록 자랑하는 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우리 인생이 죽음이 끝이 아님을 교훈 합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생김새가 다릅니다. 성격도 다릅니다. 사는 방법도 가지가지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다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부자도 그랬습니다. 거지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죽음 뒤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문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이 됩니다. 
우리가 산대로 내세가 결정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 한결같이 다 울면서 태어납니다. 
비관론자들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어떻게 살라고 나를 이 세상에 보냈습니까?" 
낙관론자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세상이구나"하는 감격의 울음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탄성을 지릅니다. 
그리고 죽음의 문에 가서도 또 한번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① 놀라고 당황하는 탄성입니다. 
"내가 옛날에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듣긴 들었는데 
그것은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고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얘기인줄 알았는데 
정말로 있구나! 천국과 지옥이 정말 있었구나" 하는 탄식의 탄성입니다.

② 감격스럽고 기뻐서 지르는 탄성입니다. 
"황금과 보석으로 꾸민 집, 천군천사의 노랫소리, 생명나무의 실과들, 하나님 영광의 광채...그토록 바라고 소망했던 천국을 이제야 오게 되었구나! 야...내가 드디어 천국에 왔구나!"
앞의 탄성은 부자의 탄성입니다. 뒤의 탄성은 나사로의 탄성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내세를 결정하기 때문에 너무 중요합니다.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1] 살아 있는 동안 무엇보다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가진 소유나 즐기는 것들이 대단해 보입니다. 
그래서 가진 사람, 누리는 사람은 자랑하며 삽니다. 못 가지고 못 누리는 사람은 기죽어 삽니다. 그러나 막상 죽음이 닥쳐오면 소유나 즐기던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내세에서 천국과 지옥이 갈라지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값으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값을 대신 치뤘습니다. 
대신 심판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지옥 고통의 예고편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하나님은 믿음으로 영접하며 나오는 사람들에게 지옥의 형벌을 면제해 주셨습니다. 믿음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든지 믿음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이 피를 믿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나의 죄를 씻어주는 보혈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부자는 지옥에 가서도 간절한 소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첫 번째 소원 
(24절)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참으로 딱한 소원입니다. 세상에서 호화로이 연락하며 살던 사람입니다. 부족한 게 없이 
지내던 사람입니다. 좋은 음식이란 음식은 다 먹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손가락에 찍힌 물을 원하고 있습니다. 손가락에 찍은 물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만큼 목이 마르다는 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이 도저히 참을 수 없기에 물 한 
방울이라도 원합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② 지옥인의 두 번째 소원 
(27,28절)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이번에 부자는 영적인 소원을 말합니다. 
물 달라는 것은 육신적인 것이었다면 지금 구하는 것은 영적인 것이라 분명히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거절되었습니다. 

지옥에 가서 고통받는 이 부자는 그 누구도 이 곳에 오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면 더욱 더 자신이 지금 와 있는 지옥에는 안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지옥은 지옥에 간 사람만이 그 곳 사정을 압니다.
지옥에 간 사람은 누구나 후회합니다. 
아무리 사업이 바빠도 교회에 나갈 껄...그 때 어떤 성도가 전도할 때 교회에 갈 껄...건성으로 교회 다니는 게 아니라 제대로 믿을 껄...지옥에는 후회하며 껄껄하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곳입니다. 

이 세상 살 동안 할 일도 많고 바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형편과 사정이 있더라도 결코 핑계대지 말고 피하지 말고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하다 못해 턱걸이 구원이라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렸다가 죽음 직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에 간 강도처럼 이라도 구원은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바닷가로 낚시를 갔습니다. 그는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낚시대를 드리웠으나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딸을 바위 위에 앉혀 놓고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낚시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곳에서 고기가 잘 잡혔습니다. 
정신없이 고기를 낚으며 기뻐했습니다. 
어느새 해는 기울어 어두워지려고 합니다. 그때서야 딸 생각이 난 아버지는 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바위는 이미 물에 잠겨 버렸고 어린 딸은 바닷물에 쓸려 죽고 말았습니다.
딸은 바닷물이 불기 시작하자 큰소리로 아버지를 불렀지만 고기 잡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던 아버지는 딸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회는 이미 지나가고 버스는 떠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이 순간이 바로 믿음의 기회입니다. 지옥에 가서는 후회해도 눈물을 흘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의 순간은 항상 바로 지금입니다. 다음에는 기회가 없을지 모릅니다. 지금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고후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 당장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있는 동안에/ 내가 살아있는 동안/ 이 믿음을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금보다 더 귀한 것은 우리가 믿는 믿음입니다. 

[2]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하며 살아야 됩니다.

세월이 가도 죽음이 닥쳐와도 사랑의 추억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죽음이 닥쳐오면 아무 것도 영원한 추억으로 남기지 못합니다. 
부자는 사랑의 추억이 없습니다. 자기 혼자, 혹은 그런 부류들끼리 끼리 먹고 마시고 즐겼습니다. 대문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부자의 세상 법에 걸리지 않지만 하나님의 법에 걸린 죄 중의 하나는 바로 무관심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 죄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사라지지만 사랑만은 영원합니다.
 
고전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대구 참사의 경우도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교훈 해 줍니다. 
마지막 순간 그 지옥같은 죽음의 현장에서 엄청 많은 양의 휴대폰 통화가 있었습니다. 
무슨 내용으로 전화를 했을까요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하는 연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전화를 하며 마지막 음성을 남겼을 것입니다. 
"여보, 사랑해요. 애들 보고 싶어. 어머니, 불효자식을 용서해 주세요.  
“아이들을 부탁해요, 사랑해요.”

이 순간만은 그동안 세상에서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에서는 아무 관심도 언급도 없습니다. 통장 어디 있다, 누구한테 빚 얼마를 받으라, 회사 일이 어떻다 ... 이런 말은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우선순위를 뒤바꾸고 살아갑니다. 
덜 중요한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일에 쫓기고, 공부에 쫓기고, 세상 재미에 푹 빠지고, 그러다 보니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나중에 가서야 아쉬워하면서 후회하게 되는 겁니다. 
심지어는 별 것도 아닌데 사소한 오해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하기에도 짧은 인생입니다. 
우리는 항상 풀고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 날 톨스토이가 여행중 한 여인숙에 들러 하룻밤을 자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집을 나오려 할 때였습니다. 
병중에 있던 주인집 어린 딸이 톨스토이의 빨간 가방을 달라고 자기 어머니에게 조르며 울고 있었다. 
톨스토이는 여행중이고 가방 안에 짐이 있었기 때문에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가방을 비운 다음에 주리라고 마음을 먹으며 그 집을 나왔습니다.
며칠 후 다시 그 가방을 들고 여인숙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죽어 공동묘지에 
묻힌 뒤였습니다. 톨스토이는 그 아이의 무덤을 찾아가 가져온 가방을 무덤 앞에 놓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리고 그 비석에 <사랑은 연기하지 말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톨스토이의 아픈 마음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비문이다. 
사랑은 늦으면 아주 늦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기회 있을 때 사랑하십시오.󰡓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우리 주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언제 헤어진다 하더라도 사랑의 추억을 간직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조차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3] 살아 있는 동안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됩니다.
 
이 세상 떠나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일입니다. 바로 복음전파와 구제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의 믿음도 지금 당장 확인해야 되지만, 복음 전도도 지금 당장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죽음의 순간은 언제 닥쳐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27절~31절. 부자가 세상에 있는 형제 다섯이 생각났습니다. 
나사로를 시켜서 지옥의 고통에 대해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은 거절됩니다. 전도는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 힘써 해야 합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 

그리고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고 구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무관심도 죄악입니다. 
본문의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의 나사로에게도 무관심했습니다. 
가족도 사랑해야 하지만 이웃도 사랑해야 합니다. 내 가족만 알고 내 가족만 위하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한 장애인이 방화한 게 발단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백번 잘못했습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넓은 시각으로 보면 그 책임은 우리 사회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지경이 되기까지 무관심했던 사회의 냉대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옛날 미국 뉴욕에 유명한 판사가 있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 이야기 - 법원 - 즉결재판 담당 : 가게에서 도둑질하다 잡혀온 노인 ... 
- 기소 - 배가 고파 훔쳤다고 진술 ... - 10불 벌금형 선고 - 그리고 나서 지갑에서 10불 
꺼냈다. 
이 10불은 내가 냅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의 거리를 헤매고 다니는데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 먹은 죄에 대한 벌금입니다. 중절 모자를 돌림 ... 

이 재판정에 있는 분들 중에서도 나처럼 벌금을 내고 싶은 분 있다면 이 모자에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노인은 나올 때 손에 47불을 손에 넣고 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 부모된 우리에게 자녀를 향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학원보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듣는 자리에 가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감당하시며 눈물로 기도하는 교회 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승의 날 학교 선생님에게만 선물 주고 꽃 주는 일을 하는데 내 아이의 영혼을 위해 애쓰시는 교회 선생님들에게 꽃 한송이라도 선물하는 부모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스승의 날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듣느냐가 아주 중요합니다. 듣는 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본 아이들이 자라면서 [남에게 폐 끼치지 말아라]라는 말을 듣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공중도덕 지키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며 잘 지킵니다. 
미국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항상 남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입니다. 
확실히 미국 사람들은 어디 고아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당장 입양하고 남에게 나눠주는 일구제하는 일을 잘 합니다. 

우리 나라 아이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아는가?
[남에게 기죽지 말아라] 
이 말을 들으면서 자란 학생들은 스승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덤벼듭니다. 
부모에게도 덤벼듭니다. 성인이 되면 사장 앞에서도 큰소리를 칩니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면 나와서 일단 큰 소리부터 지릅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논리입니다. 
어디에서든 기죽지 않을려고 합니다. 해외에 나가면 상점에 진열되어 있는 것들 싹쓸이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남에게 기죽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그 음성에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를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중세 수도사들은 Mo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시오!)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굿모닝이 아니라 ...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 시켜주는 인사말입니다. 
기분나쁜 말이 아닙니다. 의미심장합니다. 
섹스피어는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느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이 인생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힘쓰며 살아갈 것인지 다시 한번 마음 속에 새겨보시기 바랍니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믿음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고 맡겨주신 귀한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순종해서 남은 생애가 지혜로운 인생, 승리하는 인생,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심인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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