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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떻게 살 것인가(1) (눅 16: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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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1) (눅 16:14-31)

광고는 사람들의 사회와 심리를 대변합니다. 광고는 유행어를 만듭니다. 
작년 유행했던 광고가 두 편 있습니다. 
하나는 부자되세요 하는 광고입니다. 또 하나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입니다.
이 두 가지 유행어로 보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부자도 될 수 없고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올해 우리의 주변을 강타하고 있는 말은 인생역전입니다. 
인생역전 한방이면 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도 인생을 역전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또 복권의 광고입니다. 
‘로또'라는 이태리 말은 행운 Lucky라는 뜻입니다. 한 번 행운을 잡자는 말입니다. 
복권이라는 말은 복을 주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이 종이 한 장에 자기 인생을 걸고 있습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종이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로또가 우리나라 전체를 흔드는 이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온 국민이 한탕주의에 빠져서 로또를 해서 팔자를 고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습니다. 직장인들만 아니라 학생, 주부, 농부, 어부까지 모두 여기에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외국 근로자들도 와서 로또에 돈을 걸고 있습니다. 

① 로또는 사람들에게 헛된 기대를 심어줍니다. 
20대의 남자들이 28.3%, 30대는 49.5%, 40대가 44.2%. 천 만 명이 넘는 인구가 로또에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선될 가능성은 없습니다. 수학적으로 제로입니다. 
그런데 사는 순간 자기가 일등할 줄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당첨금을 어디에 쓸까 잠을 못 이루며 고민을 한다고 합니다. 
이사는 어디로 갈까? 차는 무엇으로 바꿀까? 옷은 어디가서 살까? 이런 인원이 19%라고 ...
814만 분의 일의 확률은 매 주일 마다 복권을 사면 일등이 되려면 2억 년이 지나야 되는 
확률입니다. 
그래도 나는 틀림없이 될 거다 하며 싱글벙글 하며 밤을 새우고 다음주에는 되겠지 하며 
또 삽니다. 

② 내가 심지 않고 내가 노력하지 않고, 큰 엄청난 대박을 행운을 잡자 는 생각을 심어줌. 
기독교의 축복은 내가 심고, 내가 노력하고 내가 수고한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천국은 믿어야 갑니다. 기도는 해야 은혜를 받습니다. 
그냥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참고 오래 수고하고 땀흘려서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또에는 성실함이 없습니다. 수고하지 않고 쉽게 한번에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합. 
그러나 하나님은 부지런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요즘은 역술인들이 점쟁이들이 자기들에게 물어 보라고 많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게으른 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한탕주의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돈이 전부라고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돈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4-15장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신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그린 말씀들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은 하나님께 돌아온 영혼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15장이 존재(Being)의 문제라면, 16장은 크리스천의 삶의 자세를 문제 삼고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은 제자들이 경제 생활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경제원칙은 간단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너무나 분명하여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갈등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재물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고, 명예도 쫓고, 하나님도 섬기고, 
권력도 잡고 하나님도 섬기고, 나 좋은 것도 하고 주님 좋은 것도 하고, 동시에 세상과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세상 말로 양다리를 걸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끊임없이 갈등하며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 생활은 오히려 괴로움이 되고 있습니다. 계속 믿자니 고생이고 그만 두자니 이때까지 투자한 것이 아까운 것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갈등에서 해방되는 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 이것은 내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내 자아가 죽을 때 갈등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답을 알려줍니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우리가 세상과 가까워지면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삶을 살게 되면 세상과 멀어지게 됩니다. 
세상과 가까이 하면 일시적이고 자극적인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고 망하는 인생이 됩니다. 평생 갈등과 괴로움의 늪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세상 친구와 즐거움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친구와 즐거움을 잃는 대신 세상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기쁨이 내 속에서 솟아오르게 됩니다. 
바울은 이 신령한 기쁨을 맛본 후에는 전에 가지고 있던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더 좋은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을 버릴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물질이 우리 생활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 얻는 것은 큰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은 작은 것입니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서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결단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그 이유는 14절에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람들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를 동시에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는 다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높임을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는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으뜸이 되기를 원하거든 먼저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생명을 얻고자 하는 자는 먼저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비웃었습니다. 여기에는 나는 그런 바보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옳다고 하시는 것을 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재물은 헬라 말로 “맘몬”입니다. 재물의 신을 의미합니다. 맘몬이라는 신도 절대적인 순종과 사랑을 요구합니다. 재물의 경우 그것을 얻기 위해 인간의 모든 시간과 노력과 땀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의 신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비웃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대로 살기를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굉장히 사치를 일삼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날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자색 옷은 겉옷을 말하고 고운 베옷은 속옷입니다. 자색 옷은 당시 유대 나라에서는 가장 
비싼 옷입니다. 임금들이나 거기에 버금가는 부자들이나 입는 겉옷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부자는 자기가 마치 임금이나 된 것처럼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고운 베옷은 속옷입니다. 속옷조차도 애굽에서 수입해 온 재료로 만든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이 부자는 순전히 외제로만 감고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향락을 즐기기 위해서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사치스럽고 매우 화려하게 살았습니다. 
부자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고 자기가 가진 부를 드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떠한 법도 그를 체포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에 사는 나사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자도 처음에는 몇 번 대접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귀찮은 존재가 되고, 나중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최고급의 옷으로, 잔치로 모든 재산을 허비하면서도 자기 문간에 있는 거지 나사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거기다가 몸에 병까지 들어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집 안에서 자색 옷과 고운 채색 옷을 입은 사람들의 마음보다 개들의 마음이 더 친절했. 

부자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한 자존심과 자부심도 무척 강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사회에서 떵떵거리고 살았고, 그 주변에는 따르는 사람들이 달무리처럼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하나님을 생각할 틈도 없이 살았습니다. 가진 것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할 줄은 알아도 나눌 줄 몰랐습니다. 

나사로는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병치레하기에 정신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더럽고 추했습니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을 고통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창고지기일 뿐입니다. 
불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부자는 믿음의 부자입니다. 마음의 부자입니다. 
물질은 부자인데 마음은 인색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아닙니다. 
물질은 없어 가난하지만 마음이 부요한 사람이 부자입니다. 

바울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나중에는 가진 없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이제는 주님 한분만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자였습니다. 
고후 6:8-10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부요하고 그 속에 우리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가 부자요 성공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들에게 많은 물질의 복을 주시기 바랍니다. 
물질의 부자만 아니라 믿음의 부, 마음의 부도 함께 주시기를 바랍니다. 

① 오늘 본문은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가난한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자색 옷을 입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행하던 부자도 그 아까운 재산을 남겨둔 채 죽었습니다. 
둘 다 죽었습니다. 죽음은 연기할 수 없습니다. 
부자의 장례는 화려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가를 부르며 헌화했을 것입니다. 
엄청난 장례 비용이 들었을 것입니다. 
가난한 거지는 장례도 없었을 것입니다. 장사지냈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 이름없고 알려지지 않은 거지들이 길거리에서 죽으면 토펫이나 게헨나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쓰레기를 불태우는 곳에 내버려졌습니다. 
나사로의 장례는 쓸쓸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자도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에 관한 한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시편 90편을 기록한 시인은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하였습니다. 

살고 죽는 문제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일찍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래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장수가 복이라고는 하지만 오래 살면서 욕만 먹는 삶은 복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며 하루 하루를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② 본문은 죽은 다음에 내세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옵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음 이후를 말씀하십니다. 
◉ 그가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아브라함의 품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더 이상 아픔과 배고픔이 없는 평안과 안식의 장소입니다. 거지 나사로가 간 곳은 천국입니다. 

◉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부자는 나사로가 간 곳과 정반대의 장소로 갔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것은 부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자이면서 천국에 간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나사로가 천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라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었다고 하더라도 자기만을 위해 살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부자가 지옥 간 최종 원인은 불신입니다. 

23절에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주의 종을 통해서! 먼저 믿는 형제자매들을 통해서! 때로는 사건 사고를 통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가서 천국을 보며 후회를 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비명을 지르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외칩니다. 본문을 통해서 지옥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① 지옥은 무서운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불꽃 가운데서 사정없이 고통 받는 곳입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쵸프의 형제들"이라는 책에서 보면 이렇게 지옥을 설명. 
"만일 지옥에서 붙는 불이 물질에 붙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몸이 타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지옥의 불은 육체가 타는 곳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알지 못하는 불에 
타는 곳이라서 그것이 육신이 타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아픔과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지옥은 표현할 수 없고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② 지옥은 기도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물 한 방울의 자비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불신자에게도 비를 주시고 땅의 
열매를 주시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단절된 곳입니다. 

③ 지옥은 천국을 보면서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람에게 비교의 고통이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눈앞에 밝히 천국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④ 지옥은 무섭게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지옥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악들이 기억나게 되는 곳입니다.

⑤ 지옥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이라는 책을 보면 지옥 어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어떤 사람이 아인슈타인에게 6차원의 세계를 넘어 다른 세계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문제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믿느냐, 안 믿느냐는 문제입니다. 
천국과 지옥도 과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귀한 자녀들이기 때문에 
천국에서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경고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할지라도 두려운 마음으로 삼가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술쟁이라고 합니다. 고통스러운 지옥을 만들어 놓고 즐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옥은 마귀들을 위해서 예비된 곳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수 천년 동안 선지자를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계속 범죄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범죄하게 하는 한쪽 팔을 자르고 한 눈을 빼버리고 한 다리를 자르고 불구자가 
되어서라도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이상한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전화는 은행에서 걸려 온 전화였습니다. “당신 앞으로 어떤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1440만원을 예금해 놓았으니 이 돈을 찾아가 오늘 반드시 다 쓰십시오”
조건은 없습니다. 그러나 유익하게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리둥절하게 하루를 보내다가 1440만원을 써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에 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당신 앞으로 1440만원이 또 입금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예금된 돈은 쓰지 않았으므로 
그 주인이 도로 찾아갔습니다. 그 분이 말하기를 오늘 찾아가서 그 돈을 찾아 쓰면 당신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고 전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 날은 조금 미심쩍어 하면서도 이 사람은 은행에 가서 그 돈을 찾아다 썼습니다. 
“에이 기분이다”하면서 기분 좋게 써 버렸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또 찾아 썼습니다. 
이런 일이 매일 같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매일 매일 쓰면서 기분은 좋았지만 
이 사람의 마음 속에 자꾸만 불안이 생깁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것이 멈추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불안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루 24시간을 주셨습니다. 24시간을 분으로 계산하면 14,440분이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맘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그것을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24시간을 공평하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통장에 송금이 안됩니다. 통장에 하나님이 입금을 시키지 않는 날이 옵니다. 그 순간이 죽음의 순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가 있습니다. 
천사들에게 들리워 평안과 안식이 있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것인가? 장사되었다가 괴로워하며 고통중에 깨어날 것인가? 
이것은 오늘 우리의 삶이 어떤 삶이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심인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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