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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소서 아들입니다 (요 1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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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소서 아들입니다 (요 19:25-27)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19:25-27)

십자가 아래의 여인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십자가 위에 달릴 때, 오-오-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찬송가 147장에 있는 가사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찬송을 부를 적마다 상상해 봅니다.  그 때 내가 거기 있었더라면, 나는 과연 주님의 십자가까지 따를 용기가 있었을까?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순간에 사랑하는 제자들은 다 어디론가 숨었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던 베드로도 떠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던 도마도 사라졌습니다.  주님에게 고침 받았던 38년 된 병자도, 불구자들도, 그 많은 환자들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두려운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과 네 명의 여인들입니다.  특히 우리는 네 명의 여인들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큰 소리 치다가 도망갔던 제자들에 비하면, 그들은 용기 있는 여성들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  예수님의 이모로서 세배대의 아내이며 야고보와 요한의 모친인 살로메.(막15:40,마27:56)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글로바의 마리아”(Mariva hJ tou' Klwpa)란 뜻으로 글로바가 아비일수도 있고, 남편일수도 있고, 자매일수도 있습니다. 성인이므로 남편으로 봅니다.  그리고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  이들은 예수님이 죽으시는 십자가 현장에 서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위대했던 사람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입니다.  그는 엄청난 슬픔을 억제하면서 아들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살렘에 가면 예수님이 못 박혔다는 골고다 근처에 성묘 교회가 서 있습니다.  성묘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는 마리아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일찍이 예루살렘의 선지자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마리아에게 이런 예언을 한 바 있습니다.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2:35)  칼로 심장을 찌르는 느낌!  바로 그런 표현이 합당할겁니다.  남편 요셉을 먼저 사별했습니다.  아들 딸 중에도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예수였습니다.  효성이 지극하고 순종적이고 사랑이 풍성했던 그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억울하게 부당한 재판을 받고 채찍에 맞고 침 뱉음을 당하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십자가를 지고 기진맥진 죽음의 언덕을 올라가는 아들의 곁을 따라가고, 이제는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리아의 슬픔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한마디의 말이 없습니다.  아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외마디 소리를 치거나 기절하지 않았습니다.  왜 죄 없는 내 아들을 죽이느냐고 항변하고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슬픔을 새깁니다.  그리고 아들의 장엄한 죽음을 지켜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두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마디는 어머니에게, 그리고 또 한마디는 요한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말을 일부 성경에서는 의역을 했습니다.  “어머니 보십시요. 당신의 아들입니다.”(새번역)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공동번역)  “여자여” 하는 말을 “어머니”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결코 의역을 해서는 안 되는 부분입니다.  거기에 상당한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공생애 최초의 이적을 베풀었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은 포도주를 더 달라는 모친의 요청을 거절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Guvnai)”라는 칭호는 당시 용법으로서 귀부인에게 붙이던 경칭입니다.  

그러나 결코 어머니에게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러한 호칭은 헬라식도 아니고 히브리식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어머니”로 번역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에 대한 최초의 예언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사탄)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예수님의 모친도 한 여자의 신분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여”라는 칭호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마리아의 근본적인 관계를 밝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마리아에게 아들로서의 책임을 다 했습니다.  순종하고 받들었습니다.(눅2:51)  그러나 어머니의 권리에 있어서만은 분명히 제한을 했습니다.  

특히 공생애에 들어와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어머니의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야 됨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마리아와 예수님의 관계는 이제 한 여인과 하나님 아들 메시야와의 관계임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교회가 주장하는 마리아 무죄설은 지나친 주장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에서 속죄 받아야 합니다.    
  
“보소서, 아들입니다!” 하는 말씀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슬픔에 젖은 어머니에게 “나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는 위로의 말로도 들립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십시요. 당신의 아들은 이렇게 죽습니다.” 하는 깨우침의 말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 당신의 아들 나는 이렇게 죽으러 온 사람입니다.”  
“이렇게 죽는 것이 아들의 사명입니다” 하는 뜻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을 바라보면서, 마리아는 일찍이 천사가 전해주었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1-35)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아들을 보면서 이 예언들의 의미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아들이 왜 저런 모습으로 죽어야만 하는가?”  거기에 대한 해답으로서 주님은 자기의 모습을 말씀한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죽으러 온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마리아는 아들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람산에서 돌아온 후 다락방의 기도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이 때에는 예수님의 동생들도 예수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고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행1:14)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 죽음은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죽음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속죄 받아야 됩니다.  거기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조차도 예수님의 속죄를 받아야만 될 한 인간입니다.  마리아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혈연이나, 지연, 혹은 친인척 관계로 천국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마세요.  천국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만 들어갑니다.  십자가는 이미 이 세상에 왔던 사람들이나, 현존하는 사람들이나, 장차 올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고 믿어야만 될 유일의 속죄 수단입니다.  십자가는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입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두 번째 말씀은 사도 요한에게 하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27)  주님의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로, 가족 부양의 책임입니다.  주님은 가족의 일원으로서 철저하게 책임을 지셨습니다.  이 당시에 부친 요셉은 이미 돌아가셨고, 동생들도 어리고 변변치 못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모친의 여생을 생각하셨습니다.  요즘, 가족에 대해서 무책임한 사람들 많아요.  노동력도 없는 부모님 생활비도 안 드리는 사람, 평생 부모가 땀 흘려 모아 놓은 재산 탕진하는 불효자식, 결혼해서 처자를 거느리고서도 땡전 한 푼 벌어다 주지 않는 사람, 음란한 여자에게 빠져 가족 버리는 사람.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마18:6)  

가장 가까운 이웃인 가족에 대해서 책임을 다 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교인으로서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갈 불신자들보다 더 나쁜 사람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가장 괴로운 고통의 순간에도 책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족 부양에 대하여 핑계가 많습니다.  생활비가 많이 들어서, 모실 곳이 없어서, 바빠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자녀들 때문에 등등.  어떤 것이든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가장 고통스런 순간에도 그 고통을 책임 회피의 기회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십자가가 어떤 곳입니까?  손과 발에 못이 박혀 뼈가 깎이는 아픔이 있습니다.  순간순간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옵니다.  목이 탑니다.  혀가 천장에 달라붙습니다.  그런 순간에도 주님은 부모 부양의 책임을 완수하고 계십니다.  놀랍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괴로운 순간에도 부모 부양의 책임을 잊지는 마십시오.  
  
인류를 구원한다고 부모에게 할 도리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고르반 하고 하나님께 드려지면 부모에게 대한 도리를 안해도 괜찮다고 가르쳤습니다.  나라를 위하고, 사회를 위한다고 가족을 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닙니다.  크게 보면 가족을 위하는 것도 이타주의적 삶의 현장입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눅23:28)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보라, 네 어머니라!”  항상 나를 위주로 삼지 말고,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둘째로, 친동생들을 제쳐놓고 요한에게 부탁하신 점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여러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그리고 누이들.(마13:55-56)  그런데 왜 많은 동생들을 제쳐놓고 요한에게 부탁했을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때에 동생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요, 동생들이 가난하여 부양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에 비하면 요한은 예루살렘에 연고자도 있고 경제적으로 부요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에 그런 것이 가장 큰 이유는 아닙니다.  
  
주님이 요한에게 모친을 부탁한 가장 큰 이유는 사랑과 이해심입니다.  제아무리 혈육이라 해도 사랑이 없고 이해심이 없으면 이웃사촌만 못합니다.  동생들은 예수를 불신했습니다.  구주로서도 불신했지만 형제로서도 제대로 대접핮지 않았습니다.(마13:57,요7:5)  그러니 예수를 전적으로 따라 나섰던 어머니를 이해할 리가 없지요.  예수님은 사랑과 이해심이 부족한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맡기느니 차라리 요한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셨습니다.  

현대 사회는 가족의 유대 관계가 깨져갑니다.  가족 사이의 연결 고리가 사라져 갑니다.  가족 사이의 협동 작업이 없습니다.  따로 자고, 따로 식사하고, 따고 일하고, 따로 어울립니다.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사랑의 결핍입니다.  

요즘 애정 없이 모여 사는 가족들이 참 많습니다.  호적에 부모 자식 사이로 올라 있고, 족보에 형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니까 할 수 없이 호칭은 합니다.  그러나 서로 깊은 관계는 없습니다.  사랑 없이 모여 사는 가족.  시체들이 모여 사는 공간이요, 공동묘지 같은 가정들입니다.  
  
예수님은 모친을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놓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많은 재산을 만들어 어머니께 드리고 好衣好食 하면서 살도록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동생들에게 좋은 직장을 마련해 주거나 큰 사업체를 만들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재산이 제아무리 많으면 무엇 합니까?  사랑이 없으면 가족을 섬기지 못합니다.  섬긴다 해도 사랑을 먹고 살지 못하는 인생은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잠시라도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맡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부탁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누가 내 가족입니까?  주님은 가족관계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마12:48-50)  주님은 가족 관계를 다시 세우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가족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요, 둘째는 이웃을 향한 윤리입니다.  신앙에 충실한 자는 당연히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에 충실한 자는 진정한 형제요 자매요 부모입니다.  육신의 혈육이 참 혈육이 아니요 사랑으로 맺은 사람들이 참 혈육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은 행복합니다.  가난해도 사랑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지위가 없어도 사랑이 있으면 만족합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  그곳이 천국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정이 재산으로 채워지기 전에 사랑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의 가정 이루세요!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즉시로” 모친을 자기 집에 모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요한이 즉시 마리아를 모시고 그 자리를 떠남으로 아들의 처참한 임종 장면을 못 보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마27:56, 막15:40의 임종 장면에 보면 모친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정황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한이 주님의 말씀에 충실히 순종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불립니다.  한 때 그는 베드로보다 높은 자리를 탐내기도 했습니다.  자기들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늘의 불이 내려와 타 죽기를 바라는 시기심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갔던 유일한 제자입니다.  
  
그는 십자가 아래서 변화되었습니다.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이나 요한의 서신들은 “사랑”이란 단어로 충만합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는 자신을 “주의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님이 요한을 편애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마음을 열고 마음껏 받아 들였다는 말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주는 사랑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8,16)고 정의했습니다.  
  
사랑을 마음껏 받은 자만이 남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만 잠시 순종하는 듯 하다가 나중에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활 형편을 헤아려보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셨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갈릴리에서 마리아가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에베소 유적지에 가면 요한이 마리아를 모셨다는 장소가 남아 있습니다.  요한은 모친의 보호자 역할과 생활 부양자 역할을 다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정한 주님의 가족을 봅니다.  주님의 가족은 혈통과 가문과 민족을 초월하여 신앙으로 맺어지고, 사랑으로 맺어진 곳입니다.  한 하나님을 섬기며, 한 주를 섬기며, 한 사랑으로 뭉친 그곳이야말로 영원한 행복의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이 이런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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