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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의 종인가? (갈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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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종인가? (갈 1:1-5)

(예화) 어떤 교회에 팔십 세가 넘은 할머니께서 출석하는데,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교회에 나온다기보다는 그 자녀를 따라 나올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늘 맨 앞자리에 앉아서, 설교시간 내내 조는 것이 그분의 일이었습니다. 그냥 조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코까지 골기에 설교를 하는 목사님의 주의를 산만케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목사님께 떨어져 사는 큰 아들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큰 아들이 허리가 무척 아픈데 그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할머니, 제가 기도는 하겠어요. 그러나 그 아들이 예수님 좀 잘 믿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큰 아드님의 허리가 예수님처럼 든든해지게 되지요."라고 말했답니다. 목사님은 할머니의 큰 아들이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전도할 요량으로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얼마 뒤에 할머니께서 그 목사님에게 말씀하더랍니다. "큰 아들에게 목사님 하신 말씀을 전했지 뭐유. 예수님 좀 잘 믿으라구요. 그랬더니 예수님은 어머니가 대신 믿고 저 위해서 기도만 해 달래요. 그러기에 제가 이렇게 말해 줬시유." 할머니는 말을 잇습니다. "그래 널 위해 기도해주마. 어미가 되어 어찌 자식 위해 기도하지 않겠니?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믿어야 하겠다. 그래 네가 아픈데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내가 대신 먹어주면 그 병이 낫겠느냐? 약은 네가 먹어야 네 병이 낫는 것처럼 예수는 네가 믿어야 하겠다." 어머니의 이 말 한 마디에 큰 아들은 예수님을 믿겠다고 작정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그 할머니로 인해서 기쁨이 넘칩니다. 할머니가 설교시간에 조는 줄로만 알았는데, 복음의 진수가 그 할머니의 입술을 통하여 증거되었으니 말입니다. 한글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그 할머니였지만, 하나님의 영은 이와 같이 오묘한 가운데 역사하시며, 하나님의 지혜로 그가 말씀하매 세상의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합니다.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갈라디아서를 성경의 모든 책들 중에 최상의 것으로 여겼는데,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입니다. 나는 갈라디아서와 결혼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캐서린(루터의 아내, 수녀출신)입니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의 표어"요, "신앙 자유의 대헌장"이요, "크리스천의 독립선언문"라고 불리우기도 합니다. 2세기의 극단적 바울주의 좌경(左傾) 이단이었던 마르키온도 바울의 모든 서신 중에 갈라디아서를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그만큼 갈라디아서는 기독교가 유대교와 어떻게 다른지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그의 사도권의 근거를 밝힘으로써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개인병원을 개업한 의사의 사무실을 방문하면, 의사면허증을 비롯하여 그가 졸업한 학교들과 무슨 세미나과정을 이수했다는 유명대학의 증서들(certificates), 출강하는 의과대학의 외래교수증 등이 온통 한 벽을 장식하고 있음을 봅니다. 

왜 그렇게 많은 '증'들을 벽에 걸어놓습니까? 

그러한 증서들이 '그 의사'의 자격과 권위를 대변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실 의사의 권위와 자격은 그 의사가 얼마나 병을 잘 고치는가로 결정나는 것인데, 자기가 찾아온 의사가 어떤 의사인지 잘 알지 못하는 환자와 그 가족에게는 이러한 증서들이 그 의사가 어떤 의사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증서들을 전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환자의 병의 치료가 어느 정도는 '의사에 대한 신뢰도'에 좌우되어지기 때문에 '증'의 전시도 무시할 수 없는 (심리적) 치료효과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떤 의사가 아무리 용하다고 하더라도 외모나 말에서 신뢰감을 주지 못할 때, 환자의 치료에 여러 가지로 애로사항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말씀 증거에 대한 권위가 인정되어져야 합니다. 그가 무슨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인지, 그가 전하는 말씀이 과연 하나님 말씀인지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베드로나 요한을 비롯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사도권은 무엇으로 인정받았습니까? 

그들에게 유명 신학대학의 졸업장이 있었습니까? 사도로 인정받기 위하여 그들은 어떤 유명 대학의 졸업장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이 사도로 인정받기 위한 자격의 전부입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이라고 말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우리와 함께 다님'이 사도됨의 요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한 조건으로 따진다면 바울은 분명히 사도로서 결격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의 거의 모든 서신에서 사도권을 주장합니다. 그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가 비록 공생애를 사신 예수님을 만난 적은 없고 그의 가르치심을 직접 들은 적은 없지만, 그는 그의 사도권의 근거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로부터 부르심을 얻고 보내심을 얻었음을 주장합니다. 사도행전 9장, 22장과 26장에서 반복적으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과 그에게 이방인의 사도의 사명을 맡기심을 증거합니다. 

사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톨로스'는 '보내다' '파송하다'는 뜻의 헬라어 '아포스텔로'에서 나왔습니다. 즉,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사도됨은 사람들(혹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요 어떤 특정한 사람의 임명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은 어떤 사람(들)이나 교회가 그에게 그러한 직분을 부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그를 부르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복음 증거자의 사명을 맡기셨기에 그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의 사도권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는 그 직분을 감당함에 사람 혹은 사람들의 집단인 교회의 만족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도권의 부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비롯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고 안수한 것이 안디옥 교회였지만(행전 13:1-3) 바울은 어떤 기관이나 사람의 안수 이전에 역사하시며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감당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학교 교육과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교회나 노회가 행하는 '목사 안수'의 절차를 거쳐서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 있기에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절차로서는 노회나 교회를 통하여 안수를 받기에 노회나 교회를 만족하는 목회를 하여야 할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를 목사로 예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소명'으로 목사가 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부르시고 명하심에 충실한 목사가 됨이 중요합니다. 

'장로'나 '권사'로 안수받으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와 목사를 통하여 '장로'나 '권사'로 안수를 받지만, 안수의 효과는 안수를 행하는 목사로 비롯되지 않고 안수의 주체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그를 장로나 집사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목사를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기쁘시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2절에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라고 한 것은 '갈라디아'가 한 마을(타운)이 아니라 비교적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고, 바울이 일차 전도여행 기간 중에 (또한 2차 전도여행 때에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여러 교회를 개척한 까닭입니다. 

3절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서신들의 서두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문안인사의 정형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딛 1:4; 몬 1:3). 

그런데, 한 군데도 예외 없이 "은혜와 평강"의 순이지 "평강과 은혜"라고 한 곳이 없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은혜 다음에 평강이지, 은혜가 없는 평강은 없다는 것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은혜(恩惠)'란 단어를 잘못 사용하는 분들이 적지 않은데, 이 '은혜'란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 받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는데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성경적인 은혜는 '우리가 행위로는 의롭지 않은 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시고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입니다. '은혜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기를 원하시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요,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의롭다 여기심을 느끼는(경험하는) 사람'입니다. "은혜 받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강(샬롬)이 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하나님의 은혜(=값없는 선물)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케(=화목케) 되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그의 전 서신을 통하여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참복음(true Gospel)의 내용입니다. 이것 이외의 어떤 '좋은 소식'(good news)이나 '듣기 좋은 말'도 참복음이 될 수 없는 것은 4절만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만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임의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되어진 것입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라고 함으로써 그의 죽으심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단이 지배하는 이 세대는 악하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은 바 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심입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라고 함으로써 그의 죽으심의 대상이 "우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 죽어야 할 사람들은 "우리"인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대신 죽을" 대속물(代贖物)로 독생자 예수님을 지명하신 것입니다.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대속물로 지명하셨을 때,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여 자신을 드리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흙으로 지어진 존재로서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얻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삶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표시요,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이요, 우리의 유일한 자랑거리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1장)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란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속죄양이고 골고다 사건이 바로 내 사건임을 고백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이요, 여기에 참다운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자랑이란 내가 십자가의 사랑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라고 하는 것을 아는 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자랑스러운 것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5절에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하고 서두 문안인사를 마칩니다. 

하나님의 참복음의 말씀을 증거하는 바울은 그의 사도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음을 강조합니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 된 것이 하나님의 소명하심에 의한 것임을 변론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파송하신 것이기에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집사님에게 교회를 위하여 어떤 일을 좀 맡아서 봉사하여줄 것을 당부하였더니 못들은 척 하더랍니다. 그래서, 두 번째는 "집사님이 이 일을 꼭 감당해야 하겠습니다"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더니 이번에는 마지못하여 시간을 좀 달라고 합니다. 그러더니, 얼마간의 날수가 흘렀는데도 반응이 없어서, 세 번째로 간청을 하였더니 "목사님, 제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데 그런 일을 하라고 하십니까?"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더랍니다. 

목사로서,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성도로서 우리에게 이러한 소명의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자녀로 삼으시고 나에게 귀한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께서 명하시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고 이를 위해서 나 자신을 드림을 아까와하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여 살더라도, 세상을 좇아 변질되고 타락한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직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받는 직입니다. 더욱 소중히 여기며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으로 인하여 좌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우리 주님께 인정받는 종들이 되시기 바랍니다.(이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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