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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끊임없이 기억되는 교회 (살전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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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기억되는 교회 (살전 1:2-8)


잊혀진 가방(The Forgotten Bag)은 영상을 통한 설교 전문가 김상철 목사의 저서입니다. 선교사들이 두고 떠난 가방이란 모티브를 통해 선교를 생각하게 하는 내용인데 다큐멘타리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선교사들의 가방의 무게는 다른 가방에 비해 사뭇 다릅니다. 선교지로 가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야 했기에 많은 짐을 넣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영국 불스트로드(Bulstrode) 교 본부 지하창고에 가면 오래도록 정지된 시간 속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선교사들의 가방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져 먼지만 쌓여져 가는 가방,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소리 없는 메시지입니다. 주인공은 잊지 말아야 할 가방의 주인들을 찾아 10여 개국을 다니면서 7명의 주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가운데 헬렌 로즈비어(Helen Roseveare) 여선교사는 의사로서 콩고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콩고내전 당시 반군에 의해 투옥되고 여자로서 당할 수 없는 각종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위한 어떤 고통도 결코 그녀의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었노라 고백합니다. 현재 북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87세의 그녀는 콩고에서 총살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너는 그래도 나를 사랑하느냐, 너는 이 순간에도 나를 믿느냐, 이 상황에도 감사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답니다. 죽음의 문턱에 선 그녀는 ‘아니요’라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감사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질문이 나왔습니다. ‘내가 너를 믿고 있는 것을 감사하느냐’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어떤 헌신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고 있는지를 알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일상의 안일함 속에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방이야 말로 끊임없이 기억되어야 할 소중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억되어야 할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전함으로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특히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은 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그들의 신앙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증거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끊임없이 기억하며 감사했던 데살로니가교회의 모습이야말로 바로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창립 36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는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기억되는 교회로 계속해서 이어져 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본이 되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첫째로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 

김동신 사진작가의 저서 ‘기도하는 섬 소록도’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는 나환자들의 소록도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섬에 도착하여 새벽기도를 촬영하기 위해 교회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할아버지는 팔 다리 어느 것 하나도 붙어있지 않은 그야말로 사지가 없는 나환자이었습니다. 그런데 입술에는 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부슬부슬 비가 오는 새벽의 차디찬 땅을 향해 배를 깔더니 찬송을 부르며 조금씩 앞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사지가 멀쩡한 자신도 삶이 불만스럽고 짜증날 때가 많은데 사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불편한 몸으로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배를 깔고 새벽기도를 왔다가 또 가는 것일까 생각하며 자신의 믿음을 깊이 돌아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그것은 믿음의 끝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고백대로 움직일 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을 믿기에 찬양하고 하나님을 믿기에 개의치 않고 전진해 나가는 것이 바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를...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은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해야 합니다. 믿는 자의 행동은 그의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또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의 고백뿐 아니라 그 믿음대로 살아가는 행위가 기억되는 교회였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믿음에 따라 살았습니다. 핍박 중에도 믿음을 지킬 뿐 아니라 그 믿음대로 살고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끊임없이 기억되어야 할 만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모습은 실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대로 역사하는 행위를 가지고 살아가는 기억될 만한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둘째로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 

어느 날 일기예보에도 없던 갑작스런 비가 쏟아졌습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처마 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빗방울이 굵어지자 청년과 할아버지가 처마 밑으로 들어왔고 중년의 아저씨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가 비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처마 밑은 낯선 사람들로 금방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뚱뚱한 아줌마가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큼직한 엉덩이로 밀어대자 청년이 빗속으로 튕겨져 나갔습니다. 모두 모른 척 청년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할아버지가 한 마디 했습니다. “젊은이 세상은 다 그런거라네” 청년은 물끄러미 할아버지를 쳐다보더니 길 저쪽으로 비를 맞으며 뛰어갔습니다. 한 사오분쯤 지났을까? 그 청년이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비닐우산 다섯 개를 옆구리에 끼고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건네주면서 말했습니다. “세상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고 청년은 다시 비를 맞으며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청년이 준 우산을 들고 각기 갈 길로 갔지만 세상은 ‘다 그런거라’ 며 말한 할아버지만은 차마 그 우산을 들고 갈 수 없었습니다. “내가 청년보다 나은 것은 나이밖에 없네 그려” 그리고는 우산을 바닥에 놓고 장대비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마지막 우산은 자기 것이 아니라 아까 그 청년의 것이기에... 자기밖에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세상은 그런게 아니라고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어야 사랑의 수고가 있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수고가 따르지 않는 사랑이 어떻게 사랑이 될 수 있습니까? 

본문 3절입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여기의 ‘수고’라는 말은 ‘코포스’인데 ‘자르다, 채찍으로 때리다, 애쓰다’를 의미하는 동사 ‘코프트’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코프스’는 단순한 일을 위한 수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동반하는 수고’를 뜻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수고와 고통은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신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굶주림, 잠 못 이룸, 매를 맞고 핍박받는 고통과 고생은 주님을 사랑하고 인간의 영혼을 사랑하기에 복음을 전해주려는 사랑의 수고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십니까? 사랑은 수고를 동반해야 합니다. 사랑은 희생과 함께 고통까지도 감수하게 하는 수고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랑으로 수고하는 곳에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가 행복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사랑의 수고로 말미암아 기억되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두 사람의 벌목꾼이 백년이 훨씬 넘어 보이는 거목을 벌채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동안 힘들여 나무를 잘랐을 때에 기이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독특한 나무테였습니다. 나이테는 나무의 긴 수명을 반영하듯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다섯 개는 다른 나무테와 달리 촘촘히 위치해 있었고 그 다섯 개의 나이테 바깥쪽으로는 넓은 간격을 둔 나이테들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벌목꾼이 아주 조밀하게 나있는 다섯 개의 나이테를 보고 말했습니다. “이 나무는 5년간의 가뭄기간 동안 전혀 자라지 못했군” 그러자 다른 벌목꾼은 그와 전혀 다른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그 가뭄기간에는 크게 자라지 못했어. 하지만 가뭄으로 인해 부족한 수분과 양분을 얻기 위해 이 나무는 깊이 뿌리를 내렸고, 뿌리가 강화되면서 이 나무는 전보다 성장을 더욱 촉진시킬 수 있는 조건을 가지게 되었지. 고난을 이겨냈기에 이런 거목이 될 수 있었던 거야. 이 다섯 개의 나이테 이후에 생긴 나이테가 넓게 간격을 두고 생긴 것이 그 증거일세.” 이를 듣고 있던 벌목꾼도 “5년의 가뭄기간이 나무의 일생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군 그래” 라며 동료의 의견에 머리를 끄덕였습니다. 삶에는 고난과 시련이 따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 소망을 두고 끝까지 견디며 인내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너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여기의 ‘인내’라는 ‘휘포모네’는 ‘아래에’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휘포’와 ‘머물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메노’의 합성어입니다. 인내는 ‘아래에 머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인내란 소망이 있기 때문에 현재의 고통과 어려움에 절망하지 않고 머무르며 견딜 수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소망하면서 인내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오히려 박해의 고난을 인내로 견디면서 믿음을 더욱 성장시켜 나갔습니다. 고난을 인내로 극복해 나가는 신앙의 모습을 지닌 그들의 교회야말로 끊임없이 기억될 만한 교회 바로 그 자체이었습니다. 

하도리 아끼라(羽鳥明)의 ‘보람 있는 인생’이라는 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봇슈는 여섯 살 때 마을 공터에서 놀다가 호두가 떨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흑색 호두였습니다. 그 순간 흑 호두를 좋아하는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호두를 주머니에 넣고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자 달려가 매달리며 “아빠! 이거 주웠어요. 흑 호두 좋아하시죠?” 아버지는 호두를 받아들고서 “고맙다, 고마워” 몇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20년이나 세월이 흘러간 어느 날, 봇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책상 서랍에서 흑 호두를 발견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책상 서랍에 흑 호두가 있네요?” “거기 있었니? 네가 어릴 때에 주워서 아버지께 드린 흑 호두다. 아버지는 종종 그것을 꺼내 보시곤 했단다.” 봇슈는 잊고 있었던 그 흑 호두를 아버지는 평생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잊지 않고 언제나 기억하십니다. 믿음의 역사는 과거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를 믿는 것이므로 과거적인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그 예수 때문에 봉사하고 희생할 수 있는 것이므로 현재적인 것입니다. 소망의 인내는 예수 때문에 찾아올 미래의 영광을 바라며 참을 수 있기에 미래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억되는 교회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부디 하나님과 후세에 끊임없이 기억되는 교회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기억될 만한 교회는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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