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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주목하는 것 (고후 4: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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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목하는 것 (고후 4:8-18)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8-9에서 자기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며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한 경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도 이미 사도 바울이 그 자신이 겪은 고난에 대해 언급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먼저 고전4:11-13을 봅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사도 바울은 고후1:8-9에서도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그것을 한 마디 말로 압축하여 “큰 사망”(고후1:10)다이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뒤에 있는 6:4-5에서도 사도 바울은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을 겪었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죽은 자” 같았고 “징계를 받는 자” 같았다고 합니다(6:9). 

또 고후11:23-27에서는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하고 12:10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진술 앞에서 우리는 기독교 이천 년 역사 속에서 그 누가, 아니 성경의 모든 인물 가운데 그 누가 사도 바울의 고난에 견줄만한 고난을 당했을까 질문해봅니다.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러한 모진 고난을 평생 어떻게 감당했는가 하는 것을 들으며 우리는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만도 뭐라고 쓰고 있습니까? 8-9절에서는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였다” 하며, 16절에서는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런 고난을 그렇게 감당할 수 있게 한 힘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본문 10절 이하에서 발견합니다. 우선 10-11절을 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10절의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과 11절의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사도 바울이 앞서 말한 온갖 고난을 압축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끝까지 그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것은 10절에서는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하고, 11절에서는“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첫째는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생명을 얻었으며 그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임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의 죽음을 믿기만 하면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주 예수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몸 바쳐 일하지만 아직 죽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시며 살려주셨기 때문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사도 바울이 나중에는 거룩하고 장렬한 순교를 당했지만 어쨌든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는 그 큰 사망의 위험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 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일을 해왔는데 그것은 생명의 주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며 그가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음을 만인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 숱한 고난을 두려움 없이 끝까지 감당하게 한 두 번째 힘은 그의 전도자로서의 사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은혜로 그와 그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에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그였기에 그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새 생명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본문 12절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그의 생명이 “너희” 즉 고린도 교회 교인들 안에서 역사하게 하는 것 그것이 사도 바울의 사명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한 세 번째 힘은 그의 부활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 14절을 봅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부활에 대한 사도 바울의 믿음이 어떠했는지는 우리가 앞서 충분히 살핀 바 있습니다. 부활신앙만큼 우리의 삶을 담대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세 절에서 사도 바울은 부활신앙이 자기에게 준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주는 유익함 몇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끊임없는 고난을 몸으로 겪으며 그의 몸의 쇠약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또 세월의 흐름도 그의 몸의 쇠잔해감을 느끼게 했을 것입니다. 그는 언제부턴가는 자신의 죽음의 날이 가까워오고 있음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쇠잔해가는 것은 그의 겉사람뿐이었습니다. 그의 속사람은 날로 더욱 새로워지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소망과 확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 합니다. 부활은 단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다시 살아서 다시는 죽지 아니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영생에 대한 확신과 소망과 갈망을 우리는 부활신앙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아무리 길어도 잠시뿐이고 아무리 심해도 경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체험적으로 고백하며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 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부활신앙이 그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만 잠깐일 뿐인 것에 주목하지 않고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것을 주목하게 만들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눈에 보이지만 잠깐일 뿐인 것으로 여긴 것들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는 일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하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는 일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는 것 같은 일들입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도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것이 잠깐이고 가벼운 일로 여겨질 수 있다고 그는 힘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만이 잠깐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누릴 영원하고 복된 삶에 비하면 이 세상에서의 기쁨과 즐거움도 사실 잠깐의 것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건강과 부귀와 명예와 권력과 자랑도 다 잠깐의 것들일 뿐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우리에게 이미 약속된 하나님나라 앞에서는 지극히 잠깐일 뿐입니다. 이 잠깐 지나가는 것들에 우리의 눈과 마음과 영혼을 온통 다 빼앗기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이며, 잠깐 있을 것들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육안에 보이지 않지만 참되고 영원한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일들을 주목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새문안의 모든 성도와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신앙으로 오늘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과 고통과 위기와 불안과 절망과 죽음까지도 능히 이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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