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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롯 유다의 입맞춤과 베드로의 칼 (마 26:4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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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롯 유다의 입맞춤과 베드로의 칼 (마 26:47-56)

1. 배반의 입을 맞춘 가룟 유다(:47-50)

예수님을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불명예스러운 사람은 역시 가룟 유다일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예수를 판 자라.” 혹은 “도둑이라.” 등의 부정적 꼬리표들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열두 제자의 이름은 항상 가룟 유다를 제일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꼴찌였고, 부정적이었고, 가장 부끄러운 이름을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오대사(五代史)에는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는데 가룟 유다의 이름은 대대로 가장 나쁜 이름의 대명사로 남겨지고 있습니다. 붉고 천박한 머리카락을 ‘유다 색깔’(Judas color)이라 하고, 다른 짐승들을 도살장으로 유인할 때 사용되는 짐승을 ‘유다 염소’(Judas goat)라고 하고 친한 척하다가 등뒤에서 칼로 찌르는 것을 ‘유다의 입맞춤’(Judas kiss)이라고 합니다. 이렇듯이 유다의 이름은 나쁜 것에만 사용됩니다. 

그의 이름은 그의 출신과 배경을 추측 가능하게 해줍니다. 유다라는 그의 이름은 ‘찬양하다’라는 뜻입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지어 주어 늘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름과 같이 살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은 그의 배경을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요 13:2)라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몬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른 곳에는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요 13:26)라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시몬이었고 가룟 사람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란 가룟 지방의 유다라는 뜻입니다. 가룟 지방은 남방이었습니다. 다른 열한 제자가 북방 갈릴리 지방 출신인 것에 비하여 그는 남방 가룟 지방의 출신이었습니다. 

이런 지역적 차별이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판 자가 되게 하였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예수께서 혹은 제자들이 가룟 유다를 지방색으로 차별한 흔적은 없습니다. 다른 제자와 전혀 차별이 없이 공정하게 그가 가지고 있던 제자로서의 잠재력과 인격을 예수께서 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을 취하실 때에 열두 제자에게 동등하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습니다(마 10:1). 베드로와 같은 유능한 제자에게는 많은 권능을 주시고, 어떤 제자에게는 조금 주시고, 가룟 유다에게는 안 주신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를 포함한 모든 제자에게 똑같은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배반자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편견을 가지시고 차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능력을 보시고 돈을 맡는 회계직을 주셨습니다. 아니면 예수께서 그가 다른 제자들과 차별을 느낄까 봐 미리 그렇게 고려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는 돈을 잘 다루는 세리 출신 마태가 있었지만 그에게 회계를 맡기지 아니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탁월한 고려였습니다. 그는 유용하고 실무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을 때에 그가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라고 하였는데, 혹자는 이렇게 물은 이유가 그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돈궤를 맡아 거기에 들어가는 돈을 훔친 도적이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도적이 아니었지만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고 탐욕적으로 변한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마지막 만찬을 잡수실 때에 예수께서는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셨고, 제자들은 서로 근심하며 예수님의 눈치만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내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자가 오늘 밤에 나를 팔 것이다.”라고 하시고 가룟 유다에게 “가서 네가 행할 일을 행하라.”고 하심으로써 가룟 유다에게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만, 그는 돌아서지 못하고 대제사장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기회를 상실함으로써 그는 영원히 배반자라는 이름을 버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였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부활 후에 다시 베드로를 위시한 일곱 제자는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로 갔습니다. 그러나 잠시 동안의 의심이나 순간의 배반이 그들을 영원히 배반자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비교할 때에 절대적으로 악한 사람은 아닙니다. 단지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과의 만남이 악연(惡緣)이 되고, 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한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2.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51-56)

진실로 한치 앞을 예측키 어려운 미래의 미지의 새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욱 더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용기다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용기입니다. 이 용기만이 우리 앞에 놓여진 모든 시련과 위기를 극복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를 도전해 오는 모든 세력과 싸워서 이기는 무기입니다. 용기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절대 신앙이고 인격입니다. 매우 소중한 가치이고 덕목입니다. 그리고 무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용감한 신앙무장입니다. 바라기는 여기 우리 '세광인'들이 용감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어요, 그 용기가 어떤 용기냐 하는 것입니다. 용감하다 해서 다 좋은 것 아니지요. 어떻게 용감하나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용기냐? 잘못된 만용이냐? 가 문제입니다. 만약에 참된 용기가 아닌 잘못된 만용이라면 큰 일 입니다. 그것은 차라리 비겁과 무능보다도 훨씬 더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에 살인강도에게 용기가 있다고 합시다. 사기 협작꾼들이 용감하다고 합시다. 부패한 정치가, 악한 군인들이 용감하다고 합시다. 허랑 방탕한 탕아, 탕녀들에게 용기가 있다고 합시다. 그 용기가지고 더 큰 악을 행할 것입니다. 자신도, 세상도 더 불행하게 어지럽게 만들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용기가 아닙니다. 참된 용기, 의롭고 선한 용기, 참된 신앙과 양심과 인격에서 나오는 믿음의 용기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시고 마지막 준비기도를 하십니다. 제자들과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기도로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밤이 맞도록 기도로 준비하고 계시는 동안 배신자 가롯 유다는 대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를 팔아넘길 모의를 다 마쳤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을 내려오실 때에 가롯 유다는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를 잡으려는 원수들의 길잡이가 되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를 만나자마자 인사를 하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원수들은 사전에 모의한 그대로 예수를 붙잡았습니다. 예수를 붙잡을 뿐만 아니라 온갖 치욕적인 말과 행동으로 예수를 희롱합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베드로의 가슴에 피가 끓어올랐습니다. 울분을 참다못해서 칼을 빼듭니다. 그 칼로 대제사장 '말고'의 귀를 내려쳤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서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그리고 땅에 떨어져 뒹굴고 있는 말고의 귀를 주어서 다시 붙여줍니다. 그리고 말없이 그들의 뒤를 따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인데, 우리는 여기에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용기를 보게 됩니다. 적어도 네 가지 유형의 용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첫 번째, 원수들의 용기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검과 몽치를 들고 달려오는 그 무리들의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인류의 메시아를 감히 포박해서 끌고 가는 악한 자들의 용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악으로 선을 대적하는 용기, 불의로 진리를 막는 용기입니다. 악하고 불의한 용기, 어리석고 무지한 용기, 거짓되고 잘못된 용기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것은 용기라 할 수 없습니다. 만용입니다. 

세계사를 보면 이러한 악한 만용의 사람들에 의하여 역사가 암흑을 가져왔고 피로 물들이기도 했습니다. 일찍 알렉산더, 나폴레옹, 씨저, 네로 같은 이 악한 용기의 사람들에 의해서 세계는 어둠 속을 헤맸습니다. 근대사에서 독일의 히틀러, 일본의 동조, 같은 이 악한 만용의 사람들에 의해서 그러했습니다.


두 번째는 가롯유다의 용기입니다. 

분명히 가롯유다는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범인이 따를 수 없는 대담성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스승을 배반하고 은 30냥에 그 분을 팔기 위해서 악당들과 모의하고 악당들을 이끌고 예수님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담한 용기입니까? 

얼마나 무섭고 대단한 용기입니까? 자 순간적으로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그런 결정을 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원만한 사람 같으면 막상 예수를 대면했을 때 그 결단을 포기했으면 합니다. 양심이 두려워서라도 감히 예수님께 미소지으며 인사하며 입을 맞출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태연자약하게 그 가증한 연극을 연출합니다. 정말 용감한 사나이, 간 큰 남자가 아닐 수 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용기는 어떤 용기입니까?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추하고 가증한 용기, 비겁하고 무서운 용기입니다. 

그러나 이 가증한 용기의 소유자가 맞이할 최후가 무엇인가를 이 가증한 가롯 유다의 최후가 무엇이었습니까? 비참한 버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당합니다. 함께 악을 모의했던 자들에게도 버림당합니다.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 버림당해서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맙니다. 바로 이것이 가증한 용기의 소유자들이 받을 보상입니다. 이것밖에는 더 이상 아무런 보상도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베드로의 용기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 얼마나 용감합니까? 지금 악당들이 검과 몽치를 들고 살기 등등하게 지금 때를 지어 몰려오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제자들 이미 현장을 다 피해 다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오직 베드로만은 예수님 곁에 남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악당들에게 치욕적인 고통을 당하십니다. 특히 대제사장의 종 '말고'란 놈이 더욱 더 못되게 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베드로는 피가 끓고 울분이 터져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말고란 놈의 귀를 쳐서 베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용감한 행동입니까? 이 얼마나 의분에 찬 행동입니까? 그런데 과연 어떠했습니까? 베드로는 과연 한 용감한 제자 였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의 용기를 어떻게 보셨습니까? 너 과연 용감하다고 칭찬 하셨습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은 이 베드로의 행위를 보시고 칭찬하시지 않고 오히려 책망하십니다. 


여러분, 어째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그 용감한 행동을 책망하셨을까요? 이놈아, 어째서 말고의 목을 쳐서 아예 떨어뜨려버리지 겨우 귀때기나 떨어뜨리고 마느냐? 하고 책망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게 아니었습니다. 칼을 빼어든 그 자체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 겸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여기 매우 중요한 뜻이 있어요. 아무리 용기가 귀하다고 할찌라도 검을 빼는 용기만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혈기와 분노를 폭발한 용기, 폭력이 따른 용기는 용납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용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기는 덕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자기 자신에게도 유익과 덕이 안됩니다.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도 유익과 덕이 안됩니다. 때때로 이런 용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웁니다. 교회에 큰 손해를 가져옵니다. 나아가서 마귀에게 유익을 주며, 마귀에게 이용당할 뿐입니다. 때때로 마귀는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 이 베드로의 용기를 폭발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실수를 저지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교회와 이웃간에 화평을 깨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이 베드로의 검을 빼서는 안됩니다. 베드로의 혈기를 폭발해서는 안됩니다. 그리되면 우리는 마귀에게 이용당합니다. 영적 싸움에서 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을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합니다. 네 검을 집에 도로 꽂으라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네 혈기와 감정을 함부로 폭발하지 말라 폭발하면 그 때문에 우리가 함께 망한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정당한 일, 일지라도 검을 빼면 혈기와 감정을 폭발시키는 실수와 후회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검을 도로 집에 꽂아야 합니다. 검을 쓰는 자 검으로 망합니다. 참된 용기는 검을 빼는 용기가 아닙니다. 검을 도로 집에 꽂는 것이 용기입니다. 혈기와 분노를 폭발하는 용기가 아닙니다. 혈기와 분노를 억제하는 용기입니다. 그런데 이를 어찌합니까? 이를 어찌 합니까? 이 베드로의 검을 너무너무 자주 빼지 않습니까? 이게 중대한 문제입니다. 

한 번은 다윗이 사울 왕의 칼을 피해서 바란 광야에서 피난생활을 합니다. 그 지방에 나발이라는 부자가 농장을 경영하고 있는데 다윗과 그 군대가 이 나발의 농장을 잘 지켜주고 보호해줬습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군대가 양식이 떨어져서 굶게 됩니다. 하는 수 없이 다윗은 자기부하를 시켜서 나발에게 보내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때 인생하고 배은망덕한 나발은 일언지하에 다윗의 청을 거절하고 맙니다. 다윗은 분노했습니다. 군사를 거느리고 자발의 집을 초토화시키려고 달려옵니다.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 바로 이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달려오는 길목에 엎드려서 다웟에게 호소합니다. 

내 주 다윗이여! 어서 속히 발길을 돌이키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이 기름 부어서 이 나라 왕으로 장차 세우실 분입니다. 그런데 이 어리석은 내 남편 나발로 인해서 피를 흘리심은 하나님이 막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발길을 돌이키십시오. 이 말을 들은 다윗은 발길을 돌이킵니다. 분노를 찬송으로 바꿉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마침내 하나님은 사울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성군 삼으시고 그와 함께 하시며 그와 그 백성에게 복을 주셔서 다윗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태평성대 황금시대를 엽니다. 진실로 다윗은 혈기와 분노의 길에서 돌아서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귀히 보시고 귀하게 들어 쓰신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승리의 비결이 바로 이 돌아서는 용기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 돌아서는 용기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또한 그것은 아름답고 귀한 거예요.

흔히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용기만을 귀하고 아름답게 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용기는 가던 길을 돌이켜서 돌아서는 다윗의 용기가 더 귀하고 아름답고 멋있고, 위대한 용기예요. 지금 우리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돌아서는 용기 없어서 실패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말 가련하고 불쌍한 인생 어리석고 추한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말씀대로 검을 도로 집에 꽂읍시다. 다윗처럼 돌아서는 용기를 가지고 삽시다. 


마지막으로 또 하나의 용기 - 예수님의 용기입니다. 

예수님의 용기가 과연 어떤 용기일까요?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오. 검과 몽치를 들고 당신을 향해 달려드는 그 폭도들을 향해서 친구여 하고 부를 수 있는 용기! 

배반자 가롯유다의 그 가증한 인사와 키스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는 그 용기!

그리고 땅에 떨어진 말고의 귀를 주어다가 다시 붙여주는 그 용기! 


다시 말해서 혈기와 분노의 감정을 절제하고 극복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원수를 친구로 대하고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으로 대하고 용서 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해주는 바로 이 용기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참되고 거룩한 용기입니다. 아름답고 고상하고 차원 높은 용기입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고 분쟁을 화목으로 바꾸고 함께 공동으로 승리하고 함께 행복을 추구하는 바로 이 용기입니다. 

예수님의 용기는 강자가 약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용기였습니다. 

여러분 본문 52절을 주목하십시오. 원수를 향하여 검을 빼어든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들을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무슨 뜻이지요? 만약에 너처럼 내가 검으로 검을 대한다면 지금 당장에 열두 군단도 더 되는 하늘의 군대를 동원해서 저들을 진멸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또 하늘로부터 더 되는 하늘의 군대를 동원해서 저들을 진멸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또 하늘로부터 순식간에 불을 내려서 저를 심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겠다.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강자가 약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강자가 약자에게 져주는 이 용기 이것이 주님의 용기였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멋진 용기가 아닐 수 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꼭 배우고 지녀야 할 소중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우리 사회 모든 관계에서 이 용기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삼십 살 난 아버지와 세 살 난 아들하고 씨름하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당연히 아버지가 이기지만 그러나, 아들에게 번번히 아버지가 져줍니다. 왜 져줍니까? 힘이 없어서요? 만약에 그 아버지가 자기 힘대로 그 아들을 붙잡아서 방안에 다가 태권도로 메어친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세살 먹은 어린 아들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리고 그게 무슨 아버지 자격이 있습니까? 장자가 약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 용기, 이것이 아버지의 용기입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져 주는 용기 이것이 아버지의 아름답고 멋있는 용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이 용기가 없어서 우리 모두 함께 불행해지고 맙니다. 

져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강자일수록 약자에게 더 져주어야 합니다. 져주는 자가 진짜 강한 사람이고 위대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용기 십자가를 지는 용기였습니다. 

본문 54절을 보세요. 

"내일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찌 이루리요" 무슨 일이지요? 십자가 안 지고서 하늘의 열 두 영 되는 천사를 불러서 그들을 다 진멸해 버린다면 어떻게 성경이 임하겠느냐? 어떻게 내가 십자가지고 너희구속을 이루겠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묵묵히 십자가 지는 길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지는 용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용기, 이 용기가 참된 용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용기를 무능하다, 나약하다 비굴하다고 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가장 용감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가장 위대한 신앙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용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용감한 신앙의 사람들을 들어서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창조해 나가십니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이 용감한 신앙의 사람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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