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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민 22: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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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민 22:31-35)

‘애매모호’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에 ‘말이나 태도 따위가 흐리터분하고 분명하지 못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매모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학생인지 성인인지? 아가씨인지 아줌마인지? 일하는 건지 노는 건지? 애매모호합니다. 

애매모호한 기독교인도 많습니다. 성경에도 애매모호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발람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벧후2:16에는 발람을 “이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수13:22에는 “브올의 아들 점술가 발람”라고 합니다. 어떤 때는 선지자 같이 사명을 감당합니다. 어떤 때는 점쟁이 같이 욕심에 끌려서 행동을 합니다. 선지자인지 점쟁이인지 애매모호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어떤 때는 분명히 교인 같고, 어떤 때는 전혀 아닌 것 같은 애매모호한 교인은 아닙니까? 발람의 모습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확인해 보시길 바랍니다. 

1. 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칩니다.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사신을 보냅니다. 6절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발람은 그렇게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발람이 대답합니다. 22:8절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숙하니라.” 대답을 잘 한 겁니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데 이걸 기도해야 하는 겁니까? 왜 이러는 걸까요? 

하나님이 발람에게 말씀하십니다. 12절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발람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신들을 돌려보내면서 한 마디 합니다. 

13절 “너희는 너희의 땅으로 돌아가라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발락 왕이 더 좋은 조건을 달아서 다시 사신을 보냅니다. 

17절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처음 사신들이 왜 사신을 다시 보내자고 왕에게 제안했을까요? 
발람에게서 무슨 냄새를 맡은 거 같습니다. 한 번만 더 유혹하면 넘어올 것 같다고. 

발람이 대답합니다. 18절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발람의 대답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다음 말이 이상합니다. 19절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이미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기도하겠다는 겁니다. 발람이 왜 이러는 걸까요? 
욕심이 생긴 겁니다. 욕심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겁니다. 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상한 응답을 하십니다. 

20절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왜 이번에는 그들과 함께 가라 하실까요? 뒤에 보면 하나님이 노하시는데요. 허락이기 보다 어디 한 번 네 멋대로 해 보라는 겁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고 아침 일찍 발락에게 갑니다. 욕심 때문에 마음이 급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발람이 가는 길을 막습니다. 발람의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뽑아들고 막으시는 걸 봅니다. 그러나 욕심에 눈이 먼 발람은 나귀가 보는 것도 보지 못합니다. 나귀는 보고서 멈춰 서는데, 욕심에 눈먼 발람은 나귀를 가라고 때리고 있습니다. 
*욕심에 눈이 멀면 뵈는게 없어집니다. 하나님이 보이질 않습니다. 사명이 보이질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도 답답하셔서 발람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십니다. 

31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하나님이 분노의 목소리로 발람의 속셈을 지적하십니다. 

32절 “보라 네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발람의 길이 사악하다고 하십니다. 

벧후2:15-16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 하였느니라.”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불의한 돈을 사랑하여 욕심에 눈이 먼 사람입니다. 욕심 때문에 미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걸 모르고 계속합니다. 

발람이 자기 죄가 드러나자 인정합니다. 34절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왜 몰랐을까요? 욕심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욕심으로 마음이 둔하여져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사명과 욕심에서 발람처럼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2. 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사명을 선택하자. 

하나님이 발람을 발락에게 보내시면서 조건을 말씀하십니다. 22:35 “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할지니라.” 

발람이 이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발락 왕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22:38 “내가 오기는 하였으나 무엇을 말할 능력이 있으리이까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시는 말씀 그것을 말할 뿐이니이다.” 이제는 욕심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발락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축복합니다(23:7-10).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발락 왕이 항의해도 분명하게 말합니다. 

23:12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흔들리지 않습니다. 

발락이 다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번에도 발락의 요구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합니다(23:18-24). 여전히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발락이 강력히 항의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26절 “내가 당신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지 아니하더이까.” 

발락이 또 다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번에도 발락의 요구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합니다(24:3-9). 발람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합니다. 
발락 왕이 발람에게 분노합니다. 그러나 발람이 두려움 없이 대답합니다. 

13절 “가령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나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간에 내 마음대로 행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리라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발람이 사명과 욕심사이에서 분명하게 사명을 선택합니다. 더 이상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사명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될까요? 
*모세는 욕심대신 사명을 선택했던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히11:24-25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한 민족을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교회에도 욕심과 사명 사이에서 사명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들을 통해서 하실 일이 기대됩니다. 

스스로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지금 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하며 살고 있는가? 

3. 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욕심을 선택하지 말자. 

발람이 그렇게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 후에 불행한 일이 생깁니다. 무슨 일일까요? 
발람이 발락과 거래를 한 겁니다. 이스라엘이 저주받도록 꾀를 알려줍니다. 발람의 꾀대로 모압 여자들이 자기 우상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대합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의 우상을 숭배하며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합니다(민25:1-2). 

민31:16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서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계2:14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이 사명을 저버리고 끝내는 욕심을 선택하고 맙니다. 왜 그랬을까요? 결국 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욕심을 선택하고 만 겁니다. 발람에게 욕심의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겁니다. 탐욕의 뿌리가 깊이 남아 있는 겁니다. 

욕심을 뿌리를 뽑아 버리지 않고 그냥 놔두면 언젠가는 욕심이 그 사람을 삼켜 버립니다. 
딤전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발람은 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끝내는 욕심을 선택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행복했을까요?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고 맙니다. 

사실을 알게 된 모세가 발람을 죽입니다(민31:8). 발람의 꾀에 넘어가 우상을 섬기고 음행한 한 이스라엘 남자들도 염병으로 24000 여명이나 죽고 맙니다(25:9).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한 겁니다. 사명대신 욕심을 선택하면 결국 그렇게 되고 맙니다. 

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마침내 욕심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인데도 제자의 사명과 돈 욕심 사이에서 욕심을 선택합니다. 
그 돈 가지고 행복하게 삽니까?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는 구제의 사명과 돈 욕심 사이에서 욕심을 선택합니다. 그 돈 가지고 행복하게 삽니까?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혹 사명과 욕심 사이에서 욕심을 선택하지는 않습니까? 

맺는 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남편의 사명, 아내의 사명, 부모의 사명, 자녀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가정에서 욕심 부리지 말고 사명 감당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을 행복하게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교회에서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리더의 사명, 제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마디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를 교회되게 회복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직장에서도, 사업장에서도 당연히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께 하듯이 해야 합니다. 욕심으로 하지 말고 사명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면 직장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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