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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 9: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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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 9:18-26)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성탄절보다 부활절을 더 큰 절기로 여깁니다. 교회력을 따라서 교회가 신앙의 유익을 위하여 일년 중 한 주일을 택하여 부활절로 지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기독교라는 이름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교회가 부활절을 기뻐하고 축하의 잔치로 함께 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절에 여러 가지 행사를 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을 합니다. 또 이 다음에 우리가 죽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심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여러분이 부활에 대하여 알고 믿는 것은 이것이 전부 아닙니까?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여기에 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부활주일에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여러분이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2천년 전에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다고, 마지막 날에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부활신앙의 전부인가를 바르게 아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을 다시 살리신 일이 나옵니다. 물론 마태복음 본문에서는 회당장이라 하지 않고 한 관리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부활주일에 이 본문을 선택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연속해서 매주 강해하고 있었지만 부활주일을 맞아서도 이 본문이 매우 합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희 교회가 매주 설교마다 부활을 선포하였기 때문에 성경본문 어디나 부활을 증거하는 본문이 아닌 곳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관리의 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혈루증 앓는 여인이 고침을 받은 사건이 함께 기록이 되었습니다. 한 관리의 믿음과 혈루증 앓는 여인의 믿음이 이와 같은 사건을 기록한 다른 복음서에서 매우 강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혈루증 앓는 여인에 대하여 말하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고,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본문을 통해 마태는 병든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인지 모범을 제시하려고 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를 믿으면 어떤 병이든지 다 낫는다는 것을 알게 하려고 이것을 기록했는지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런 가르침이라면 오늘 본문 앞에서도 믿음으로 병이 나은 경우가 나왔었습니다. 

예를 들면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니까 한 나병환자가 나아왔고 그는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하며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서 자기 하인이 중풍병으로 몹시 괴로워한다고 하며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니다’라고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믿음에 대하여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모든 경우가 단지 예수만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기록이 되었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서로 다른 곳에 마태는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모두 한 곳에 모아서 이런 종류의 병, 저런 종류의 병이든지 믿기만 낫는다고 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병을 고치는 사건은 부흥회용이 아닙니다. 성경저자가 그런 사건을 기록함으로 무엇인가 전달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이고, 그 사건들을 기록한 위치나 배열 등을 통하여 자신이 전달하려는 뜻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맥을 통해 저자의 의도를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주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5-7장은 산상수훈으로 가르친 교훈이고 8-9장은 예수님의 권능의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5-7장과 8-9장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르치심과 병을 고치는 권능의 사역은 항상 연결되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면 이 복음을 따라 권능의 일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일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의 사역은 이사야 예언을 성취하심입니다. 그 권능은 죄사함의 권능이십니다. 죄사함의 권능은 신성모독이라하고 할 정도로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능임을 말해주었습니다. 죄사함의 권능을 가진 주님께서 세리인 마태를 부르시고 마태의 집에 들어가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천국의 왕으로써 죄사함의 권능은 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 다음에 마태는 금식에 관한 일을 기록했습니다. 왜 여기에 금식을 기록을 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레위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5대 제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5대 제사를 드리는 최고의 절정은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구원의 목표가 바로 이 대속죄일에 있습니다. 바로 이 날에 대제사장과 이스라엘 온 회중이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금식은 최고의 경건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레위기의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하나님이 성막에서 어떻게 함께 교제함으로 생명을 누렸는가를 이해하면 마태의 문맥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하시며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금식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마치 5대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던 이스라엘이 금식을 통해 대속죄일에 하나님께 나아감을 말하는 순서와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괴롭게 함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즉 슬픈 기색을 하고 나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아직 죽음의 권세를 벗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을까봐 두려워 떨며 휘장을 지나 지성소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금식하는 백성들은 이제 슬픈 기색을 하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혼인집 신랑이 함께 하는 잔칫집과 같은 교제입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을 말씀함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다시 마태의 문맥을 정리하면,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신 주님이 죄인들을 불러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생명의 교제인데 이 교제는 새 시대 새 생명의 교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지성소 안에 거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누렸던 생명의 교제와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의 교제가 임하였다고 마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 다음에 오늘 본문에 한 관리의 딸이 죽었다가 다시 살리심을 받는 것과 혈루증 앓는 여인이 치료함을 받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딸이 방금 죽었다고 하며 한 관리가 예수님께 간구한 것으로 기록한 반면에 다른 복음서에는 딸이 죽어가는데 요청을 한 것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마태는 더욱 죽은 딸을 살리신 일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럼 왜 여기서 마태는 모든 병든 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이 사건을 기록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미 앞에서도 믿음으로 나병 환자와 백부장 하인의 중풍병을 낫게 한 일이 있었고, 많은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치료하셨다고 말을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한 관리의 딸을 살리신 일과 혈루증 앓는 여인을 치료하신 일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무엇을 말하려고 이 사건들을 기록했을까요?

앞에서 나병환자와 백부장의 하인을 치료하셨을 때 그들이 가진 믿음은 이사야 예언의 성취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구약의 나병환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고 격리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이 누리는 생명을 갖지 못했던 자였습니다. 백부장도 이방인이어서 그에게 속한 자들도 역시 성전에 나아올 수가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남은 자 언약은 그늘진 땅의 백성들이 빛을 보겠고, 열방에 거하는 자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바로 이 약속을 기다리며 믿고 있던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을 받았다고 마태는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문맥을 살핀 것처럼 오늘 본문의 사건은 다른 흐름 가운데 나오고 있습니다. 죄사함의 권능, 죄인들과 식사하심, 그리고 금식에 관하여 말씀하신 다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문맥 속에서 한 관리의 믿음과 혈루증 앓는 여인의 믿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믿으면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신 천국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생명을 주는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맥의 흐름을 따라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신 주님이 죄인들을 불러 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 주시는 새 시대의 새 생명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왕이 주시는 이러한 생명을 한 관리와 혈루증 앓는 여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 생명을 새 시대의 새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할 때는 항상 옛 시대와 옛 언약에 속한 것을 대조하여 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옛 시대 옛 언약으로 주었던 생명을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성취하사 새 시대 새 언약의 생명으로 주셨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역사적 성취를 빼버리고 무조건 전능한 하나님이 어떠한 병이라도 못 고칠 병이 없으시다는 것을 믿으라고 한다면 오늘 본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맙니다. 만일 어떤 질병이라도 고치는 예수님을 나타내려고 한다면 앞의 나병환자와 백부장이나 모두 ‘네 믿음이 구원을 얻게 했다’라고 동등하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마태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일어난 시간순서를 따라 단순하게 기록을 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렇게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옛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신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새 생명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예배 시간에 구약 본문을 집사님이 낭독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5:22-27절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생명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애굽을 10재앙으로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시고 다시 쫓아오는 애굽의 군대를 홍해 바다에 모두 빠져 죽게 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홍해를 건너게 하셔서 다시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지도 못하고 이스라엘은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큰 구원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기 15장에서 크게 찬양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구원하셔서 여호와께 속한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여호와의 강한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었습니다. 이는 죄사함의 권능으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애굽에서 불러내었으면 이제 여호와는 애굽에 속하지 않는 새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이는 마태복음에서 새 포도주와 새 부대를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것을 이제 출애굽기 15:22-27절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거기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백성이 모세를 원망하여 무엇을 마실까 하매 여호와께서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셔서 이스라엘에게 마실 물을 주었습니다. 물은 생명입니다. 마치 오염된 물을 정화해서 생수로 먹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하여 주신 후에 여호와는 자기 이름을 나타내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치료입니까? 애굽의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게 하시는 치료입니다. 홍해를 건너 여호와의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신 것은 애굽의 질병이 이스라엘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출애굽기 15:27절에 아주 간략하게 이스라엘 백성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 샘이 열두 개가 있고 종려나무 70그루가 있어서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장막을 쳤습니다. 마라의 쓴 물에 비하면 12개로 샘이 늘어났고 거기에 천막을 쳤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안주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일종의 오아시스라고 보시면 됩니다. 

출애굽기 15장의 이 두 사건은 마치 한 세트처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16장부터는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을 말하고 17장에는 맛사에서 반석의 물을 주심을 말합니다. 마라의 쓴 물로 치료하는 여호와이심을 나타내셨고 엘림의 오아시스로 풍성한 생명과 안식처를 주셨습니다.

만약 마라의 쓴 물과 엘림의 12샘의 물을 주심이 그저 이스라엘 백성이 목이 마르니 마실 물을 구함으로 그 필요를 채웠다고 한다면 17장의 반석에서 나는 물을 주심은 또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원망하고 불평했으니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 일을 행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마라의 물을 주심과 엘림의 물을 주심은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치료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고 엘림에 천막을 치고 안식처로 삼은 일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물이 12로 확대되었으니 풍성하면서도 완전한 생명을 주심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한 관리의 딸과 혈루증 앓는 여인의 사건이 마치 한 세트처럼 기록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어 광야에서 여호와께서 주신 생명은 애굽의 질병을 치료하신 것이며 12샘의 풍성한 생명과 안식처였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속한 죄를 사하고 이스라엘에게 주신 생명이었습니다. 이러한 생명을 주셨어도 레위기에 말하는 바와 같이 유출병자는 성소에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은 구약 때는 여호와와 함께 하는 생명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풍성한 오아시스로 생명을 주셨어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는 생명은 아니었습니다.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 아들이 주시는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생명은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출애굽하여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에게 애굽의 질병이 미치지 못하게 하고 엘림의 풍성한 생명으로 함께 하셨던 나라는 비록 다윗 왕 때에 완성이 되었어도 후손 왕들이 범죄함으로 바벨론에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새 출애굽으로 이루는 구원을 약속하셨고, 때가 차매 하나님 아들이 오셔서 새 출애굽으로 이루시는 나라를 갈릴리 지방에서부터 시작하셨다고 마태는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마치고 내려오셔서 행하신 권능의 사역을 마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출애굽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의 생명을 누렸어도 온전한 생명은 아니었습니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유출병자는 제외되었고 누구든지 시체와 접촉하는 자는 부정한 자여서 정결 규례를 통하지 않고는 성소에 들어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 역사에서 주었던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면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서 왜 혈루증 앓는 여인이 나오는지, 방금 죽은 딸을 손을 얹어 살리셨다고 하는지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전지전능한 신이니까 모든 병을 다 낫게 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레위기 관점으로 보면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는 것은 모세 율법을 정면으로 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시체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는 것은 정면으로 모세 율법과 반대가 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한 관리의 딸을 살리신 일과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신 일을 통해서 옛 출애굽 때 여호와의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생명과 전혀 다른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심을 신성모독이라고 한 것은 그만큼 구약 역사에서 알지 못했던 권능이라고 마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비교해야 주님이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시고 한 관리의 딸과 혈루증 앓는 여인을 치료하심이 어떠한 생명을 주시는 것인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 역사에서 생명을 누리지 못했던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는 생명을 주셨고, 이 일을 마치 마라의 쓴 물과 엘림의 물이 한 세트로 엮인 것처럼, 한 관리의 죽은 딸을 살리심으로 구약 역사에서 주지 못했던 온전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이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시고 죄인을 불러 새 시대 새 생명을 주시는분으로 자기를 증거하셨습니다. 이러한 생명을 어떻게 백성들은 받아서 누려야 합니까? 그것이 오늘 본문의 한 관리와 혈루증 앓는 여인의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한 관리는 예수님께 와서 절하면서 자기의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내 딸을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이런 믿음은 레위기 관점으로 보면 전혀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체에 손을 얹으면 만진 자도 함께 부정한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 앓는 여인도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졌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고 함이었습니다. 이런 믿음도 레위기 관점으로 보면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유출병자와 접촉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혈루증 앓는 여인이 옷을 만지므로 예수님의 능력이 나간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마치 전기에 감전이 되어 몸이 찌릿찌릿해지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옷 가에 손을 대니까 혈루병이 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여기 혈루증 앓는 여인의 경우를 통해 말한다면 예수님의 능력이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도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니까 여러분이 교리가 가르치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전적 타락한 죄인이어서 인간 스스로는 율법을 지킬 수가 없으니 예수님이 율법을 대신 지키셔서 그 공로를 인간이 믿기만 하면 그 공로가 인간에게 전가되어 예수님의 의로움을 인간이 덧입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 믿은 후에도 날마다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며 삽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야 하나님이 법정에서 무죄 선언을 하시는 것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냉정하게 보면 예수 믿기 전이나 후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예수 믿은 공로를 종말에 전가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설교 처음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2천년 전에 부활하셨음을 믿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 후에 다시 살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과거의 역사적 부활을 믿습니다. 미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럼 현재 우리에게 있어 부활은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부활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순전히 과거와 미래에 속한 것 뿐이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부활은 현재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됩니다. 

이런 것 때문에 요한복음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예수님이 나사로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이 오시자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시니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마르다는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무덤으로 가시려고 하자 마르다는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늦어서 아무리 예수님이 여기 계셔도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르다가 안 믿었습니까?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구하는 대로 주실 줄을 믿었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믿었습니다. 이 마르다가 우리가 현재 부활을 믿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똑같습니다. 

구원론 교리도 이 범주 안에 있습니다. 예수를 한 번 믿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법정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것을 믿습니다. 그럼 지금 예수 믿은 효과는 무엇입니까? 날마다 죄 때문에 가슴을 치며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며 스스로 자기에게 절망하는 시간들을 주님 오실 때까지 보내면 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런 마르다의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나사로의 죽음을 비통하게 여기셨습니다.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는 비웃음을 당하셨습니다. 모두 죽은 자를 지금 살리시는 예수님으로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믿지 않거나, 마지막 날에 살리는 것을 믿는 정도였습니다. 

마태는 혈루증 앓는 여인을 통해서 특별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옷자락을 만짐을 통해서 ‘그 즉시’ 나음을 입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과 교리가 가르치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하여 비교를 해보고 아셔야 합니다. ‘그 즉시’가 바로 마태의 강조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에 대하여 다시 정립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정말 잘 생각을 해보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에 대하여 여러 번 비유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축구를 잘하는 권능을 가진 남자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이 남자와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을 자기 일생을 다 맡겨도 좋을 만큼 믿은 것이지요. 이렇게 믿은 결과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남편의 축구를 잘하는 권능이 아내에게 전기가 감전되듯이 전도가 됩니다. 아내는 축구의 ‘축’자도 모르다가 축구의 룰을 알게 되고 축구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을 찾아가 응원을 하게 됩니다. 축구의 전략 전술에 대해서도 전문가 수준에까지 이릅니다. 심지어 자기도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여자축구 선수단을 조직하기까지 하는 열성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남편의 권능이 아내에게 임합니다. 축구를 전혀 모르던 질병을 치료했습니다. 축구 경기를 즐기는 기쁨까지 누립니다. 축구 경기를 하게 되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축구의 생명이 아내에게 왕성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 것은 무엇때문이었습니까? 남편을 믿은 결과였습니다. 이 아내는 남편이 과거에 축구 잘한다는 것을 믿기만 했고, 이 다음에 마지막 날에 축구를 잘한다는 칭찬을 남편의 공로 때문에 거저 전가받기로 믿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믿어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생명과 예수의 구원을 믿어 교회가 받는 생명이 서로 다르다고 말합니다. 죄사함의 권능을 가진 주님이 주신 새 생명은 구약의 이스라엘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대표자가 바로 이 죽은 딸이며 혈루증 앓는 여인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믿음을 연합관계로 말씀합니다. 로마서 7장과 8장이 그런 경우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율법 남편과 결혼을 했다가 다시 새로운 복음 남편과 재혼을 한 경우를 7장과 8장에 비교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7장의 율법 남편과 결혼을 하면 그 율법 남편이 가진 권세를 그의 아내가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 남편을 믿은 결과입니다. 율법 남편은 죄와 사망의 법으로 통치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이 죄와 사망의 법을 벗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로 이러한 생명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구원을 얻는 이스라엘의 생명이었습니다. 마라의 쓴 물과 엘림의 물로 풍성한 생명을 누렸어도 죽음을 이긴 생명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을 12해 동안 낫지 못하게 했고 죽은 딸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율법 남편이 죽었습니다. 새로운 남자에게 시집을 가도 죄가 안됩니다. 새로운 남편은 복음의 남편이었습니다. 이 남편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통치하는 남편입니다. 이 남편을 믿었습니다. 이 남편의 권세로 말미암아 아내에게 전도가 되는 생명은 무엇이겠습니까? 결코 정죄함이 없는 죄와 사망을 환난에도 불구하고 넉넉히 이긴 생명을 아내가 받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을 구원하고 죽은 딸을 살리는 구원을 주시는 남편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자기 존재의 변화를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와 연합하였는가를 따라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과 연합하여 그 아래서 살았는가?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 아래서 살았는가? 이것이 바로 구약의 출애굽의 구원이었습니다. 사탄과 연합하여 사망의 권세 아래 살았는가? 예수와 연합하여 부활의 권세 아래 살았는가? 이것이 신약의 새 출애굽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교리는 전부 인간 내면의 갈등과 성찰로 성화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과 다른 이방구원관입니다.

한 관리의 믿음으로 죽은 딸이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의 믿음으로 병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는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고 새 생명을 주시는 왕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새 생명은 구약의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주시지 못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야 새 시대 새 생명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를 믿었는데 전부 죄 아래 있음을 탄식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칩니다. 혼인 집 신랑과 함께 할 때 어찌 슬퍼할 수 있겠느냐고 했는데도 여전히 죄로 인하여 자기 가슴을 치며 자복하며 자기가 얼마나 전적인 죄인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성화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축구선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고서도 매일 아내는 ‘저는 정말 축구를 모르는 어찌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남편 앞에 고백하며 사는 꼴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를 반복하다가 마지막 심판대 앞에 가서야 ‘너는 순전히 남편의 공로 때문에 축구달인이다!’라는 선언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느 질서에 이런 구원이 있답니까? 이 세상 어느 사람이 이런 삶을 살게 된답니까? 그게 믿음의 결과로 얻은 구원의 삶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속지 마십시오.

총각으로 살 때와 결혼해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 살 때가 서로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달라지지 않으면 그것은 아내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결혼함으로 새로운 질서와 삶이 와야 합니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이러한 생명력은 그 즉시 나타납니다. 이제 총각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연합으로 들어간 기쁨을 즉시로 피로연에서 먹고 마심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시 누리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부활을 믿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부활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을 설교 초두에 드렸습니다. 그럼 부활을 믿은 것은 과거에 속한 것 뿐입니까? 미래에 속한 것 뿐입니까? 아닙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권능의 주님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으셨으니 이런 권세를 맛보시고 누리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언제? ‘그 즉시!’

예수를 믿으십니까? 그럼 새 시대 새 생명으로 사셔야 합니다. 언제? ‘그 즉시!’ 세상에 속하여 사시겠습니까? 하늘에 속하여 사시겠습니까? 이 다음에 교회 조금 오래 다닌 후에 신령한 삶을 사실 것입니까? 그것은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혈통에 매여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형제와 자매들을 인정하고 그들을 섬기며 사시겠습니까? 이렇게 자신이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에 있는가 확증하십시오.

한 번 알량하게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었다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안심하지 마십시오. 오늘 내가 부활의 주님과 함께 부활의 권세로 이 세상에서 죄와 사망을 이기는 권능을 누리며 살고 있는가를 말씀하셔야 합니다. 

오늘 부활절에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한 관리의 믿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새 생명을 주시는 왕이심을 믿습니까? 그러면 혈루증 앓는 여인의 믿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부활을 믿으십니까? 부활을 사셔야 합니다. 지금!!! 축구가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축구 얘기만 들어도 지겨웠었는데 말입니다. 그처럼 주님 안에 형제와 자매들이 이 성찬상에 함께 앉아 우리 주님을 모시고 주님이 주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눈으로 보아도 아주 쬐그만 떡과 아주 작은 잔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교회가 잘못된 믿음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도 잘못 알았었습니다. 이제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믿음을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교리적 믿음으로 실체가 없는 허망한 삶을 사시지 말고 부활의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는 믿음의 삶을 사셔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복음이 그런 능력을 믿는 자에게 주실 것을 믿습니다.

루터의 믿음을 버리십시오. 종교개혁자들의 믿음을 버리십시오. 로마서의 믿음도 해석이 잘못된 것입니다. 로마서로 모든 성경의 믿음을 해석한 것도 잘못입니다. 이신칭의 교리에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관리의 믿음과 혈루증 앓는 여인을 대입시켜 보십시오. 과연 맞는가? 

예수를 죄사함의 권능을 가지신 분으로 믿었습니다. 죄인들을 불러 함께 식사하시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새 시대 새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바로 한 관리의 딸이었고 혈루증 앓는 여인이었습니다. ‘손을 얹은즉’과 ‘그 즉시’입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을 믿음으로 여러분에게 구원의 새 생명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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