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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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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 (마 5:7)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1. 옛날 어느 집에 두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친정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청을 드렸습니다. “오냐, 그러나 조건이 있다. 돌아올 때 큰며느리는 바람을 종이에 싸오고, 작은 며느리는 불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너라. 알겠느냐?” 두 며느리는 그저 허락이 내린 것만 기뻐하며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며칠 후 돌아갈 날짜가 되었습니다. 두 며느리는 보따리를 한 아름씩 이고 각각 친정을 나섰습니다. 

시집이 있는 마을 어귀에서 두 며느리가 만났습니다. 두 며느리는 마을 어귀에서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시어머니가 내린 명령이 두 사람의 가슴을 눌렀기 때문이었습니다. 불과 바람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두 사람 모두 지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두 며느리는 너무 속이 타서 한탄을 하다가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마을 노인이 우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며느리들의 사연을 들은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가르쳐주었습니다. “바람을 종이에 싸는 건 종이로 만든 부채를 이르는 것이요, 불을 종이에 싸라는 건 종이로 만든 초롱을 말하는 거요. 그러니 ‘종이 부채’와 ‘종이 초롱’을 구해 가지고 들어가시오.” 

이것이 지혜입니다. 세상의 지혜도 귀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낡아질 수도 있고,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참된 지혜, 최고의 지혜, 영원한 지혜는 무엇이겠습니까?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고의 지혜, 참 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가련하고 상실된 죄인들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하시려고 열망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긍휼이 많으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혜로운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불쌍히 여긴다’, ‘자비를 베풀다.’ 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단순히 남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우리가 타인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그 입장에서 그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며 그의 느낌으로 느끼는 공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물과 사건을 경험하고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감정에만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느낌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말을 할 때도, 내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먼저 상대방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고 말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남을 동정할 때도 동정받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동정을 베풂으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영원부터 있었습니다.

(시25:6)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무궁하십니다
.
(애3: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크고 많으십니다.

(시69:16)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에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 

(엡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시고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하늘에서 날마다 만나를 내려먹이시며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셔서 광야생활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는 등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은망덕하게 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끝까지 붙드시며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느헤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억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느헤미야 9:17-31입니다.

(느9:17-31)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또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하여 크게 설만하게 하였사오나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사십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 주께서 그 자손을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고 전에 그 열조에게 명하사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셨으므로 그 자손이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되....저희가 견고한 성들과 기름진 땅을 취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을 채운 집과 파서 만든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어 살지고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 저희가 오히려 순종치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 뒤에 두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크게 설만하게 행하였나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저희가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크게 긍휼을 발하사 구원자들을 주어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저희가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버려 두사 대적에게 제어를 받게 하시다가 저희가 돌이켜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 번 긍휼을 발하사 건져내시고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으나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또 선지자로 말미암아 주의 신으로 저희를 경계하시되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의 손에 붙이시고도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교만하여 불순종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어 곤고를 당하게 하시거나 대적들에게 붙이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면 그 때마다 긍휼을 발하시어 구원하시고 평강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이 크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셨습니다.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영원히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2. 베드로가 한 번은 예수께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그리고 이어서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왕이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간청했다. 그래서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탕감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 하면서 재촉했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 종은 그 사람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그래서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그리고서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어 두었다. 너희가 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 당시 헤롯 왕의 일 년 전체 소득이 900달란트였고, 갈릴리와 베레아에서 걷히는 일 년 세액은 모두 200달란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10,000달란트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으로 이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힘으로는 결코 청산할 수 없는 거대한 빚을 진 죄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10,000달란트는 약 6천만 데나리온에 해당합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매몰차게 당장 갚으라며 멱살을 잡고 갚을 여유를 달라고 애원함에도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은 몰인정하기 그지없는 악한 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왕은 그 종을 불러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며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크시고 영원하신 긍휼하심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셨습니다. 이를 사도 베드로와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엡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1만 달란트 탕감받은 종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긍휼하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므로 그는 긍휼없는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예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 하나가 헌데 투성이 몸으로 누워서,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고 했다.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러다가, 그 거지가 죽어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그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고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되돌아보아라.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불행을 다 겪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오지도 못한다.’ 부자가 말했다. ‘조상님,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나는 형제가 다섯이나 있습니다. 제발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고통받는 이곳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부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아브라함 조상님,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날지라도,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살아 생전 자기 집 대문에서 구걸한 거지 나사로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한 부자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는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긍휼없는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양은 복받을 자들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이고, 염소는 저주받을 자들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들을 나타냅니다. 예수께서 장차 영광의 보좌에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축복하실 것입니다.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영광의 보좌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 복받는 이유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5:35-36입니다.

(마25:35-36)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자 오른편의 양들(의인)이 의아해하며 이렇게 반문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으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임금되신 주님께서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께서 계속해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와 영벌을 선고하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신 것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25:41-43입니다.

(마25:41-43)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왼편에 있는 <염소>들이 항변합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작은 것 하나 소흘하게 여기지 마시고 넉넉한 마음으로 손을 펴 긍휼을 베푸심으로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한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덤불에서 떼어내었으나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상처가 나고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을 보면서 어린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하여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가시 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그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가시나무 위에 앉더니 작은 부리로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남겨놓은 털들을 쪼아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털을 물고는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던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 

사실 대자연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 가라지라면 이 얼마나 화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라지나 가시나무들일지라도 뽑거나 베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크시기 때문입니다. 느혜미야9:31입니다.

(느9:31)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세상의 끝 날에 심판하실 때까지 가시나무도 가라지도, 좌절과 실패와 죄에 시달린 우리의 형제 자매들도 다 품에 안고 긍휼하심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긍휼을 베푸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예배와 긍휼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9:13입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세리와 함께 한 자리에서 식사하는 것이 몹시 못마땅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마9:11)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며 예수를 비난하자 하신 말씀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처럼 살지 않는 동족들을 ‘천민’으로 여겨 멸시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일주일 중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칭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자처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과 세리 등을 ‘천민’으로 여겨 그들과 어떠한 경우에도 상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행위로 여겼습니다.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눈에 예수께서 세리와 함께, 그것도 그 세리의 집에서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이 심히도 못마땅해서 제자들을 통해 비난을 퍼부은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능통하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이 ‘천민’들과 상종하지 않는 행위는 그만큼 ‘천민’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천민)에 대한 긍휼과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서 예수를 비난하는 행위는 성경의 참된 정신과 예배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영적 소경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신 말씀은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생활이 없다면 참되고 바른 예배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참 뜻과 예배의 참 뜻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며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이웃에 대해 긍휼과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1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전부를 탕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겨우 100데나리온 빚진 자기 동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다시 붙잡혀 와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의 근거인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삶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빈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에 정통한 율법교사로부터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으시고 “(눅10:26)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가 “(눅10:27)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고 대답하자 “(눅10:28-29)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의 죽을 정도로 맞았습니다. 마침 제사장 하나가 그 강도만난 자를 보고 피하여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후 레위인 한 사람도 그 곳을 지나다 그 강도만난 자를 보고 피하여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하는 중 강도만난 자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다음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며 부탁했습니다.> 이러한 비유 말씀을 하시고 그 율법사에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고 하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여라.” 

강도만난 자를 보고 그냥 피하여 지나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거룩한 하나님 성전에서 예배를 담당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들이 강도만난 자를 피하여 그냥 지나간 근거는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레위기21:1-3 율법 때문이었습니다. 

(레21: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 골육지친인 부모나 자녀나 형제나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친 자매로 인하여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그러나 그 강도만난 자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결국 이들은 절실히 도움이 요청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은 것이며, 그것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도, 백성들에게 봉사할 직무를 맡은 제사장으로서도(민 18:1-32) 용납될 수 없는 과오였습니다. 만약 사마리아 사람이 없었다면 그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강도만난 자를 죽어가도록 방치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로부터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혼혈민족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혼혈족이라는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을 원수처럼 여겼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강도만난 자의 참된 이웃은 바로 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워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 시대에 강도만난 자들에게 참된 이웃이 되는 지혜로운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3:17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일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긍휼이 여기는 성도가 되시어 항상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거하시는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를 배워 긍휼을 베푸는 자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누가복음6:30-36을 다같이 봉독하겠습니다.

(눅6:30-36)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긍휼을 베푸는 삶으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시고, 상급이 충만하며 자손이 대대로 복을 받는(시37:26)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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