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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말, 룻 그리고 다윗 (룻 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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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말, 룻 그리고 다윗 (룻 4:12-22) 

오늘은 푸근한 마음으로 성경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에 귀를 기울이길 원합니다. 이 러브스토리는 <룻>이라는 모압 한 소박한 처녀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느 날 <룻>은 <말론>이란 이름의 청년을 소개받았습니다. 말론은 흉년을 피해 베들레헴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나오미>와 <기룐>이란 형제와 살고 있었습니다.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말론은 룻과 결혼했고, 기룐 역시 <오르바>라는 모압 처녀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결혼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남편 말론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말론만이 아니라,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기룐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되자 오르바와 룻 모두 과부가 되었습니다. 슬픈 장례가 끝난 후 아들 둘을 다 잃은 시어머니 나오미는 깊은 좌절 속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불러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말했고,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자신마저 떠나면 시어머니는 외톨이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심하던 그녀는 끝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나오미는 룻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고, 결국 룻을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의 귀환 소식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순식간에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나오미를 찾아와서 그녀를 위로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은 나오미의 뒤에 숨듯이 서 있는 룻에게로 향했습니다. 나오미는 룻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따라 왔는지, 시어머니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갸륵한지 설명했습니다. 룻을 바라보는 베들레헴의 주민들의 시선은 복잡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혼자된 여인에 대한 측은지심과 함께 이방 여자에 대한 경계심도 함께 있었습니다. 

룻은 베들레헴의 삶에 적응하기 힘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때로는 경멸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어머니를 봉양하려면 무언가를 해야 했습니다. 마침 그들이 돌아왔을 때가 추수기였으므로, 그녀는 밭에 나가 떨어진 이삭을 줍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수고하면 어머니와 자신의 하루 양식은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룻은 고마운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어떤 밭에 갔는데, 밭의 주인이 돌아보러 나왔다가 룻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주인은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보아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룻에게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룻기 2장 8-9절을 보면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룻은 너무 고마워서 사례하였습니다. 2장 10절을 보면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라고 했습니다. 

보아스가 이처럼 룻에게 호의를 보인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마을 사람들이 룻에 대해 궁금해 할 때, 그녀를 <비록 모압 여인이지만, 친정으로 가지 않고, 시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따라온 갸륵한 며느리>라고 설명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룻은 특별했습니다. 그녀가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강권하는 시어머니에게 한 말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1장 6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보아스는 룻의 이런 효성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룻을 칭찬했습니다. 룻기 2장 11-12절을 보면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렇게 룻과 보아스 사이에 서로를 향한 마음이 오고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 나오미는 그녀를 매우 긴장시키는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시집을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상까지 정해주었는데, 뜻밖에도 그 상대는 <보아스>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룻기 3장 1절 이하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려는 생각을 한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후손 없이 죽은 사람의 가정을 위해 가까운 친척이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를 이어주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 가문과 친척이었기에 룻을 맞아 대를 이어줄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마땅치 않게 여기면 얼마든지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4장에 가서 보면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지만, 그가 룻을 맞기를 거부했기에 이제 공은 보아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만약 보아스도 거절한다면 결혼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보아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룻기 3장 10절 이하를 보면 보아스가 룻에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 

그 다음 날 보아스는 성문으로 가서 열 명의 장로를 청하여 증인을 삼고, 자신이 룻과 결혼하여 가문을 잇겠노라고 선언합니다. 

룻기 4장 9-10절을 보면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보아스의 이런 행동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룻이 모압 여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신명기 23장 3절을 보면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아스가 룻을 맞아들이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보아스의 말을 들은 베들레헴의 장로들과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보아스와 룻을 축복하였습니다. 

먼저 룻기 4장 11절을 보십시오.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룻이 <라헬>과 <레아>처럼 되길 원한다는 것은 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라헬과 레아는 믿음의 조상인 <야곱>의 정식 아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하여 외삼촌의 집에 사는 동안에 외사촌인 라헬과 레아와 결혼했습니다. 이는 당시 풍속에 따른 정당한 결혼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이 라헬이나 레아에 비교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룻은 처녀도 아니고, 한 핏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룻은 도저히 보아스의 아내로서 자격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런 우리의 우려는 쓸모없는 것임이 그 다음 구절을 통해 밝혀집니다.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룻을 <다말>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여러분, 다말이 누구입니까? 다말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넷째인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세요.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대로라면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베레스라는 아들을 낳아 주었다는 말입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38장에 보면 그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유다에게는 <엘>이란 아들이 있었고, 엘은 다말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악하여 하나님께서 치시므로 엘은 일찍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당시 풍속에 따라 엘의 동생인 <오난>이 형수 다말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식을 낳으면 자기 자식이 아니라 형의 자식이 될 것을 알았기에 자녀를 낳는 일에 성실하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께서 치셔서 죽게 됩니다. 그러자 유다는 겁이 났습니다. 막내아들 <셀라>는 아직 어리기도 했고, 또 죽을까 염려가 되어 다말에게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말을 친정으로 보냈습니다. 그 후 아무 연락도 없자, 다말은 시아버지가 양털 깎으러 오는 날짜에 맞추어 자신을 창녀처럼 꾸며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후에 다말이 임신한 것을 알고 유다는 며느리를 죽이려 하였으나, 다말이 아이 아버지의 것이라고 내보인 증표가 자신의 것임을 알고는 며느리를 용서했습니다. 그로 인해 다말이 낳은 쌍둥이 아들이 <베레스>와 <세라>였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에서 보듯이 다말은 시아버지를 유혹한 여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부정한 여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듯이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다말의 이름을 들어가면서 룻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베들레헴 주민들은 다말을 부정한 여자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훌륭한 여자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들이 다말을 좋게 여기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베들레헴이 유다 지파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 자신이 유다와 다말의 후손이었습니다. 유다가 다말에게서 아들을 낳은 것은 자신들의 직계 조상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들은 다말 덕분에 유다 지파가 번성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말이 그렇게라도 해서 자녀를 낳지 않았다면, 유다 지파는 대가 끊어지거나 빈약해졌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광야에서 두 번째 인구조사를 했을 때 가장 숫자가 많은 지파가 유다 지파였습니다. 이는 다말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말의 행동이 쾌락을 위한 것이었다면 부정하겠지만,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것이었기에 오히려 갸륵하게 여겨졌습니다. 유다의 적통은 다말이 낳은 베레스를 통해 이어졌습니다. 그러하기에 룻도 보아스에게 시집을 가서 베레스 같은 자녀를 낳길 원한다고 축복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정한 며느리 다말이 완전히 복권되어 명예를 얻은 것을 봅니다. 
다말 같은 여인도 명예를 회복했다면, 룻이 그보다 못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러하기에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룻도 다말처럼 되길 원한다고 축복하여, 모압 여자라는 불명예를 벗기고 이스라엘 가정의 안주인으로 명예를 보장한 것입니다. 

그 후에 이들의 축복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베들레헴의 장로들의 축복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본문 18절 이하를 보면 간단한 족보가 나오는데, 장로들이 축복한 그대로 다말이 낳은 <베레스>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아멘!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태어난 베레스로부터 보아스가 났고, 그 보아스와 모압 여자 룻에게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다윗이 태어난 것입니다.이 족보는 다말과 룻이 더 이상 불명예스러운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명예를 회복하여 당당히 가문의 일원으로 포함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의 명예로운 복권은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계보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1장 3절 이하를 보면 이렇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오늘 우리가 나누는 러브스토리는 본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이루어져 열매를 맺었고, 룻의 이름은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 위에서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이루어진 이야기>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보아스의 어머니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룻에게는 나오미라는 시어머니가 있었지만, 보아스와 결혼함으로써 또 한 분의 시어머니가 생겼습니다. 그 시어머니가 누구입니까?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보아스의 어머니가 바로 그 라합인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어떤 여성이었습니까? 그녀는 여리고성의 기생으로서 정탐꾼을 숨겨 주었던 바로 그 <라합>입니다. 이스라엘 여인도 아니요, 기생이었던 여자가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은 것 역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으나, 그 사랑은 결실을 맺어 보아스 같은 훌륭한 아들을 낳은 것이었습니다. 라합은 아들 보아스가 데려온 룻을 보면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꺼이 룻을 며느리로 받았을 것입니다. 이로써 그 가정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 이방여자인 원조 <다문화 가정>이 된 셈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들은 그대로 성경의 주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자격 없는 더러운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용납될 수 없는 탕자가 아버지 품에 다시 안깁니다. 음탕한 여인 고멜이 다시 남편 호세아의 품에 안깁니다. 범죄하여 구제 가능성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받아 주십니다. 

다말, 라합, 룻처럼 불완전한 사람들을 통하여 다윗과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불완전한 데서 완전한 것이 나왔습니다. 천한 것에서 거룩한 것이 나왔습니다. 비천한 것에서 영광스러운 것이 나왔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천하고 약한 자들이 영광을 얻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28절을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약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일으켜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에게도 임하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함 때문에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골프공은 표면에 홈이 패고 울룩불룩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왜 표면을 매끈하게 만들지 않고 홈을 만들어 놓았을까요? 처음에 골프공은 매끈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랬더니 비거리가 130야드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연구 끝에 공 표면에 홈을 파서 울룩불룩하게 만들었더니 신기하게도 배 이상 날아갔습니다. 여러분, 패인 홈은 흠이 아닙니다. 오히려 홈이 생명입니다. 

약함이 축복이 되길 원합니다. 모자람이 강점이 되길 원합니다. 실패와 좌절 덕분에 하나님을 만나길 원합니다. 단점 때문에 열매가 더 많길 원합니다. 어떤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는가를 설명하면서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이라고 우습게 말했습니다. 여성이기에 말이 많을 것이고, 말이 많으니 예수님 부활 소식이 더 빨리 널리 퍼질 것을 기대하셨다는 논리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은 한없이 따스합니다. 잠시 후에 부를 찬양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여러분, 여러 약점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시선 앞에 나서십시오.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기시길 기원합니다. 사랑 받는 사람은 그 얼굴에 빛이 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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