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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후대의 축복을 예비하십시오 (신 3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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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의 축복을 예비하십시오 (신 32:1-12)
  
< 통전적 시각을 가지십시오 > 
  
살다 보면 돈이 많고 성공했는데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성공하고도 행복하지 못할까요? 대개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건강하지 못한 삶 때문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성공’과 ‘성공 후에 나눔이 없는 성공’은 오히려 불행을 초래합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건강하지 못한 눈 때문입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고 하나만 보고 둘은 보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삶에 필요한 중요한 영어 단어 2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perspective란 단어입니다. 영어에서 per는 ‘하나하나의’란 뜻의 어근이고 spect는 ‘본다’는 뜻을 가진 어근입니다. ive는 ‘속성, 성향’을 나타내는 접미어입니다. 

결국 perspective란 ‘하나하나를 다 보는 성향을 가진 것’을 뜻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전체적(통전적) 시각’을 뜻합니다. 어떤 사람은 동쪽만 봅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동서남북을 다 볼 줄 알아야 행복과 평안을 얻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단어는 wholeness란 단어입니다. 제가 속한 미국 기독교 선교연맹 창시자인 심슨(A. B. Simpson) 목사님은 wholeness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wholeness란 단어의 뜻은 무엇일까요? 영어 공부에서 ‘외래어(헬라어, 라틴어 등) 어근의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의성어 어근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단어는 ‘들리는 소리’로 뜻이 형성될 때가 많기에 발음이 유사하면 뜻도 유사할 때가 많습니다. 결국 whole은 발음이 유사한 all(모든)과 뜻도 유사합니다. 다만 all의 뜻에 holy(거룩한, 흠 없는)의 뜻이 가미된 단어가 whole로서 ‘모든 면에서 흠 없는’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완벽한’이란 뜻보다는 ‘전체가 균형 잡힌(전인적인, 온전한)’이란 뜻입니다. 성도가 행복하게 살려면 전체를 볼 줄 아는 통전적 시각(perspective)과 전체적인 균형(wholeness)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하나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성경!”이란 말도 성경책 한 권만 보라는 말은 아닙니다. 때로는 경건서적이나 주석도 봐야 틀린 해석도 막고 인생의 독단과 오류도 막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만 보고 단정하면 히틀러처럼 됩니다. 히틀러는 어렸을 때 별명이 ‘꼬마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어머니가 이웃집 유대인 남자와 정을 통하는 것을 보고 유대인을 증오하며 자기가 당한 한두 가지 사례로 깊은 편견을 가지다가 마침내 유대인 대량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처럼 편견은 무서운 불행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성회(순복음 교단)는 축복을 강조합니다. 물론 건전한 축복신앙은 필요합니다. 사실 순복음 교단은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저희 교단은 19세기 말 4중복음(중생의 주, 성결의 주, 신유의 주, 재림하실 주)을 주장하며 성결 및 선교 운동을 했습니다. 또한 저희 선교연맹에 속한 감리교 출신 선교사가 일본에 세운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사람들이 성결운동을 펼치며 발전한 교단이 <성결교>입니다. 그래서 성결교의 4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저희 4중복음과 사실상 같습니다.
  
20세기 초, 순복음 교단과 저희가 갈라진 것은 방언 문제 때문입니다. 그때 저희 선교연맹에서는 “방언기도를 하라고 시키지도 말고(bid not), 방언기도 하는 것을 막지도 말라(forbid not)!”고 했습니다. 반면에 순복음 교단은 방언기도를 성령충만의 필수적인 외적 증거로 여겼기에 방언기도를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래서 순복음 교단은 ‘성결 교리’ 대신 방언기도로 대표된 ‘성령충만 교리’를 삽입하고 그 4중복음에 ‘축복 교리’를 하나 더 첨부해서 ‘중생, 성령충만, 축복, 신유, 재림’의 5중복음을 내세운 것입니다.
  
믿음은 축복을 주지만 너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에 집착하면 기복신앙이 됩니다. 기복신앙은 참된 신앙을 막기에 저는 기복신앙을 종종 비판합니다. 그러나 순복음 교단에서 강조하는 축복신앙과 기복신앙은 성격이 다름을 알기에 순복음 교단을 비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아는 순복음 교단 목사님들은 대부분 바른 축복 신앙을 가지고 건강하게 목회합니다. 그처럼 어떤 한 가지 면을 보고 싸잡아 단정하고 비판하지 않도록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을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요새 새벽마다 저희 교회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저의 중학교 동기이자 의형제인 친구는 약 400명 정도 직원이 있는 한 IT기업 계열사 사장입니다. 그는 공부를 잘해서 전국 예비고사 이과 2등을 했고 서울 공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스탠포드에서 최단기간에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그는 독실한 유교 집안 출신이었는데 스탠포드 다닐 때 주님을 만나고 지금은 독실한 성도가 되었고 앞으로 북한이 열리면 북한선교를 하려고 기도 중입니다.
  
그 친구는 모든 공부를 잘했는데 이상하게도 음악만 못했습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노래를 시키면 이상하게 노래해서 속으로 많이 웃었습니다. 그런데 약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해서 조금만 고음만 올라가도 다른 음이 나오고 이상한 소리가 나옵니다.
  
그 친구가 바빠서 새벽에 잘 못 나오면 따로 토요일 오전 10시에 부부가 와서 본당에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때 제가 목양실에서 말씀을 준비하는 줄도 모르고 크게 찬송하며 기도하면 그 소리가 다 들립니다. 저는 말씀 준비할 때 누가 크게 찬송하고 기도해도 말씀에 잘 집중하는 편인데 그 친구가 찬송하며 기도하면 음이 자꾸만 틀리고 이상한 소리가 나오니까 신경이 쓰여서 말씀 준비가 잘 안 됩니다. 그래도 짜증나지 않고 오히려 흐뭇합니다.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을 가지고 그 상황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의 간절한 기도로 기도의 호흡이 교회에 넘치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런 측면으로 보면 전혀 짜증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만 보면 편견에 빠지고 실망도 잘하고 질투가 생기고 공동체에 도움도 안 되고 결국은 본인도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면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을 잘 길러주어야 합니다.
  
저는 형식적으로 교회에 다니다가 1984년에 은혜체험을 했습니다. 그때 얼마나 하나님과 교회와 성경 중심적으로 살려고 했는지 거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처럼 살았습니다. 항상 입술에는 찬송이 넘쳤고, 범사에 감사했고, 경건한 생각만 했고, 수시로 금식했고, 성경을 짧은 시일 내에 수시로 독파했고, 심지어는 웃을 때도 경건하게 웃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막 뜨거워진 상태에서 아주 설익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사서삼경>이 읽고 싶었습니다. 그 책을 반면교사로 삼으면 불신자 전도를 잘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몇 주에 걸쳐 방대한 사서삼경을 다 읽고 몇 가지 반면교사로 삼을 교훈과 독후감을 써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설교 때 언뜻 그 얘기를 하자 한 목사가 비방하고 다녔습니다. “이 목사님은 유교사상을 따르는 것 같아요.” 오래 전에 사서삼경 한번 읽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 왜곡해 비방하니 얼마나 불행한 모습입니까? 그래서 리더에게는 더욱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이 필요합니다.
  
몇 년 전에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책 <긍정의 힘>이 천만 부가 넘게 팔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 뒤로 계속 그분의 베스트셀러가 나왔지만 저는 그분의 책을 하나도 읽지 않았습니다. 그분과는 추구하는 사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찰스 스윈돌, 찰스 스탠리, 데이빗 제리마이어, 애드리언 로저스 등 수많은 건강한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설교도 가끔 듣습니다. 그런데 조엘 오스틴 목사님 설교가 쉽고 발음도 명쾌해서 이번 <네트영어> 강좌에 그분 설교 한 편을 교재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한 목사님이 말해주었습니다. “이 목사님! 어떤 목사가 목사님이 조엘 오스틴 목사님의 긍정주의 사상을 따른다고 비판하고 다닙니다.” 저는 그분의 긍정주의 설교를 <반면교사>로 삼을지언정 그분과는 추구하는 길이 많이 달라서 제 설교에는 무조건적인 긍정주의와 기복신앙과 무속신앙을 질타하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런데 영어공부에 그의 설교를 한 편 썼다고 그렇게 왜곡해 비판하고 다닙니다.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은 한쪽 면만 보면서 자기를 기준으로 삼고 자기 세계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졸업한 신학교나 자기가 몸담은 교단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면서 총회에 가면 자기들끼리 싸움도 많습니다. 불행한 모습입니다.
  
한국에 유난히 대형교회로 인한 부작용이 많기에 무조건적인 긍정주의와 외형주의에 비판이 많은 것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비판해도 자기를 돌아보면서 통전적인 시각(perspective)을 가지고 정확하고 바르게 비판해야 합니다. 통전적 시각이 없으면 지식은 지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질투심과 열등감만 커지고 불행의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런 불행이 없도록 자녀와 후대들에게 끊임없이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 차 사고가 납니까? 과속하거나 부주의하거나 졸거나 술에 취해 몰면 사고 가능성은 커집니다. 그러나 왜 초보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앞만 바라보고 천천히 주의 깊게 운전해도 사고가 납니까? 앞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백미러로 뒤도 보고 옆도 살피고 심지어는 사각지대까지 보는 능숙한 운전자의 통전적인 시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그런 통전적인 시각이 없으면 계속 초보 인생으로 머물고 사고도 많이 당하기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통전적인 시각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도전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둘째 딸이 기숙사 생활에서 겪은 어떤 고충을 얘기했습니다. 그때 딸에게 ‘통전적 시각(perspective)’을 도전했습니다. 그러자 딸의 목소리가 밝아졌습니다. 왜 딸에게 통전적인 시각을 도전했을까요? 사랑하는 딸이 넓은 시각과 마음을 가지고 균형 잡힌 믿음 안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자녀와 후대에게 끊임없이 perspective(통전적 시각)와 wholeness(전체적인 균형)를 가르쳐야 합니다.

  
< 후대의 축복을 예비하는 삶 > 
  
축복이 진짜 축복이 되려면 2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첫째, 축복이 옆으로 흘러나가야 합니다. 즉 축복을 잘 나눠서 내 축복이 남에게도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축복이 후대로 계승되어야 합니다. 즉 축복이 자녀나 제자 등의 후대로 잘 계승되어야 진짜 축복입니다. 그처럼 후대의 축복을 예비하려면 어떤 삶이 필요할까요?
  
1. 말씀 중심적인 삶
  
본문은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준 모세의 노래 중의 일부분입니다. 이 노래에서 모세는 먼저 하늘과 땅을 향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습니다(1절). 그만큼 자신의 노래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교훈이 풍성한 생명을 주는 이슬과 단비와 같다고 했습니다(2절). 그처럼 말씀은 메마른 영혼을 소생시키고 생명력을 주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끊임없이 말씀 중심적인 삶을 도전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알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은 반석이시고 그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분입니다(4절). 그처럼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전해서 그들이 말씀을 붙잡고 앞날을 멋지게 개척해나가도록 힘과 격려를 주십시오. 
  
2. 의리를 지키는 삶
  
하나님은 늘 진실했지만 그의 백성들은 악하고 삐뚤어지게 행동했습니다(5절). 그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배반하지 말고 힘써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려는 의리가 있어야 합니다(6절). 왜 하나님이 의로운 소수를 좋아합니까? 은혜를 감사하며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은 대개 소수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의리 없는 사람은 ‘다수의 대중’입니다. 대중은 유행과 유익을 따라 이리 저리 움직입니다. 그런 대중이 무슨 희망이 되겠습니까? 다수를 너무 믿지 마십시오. 다수를 너무 좋아하면 그 다수가 나중에는 자기를 배반하고 죽이는 다수가 될 수 있습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장로님들이 고발해 조 목사님이 구속 위기에 처한 것을 보십시오. 의리를 내세워 불의를 감춰주란 말이 아니라 그것이 대중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의리는 대개 ‘작은 것’과 ‘적은 것’에서 나타나고 훈련됩니다. 다수의 상황에서는 의리를 체감할 기회가 적습니다. 작은 교회에서 명절이 되면 어떤 성도는 생각합니다. “이번 주일은 명절 때문에 많이 빠져서 썰렁하겠구나!” 그래서 더 최선을 다해 주일성수를 합니다. 어떤 성도는 비바람이 치면 생각합니다. “오늘은 날씨가 나빠서 수요예배 참석률이 저조하겠구나!” 그래서 만사를 제쳐놓고 수요예배에 참석합니다.
  
그런 의리 있는 성도들이 리더에게 얼마나 힘이 됩니까? ‘의로운 성도’는 ‘의리 있는 성도’도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리를 언제 체감합니까? 소수일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운 소수를 기뻐하십니다. 그처럼 의로운 소수의 길을 추구하도록 도전하고 격려하면 그렇게 배운 자녀와 후대에게는 분명히 복된 길이 열릴 것입니다.
  
3. 은혜를 기억하는 삶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되는 배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혜와 사랑이 있었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옛날을 기억하고 역사를 살펴봐도 그런 은혜를 깨달을 것이고 부모나 선대들에게 물어도 그 은혜를 말해줄 것이라고 노래하면서 모세는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고 했습니다(7절). 그처럼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해주고 기억하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민족과 인종과 경계를 분할하시고 통치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다른 축복을 주셨습니다(8-9절). 어떤 축복입니까? 먼저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10절). 눈동자는 신체 부위 중 가장 귀중한 부위입니다. 위험한 것이 다가오면 눈을 순간적으로 감기에 아주 짧은 순간을 ‘눈 깜짝할 새’라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신속하게 위험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셨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독수리가 새끼를 업는 것처럼 이스라엘을 업어서 인도했습니다(11-12절). 어미 독수리는 일부러 둥지에서 새끼들을 떨어뜨리고 새끼들이 힘없이 떨어지면 재빨리 내려가 강한 날개로 새끼들을 업습니다. 그런 훈련으로 새끼를 강하게 키웁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키우려고 광야에서 훈련시키며 인도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은혜를 자녀들에게 말해주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게 하십시오.

  
< 하나님 편이 되십시오 >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은 반드시 얻게 하시지만 그 땅은 완벽하게 포장되어 주어진 선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나안을 앞두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한 것입니다. 약속된 땅을 얻으려면 땀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은 땀 없이 얻는 땅이 아닙니다. 요행에 의한 성공을 바라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기도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한 후에는 땀이 따르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땀이 없는 ‘불한당(不汗黨)’을 키워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해 주십니까? 자녀를 자녀답게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강하게 훈련시키는 것은 새끼가 미워서가 아니라 독수리답게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강건한 자녀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약속하신 복된 삶을 완제품으로 주지 않고 바르게 살려는 노력과 수고를 통해 주기를 즐겨하십니다.
  
어느 날, 한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이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무슨 말이냐고 하자 그 집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동안 복권을 여러 번 샀는데 하나도 안 맞았어요.” 그때 목사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집사님! 하나님이 집사님을 정말로 사랑하네요. 복권을 안 맞게 한 것이 더욱 큰 사랑의 표시입니다.”
  
이제 땀을 흘리고 지혜를 발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며 돈을 벌겠다고 하십시오. 역사를 보면 피와 땀과 눈물이 없이 위대한 일이 이뤄진 적은 없습니다. 약속의 땅을 얻으려면 전력투구의 정신을 가지고 땀과 용기와 노력을 앞세워 얻으십시오. 게으른 머리에서는 절대로 좋은 영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사업을 할 때도 자나 깨나 사업을 생각해야 번뜩이는 지혜가 생깁니다. 축복은 요행이나 우연이 아닌 열정으로 주어집니다.
  
열정이 없으면 성공도 없습니다. 바울이 위대한 전도자가 된 것은 전도에 미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6장에서 베스도 총독이 말했습니다(24절). “바울아!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그때 사용한 미쳤다는 헬라어 ‘엔데오스’에서 영어의 ‘인뚜지애즘(enthusiasm, 열정)’이란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 영어 단어도 ‘하나님(theos) 안에(in) 있기를 고수하는 상태임(iasm)’이란 뜻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즉 신앙 열정처럼 미치도록 추구하는 열정이 있어야 무엇인가가 된다는 말입니다. 
  
옛말에도 미친 사람이 곰을 잡는다고 했습니다. 미쳐야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이뤄집니다. 사업에 미쳐야 사업에 성공합니다. 정치에서 성공하려면 정치에 미쳐야 하고 연예계에서 성공하려면 무대에 미쳐야 합니다. 체념, 의욕상실, 낙망, 권태 등의 단어들은 다 미치지 못해서 생기는 단어들입니다. 미치십시오. 물론 미칠 때는 좋은 뜻과 비전을 가지고 좋은 분야에서 건강하게 미치십시오. 목표에 미쳐야 목표에 미칩니다.
  
살다 보면 언제나 문제를 만납니다. 그때 신자와 불신자가 갈립니다. 문제 앞에서 불신자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 문제를 건설적이고 창조적으로 활용합니다. 그처럼 어떤 문제에 부딪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갈 때 조만간 축복의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자신만만하게 사십시오. 다윗 앞에서 골리앗은 자신만만했습니다. 반면에 골리앗 앞에서 다윗도 자신만만했습니다. 둘의 자신만만은 차이가 있습니다. 골리앗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만만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믿고 자신만만했습니다. 다윗의 자신만만을 가지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해도 때로 문제가 생기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최종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배에서 주무실 때 큰 풍랑이 일었습니다(막 4장). 그처럼 예수님이 탄 배도 풍랑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만 믿으면 순풍에 돛단 것처럼 모든 것이 형통하고 돈도 많이 벌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하지만 성경에 그런 말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라고 했습니다. 성도도 환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환난 중에서도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붙잡고 늠름하고 씩씩하게 사십시오. 요셉은 감옥에서도 늠름하고 씩씩하게 살았습니다. 그처럼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 자기 힘으로 마귀를 이길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함께 하면 어느 마귀도 그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강하고 담대하게 나가십시오.
  
문제 앞에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셔야 할 텐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먼저 하나님 편이 되자!”고 하십시오. 우리 앞에 놓인 찬란한 비전의 세계는 그냥 주어지지 않고 힘써 싸워서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제 어떤 고난과 시험이 와도 찬란한 꿈과 비전을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믿고 늘 하나님 편에 서십시오. 그래서 약속된 비전을 성취해서 당대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후대들에게도 그 축복을 잘 전수함으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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