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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랑할 수 없는 의인 (롬 3: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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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할 수 없는 의인 (롬 3:27-31)

신앙은 관계이다.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조건이 있다. 한 가지는 사랑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무조건 사랑하시는 것이다. 십자가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는 또 한 가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반응이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손뼉은 마주 쳐야 소리가 난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의롭다고 하신 은혜의 길이 열려 있으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으면, 거기에 대해서 그 은혜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믿음이 필요하다. 즉 예수께서 내대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으로만 우리가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의롭게 됨에 있어서 중요한 세 가지 진리를 보여준다.

첫째로, 우리는 아무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27,28절에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고 했다. 

사람에게는 자랑이 항상 문제가 된다. 자부심, 자만심, 자존심 등이 우리에게 있다. 물론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자부심과 자존심과 긍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자랑이 지나치면 교만이 된다. 그러므로 ‘겸손한 긍지’가 필요하다. 즉 스스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자랑은 의에 기초한 자랑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움이 된다. 예를 들면 부끄러운 번영이 있다. 출세도 하고 돈도 벌었는데 그 뒤에는 많은 희생과 피를 흘렸고 많은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다. 죄를 지으며 부자인 것보다 의롭게 살면서 가난한 것이 낫다. 모든 일이 잘될 때 무조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만 하지말고 과거에 그 사는 방법에 죄악이 없었는가 돌이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죄스러운 번영 즉 불의한 방법으로 잘된  것은 자랑은 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또 나아가서 우리가 아무리 의롭게 되려고 노력을 해도 의를 이루지 못한다. 우리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애쓰는 그것이 얼마나 힘이 들고 헛된 것이며, 또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오히려 더욱 죄와 불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롭지 못한 존재인 것도 사실이지만 나아가서 우리가 의롭게 되려고 하는 노력과 수고도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나는 의에까지는 미치지 못했어도 의롭게 되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라고 자랑할 수도 없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보아주시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겸손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기업인들에 대해 하는 말이 있다.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회사가 부도가 나서 망해도 경영주는 저 먹고 살 궁리는 다해놓고 부도를 낸다는 말이다. 이렇게 만일 어떤 사람이 많은 빚을 지고도 좋은 집에 살면서 잘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이 잘 사는 것을 복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빚진 돈을 가지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아무도 복이라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빚을 졌다. 성경은 죄를 빚으로 비유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많은 죄의 빚을 졌는데, 이제 와서 내가 의를 이루고 선을 행하고 봉사를 한다고 해보아야 이것이 나를 의롭게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죄된 노력이나 죄 가운데에서의 수고는 마치 빚진 사람이 잘 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좀 이루어 놓았다는 것은 자기 만족이며 자기 기만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모래성을 쌓아놓고 노는 것과 같다. 우리는 종종 “사람인데”, “이만하면 되겠지”라고 변명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도 결국 자기 기준으로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사람은 이해할 수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변명이 안 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즉 내가 무엇을 행해서 의로워지는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임으로서의 의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이기에 그 의를 자랑할 수 없다. 내가 의로워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용서받은 죄인들이며 의롭다고 인정을 받은 의인들인 것이다.

이에 따라 믿음으로 행하는 선행이 있다. 이 선행 역시 우리의 공로는 아니다. 본래 나의 의로 행하는 선행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행해진 선행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고 마땅한 선행이기 때문이다.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처럼 만약에 죽을 병에 걸려서 죽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가 다시 살아난 후에 되는 모든 일은 모두가 감사할 것뿐이다. 근본적으로 내 힘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의롭게 된 후에 자기가 행한 선행에 대해서 자랑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것은 교만이요 죄를 짓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다. 

우리가 빛에서 멀리 있을 때는 그림자가 작지만 빛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의 그림자가 점점 커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커진다. 즉 나의 죄인 됨이 자꾸만 드러나서 겸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에 “나만한 사람도 드물다”는 식의 자랑과 교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예수를 몇 년을 믿었고, 기도를 몇 시간을 하고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고 봉사를 얼마나 많이 하고 경험이 얼마나 많고 하는 자랑을 쉴새 없이 하는 사람들이 교회마다 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롭다 하심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 의와 선을 행하면서 교만하고 자기를 나타내는 사람은 아직 미성숙한 신앙이고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신 은혜를 아는 사람은 점점 겸손해지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랑거리가 늘어나는 사람은, 자꾸 자기를 나타내려는 사람은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으며 그만큼 회개할 것이 많은 사람인 것을 스스로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 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랑할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의를 깨달을수록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종교의식을 가지고 자랑을 많이 하려고 했다. 내가 십일조를 바치고 예배를 드리고 하는 것들을 자랑거리고 삼으려고 했다. 오늘날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사나 예배를 예물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내가 하나님께 드려서 내 죄가 사함을 받고 정성껏 선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제사나 예배는 예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지는 희생이다. 사실은 내가 죽어야 하는데 제물이 대신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나의 공로나 의의 행위가 아니다. 내가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희생과 갑사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진정한 예배가 아니다. 내가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드렸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공로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의 당연한 본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자랑을 잃어버린 존재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고린도전서 1:31의 말씀처럼 “오직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 뿐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시냐는 것이다.

29,30절에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고 했다. 

이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입장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똑같다는 뜻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을 더 많이 내세우고 반면에 모세를 내세우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이고 그리고 모세를 말하려면 자주 율법 이야기가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한 지식이 있고 이미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의가 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것들을 가졌어도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는 것도 아니고 의의 수준이 더 높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고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것을 알고 받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더 책망을 받을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훌륭한 의인이다. 그러나 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 31:29 에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고 했다. 에스겔 14:20에도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찌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아무리 그들의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의는 그들 자신만 구원한다고 하셨다. 

어떤 신학대학 학장의 아들이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미국인 친구가 “너 예수를 믿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신학대학 학장 아들의 대답이 묘한 것이 “우리 아버지가 한국에서 신학대학 학장이다”라고 했다. 우리 한국사람들 같으면 “어이구, 목사님 아들이니까 믿음이 참 좋겠군요”라고 했을 텐데, 이 미국인 친구가 말하기를 “네 아버지가 신학대학 학장인 것과 네가 예수를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아버지의 믿음과 나의 믿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버지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내가 믿음이 없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혼할 자녀들을 둔 부모들이 될 수 있는 대로 예수 믿는 사람과 결혼시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 자신의 믿음은 보지 않고 그 집안에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있다던가 그 부모가 장로님이거나 권사님이라고 해서 그 집의 딸이나 아들이 무조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본인이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다 믿음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본인의 믿음의 정도와 경력과 성품 등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어쨌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저절로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의 위치와 유리한 점은 무엇인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는 이방인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하나님을 알았고 성경을 먼저 알았으니 이것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도 먼저 믿은 자와 나중에 믿은 자와 차이가 없다. 신앙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졌다거나 신앙의 연륜을 가졌다고 해서 이것으로 인해 내가 의인이 된다거나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먼저 믿고 먼저 알았기 때문에 그 말씀과 받은 은혜대로 살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더 큰 것이다. 내가 먼저 받고 먼저 믿은 이 복음을 전해야 할 선교적 사명과 책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오래 믿고 먼저 믿은 사람들이나 나중에 믿고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이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은 것은 차이가 없고 똑같다. 오히려 먼저 믿은 사람의 책임과 사명이 더 큰 것이다.

세 번째로, 그렇다면 율법은 폐해진 것인가 하는 것이다.

31절에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라고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했다. 즉 율법이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면, 율법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것이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율법을 놓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율법관과 바울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각
하는 율법관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도 바울처럼 율법에 대한 생각을 그리스도인적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자기의 의를 내세우려는 방편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뜻에서 율법을 생각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식의 율법이라면 이미 끝이 났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르게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그것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운다”고 했다. 이 “율법을 굳게 세운다”는 것은 “채웠다, 완성했다”는 뜻이다. 

로마서 8:4에서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고 했다. 이는 두 가지인데 예수님은 율법을 다 지키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고 또 하나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 즉 우리는 약해서 다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예수님은 다 지키셨다. 그리고 또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이다. 율법의 요구가 무엇인가? 법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또 그 법을 못 지키면 벌을 받아서 댓가를 치루어야 그 법이 제대로 지켜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예수님은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17에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내가 율법을 완성하러 왔노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즉 “내가 너를 위해 대신 죽었다”고 하시면 “네, 감사합니다”하고 받아들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래서 칼빈은 ’제한 속죄’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즉 예수님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을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공로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형식적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알맹이는 빼고 형식적으로만 율법을 지킨다”고 책망하셨다. 말라기에 보면 제물도 형식적으로 어차피 버릴 병신 양을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들만 율법을 좀 지켰다고 해서 못 지킨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안하무인이었다. 

오늘날도 이런 신앙적인 자만과 교만이 교회 안에 있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 그런 것을 바리새주의라고 한다. 남보다 조금 낫고 지식이 조금 있고 행함이 조금 있으면 금방 목에 힘이 들어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겸손해 보이나 속에는 교만이 가득 차서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고 인정받고 높임을 받으려고 하고 남을 무시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의인이 되어서 교만한 것보다는 차라리 죄인 되어서 겸손한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기독교인은 율법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벌을 받고 해를 받을까봐 두려워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로 하는 것이다. 선행도 공로를 세우기 위해서도 아니고 죄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너무 부끄러워서는 안되니까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해야 하는 것이다. 받은 은혜는 큰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일이 없다면 어떻게 서겠는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유로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종으로서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서 지키는 것이고 주인에게 벌을 받을까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기에 당연히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키는 율법이야말로 완전한 율법인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감사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자.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송구스러운 것이다. 나의 의를 자랑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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