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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으신 하나님 (마 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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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하나님 (마 7:7-11)

하나님에게는 많은 속성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 거룩하신 하나님 · 의로우신 하나님 등등.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요한 속성 중의 하나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 God is good. 

이것은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좋은 분이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겠지, 라고 추측하여 자기의 희망사항을 하나님에게 투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적으로 당신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오늘 본문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내부자 정보와도 같습니다.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관점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발견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당신이 어떤 분인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느냐. 

오늘 본문 말씀이 설득의 형식으로 돼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이것은 설득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인간 아버지에 하나님을 비유한 것입니다. 정말로 맞는 말씀이에요. 자식에게 나쁜 것을 줄 아비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아비는 담배를 피우더라도 자식에게 담배를 권하지 않습니다. 만일 자식에게 담배를 권하는 아비가 있다면 그것은 진짜 아비가 아니에요. 술을 권하는 것은 봤지만 담배를 권하는 아버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모든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도둑도 자기 자식에게는 도둑질은 나쁜 것이니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알 카포네도 자기 자식이 정상적인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또 다른 F 단어>라는 영화가 있는데 과거 젊은 시절에 하드록 뮤지션을 했던 남자들이 -그냥 록음악이 아닌 하드록을 했던 남자들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았어요. 과거 록 뮤지션을 할 때는 몸에 문신을 하고, 마약을 밥 먹듯이 하고, 욕을 입에 달고 살았던 남자들이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으니까, 자식들에게 뭐라고 가르치냐면 ‘욕하지 말아라. 마약 하지 말아라. 착하게 살아라’ 이렇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다른 F 단어>란 말은 Father란 말을 뜻합니다. 젊었을 때 막 살던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아버지가 되니까 과거의 자기 행동으로는 부인했던 그런 가치관을 자식에게 가르침으로써 인정을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이란 말씀이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득이에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실감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인간 아버지에 비유하면서까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증거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철학이 아니고, 교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통하여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하나님이 아무리 선하신 분이더라도 실제적으로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탁상공론일 뿐이요 허공을 울리는 소리에 불과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는 말씀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론적인 것이 아니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무리 의롭고 전지전능한 분이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다면 모든 기독교 교리는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상당한 입증의 책임이 있습니다. 입증의 책임이란 법률용어입니다. 

만일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면 돈을 빌려주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될 책임이 A에게 있습니다. 만일 돈을 빌려줬다는 사실을 A가 증명하지 못하면 그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B가 A에게 돈을 돌려주었을 경우에 돈을 돌려주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될 책임은 B에게 있습니다. 이게 입증의 책임이에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증거를 사람이 증명할 수 없어요. 하나님에게 입증의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통하여 당신의 선하심을 증거하시느냐. 

오늘 본문 말씀대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심으로써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에게 무엇을 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좋은 것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신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안 믿어도 됩니다. 정말입니다. 다만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전에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합니다. 

과거에 <할렐루야>란 영화가 있었지요. 배우 박중훈 씨가 목사 흉내를 내는 사기꾼으로 나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처음에는 돈을 받아 챙길 목적으로 목사 행세를 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설교도 하고 심지어 병자를 위해서 기도까지 합니다. 

그런데 들통이 나서 경찰에 체포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교회의 허락을 받고 교인들 앞에 고백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모두 공평하게 행복하게 해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누구는 부자로 태어나게 하고 누구는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나게 했다는 얘기입니까? 나는 하도 돈이 없어서 남의 돈을 빼앗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하나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사기를 치니까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나는 내가 죄책감을 느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 같은 놈도 교회가 변하게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좋은 곳입니다. 여러분 중에 저보다 어린 분이 계시면 저처럼 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착하게 사십시오.’ 이건 기독교 영화가 아닌데 이런 대사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로 선하다면 왜 내게는 좋은 것을 주지 않느냐. 이것은 정당한 질문이고 우리의 삶에 정직한 재고정리를 할 필요를 요구합니다. 우리의 삶을 솔직하게 재고정리를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지한 질문에 진지하게 답변하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과거에 어떤 응답을 받았든 간에 기도를 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이 과연 선하신가를 증험하려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야구선수에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야구선수가 자신의 타율이 얼마든 간에 공이 날아올 때마다 이것을 내가 칠 수 있을지, 아니면 삼진 아웃될지 늘 조마조마한 것입니다. 과거의 타율이 공이 날아오는 순간에 내가 이것을 칠 것이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타석에 섰을 때의 조마조마함은 선수의 경력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사람도 과거에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한 적이 있을지라도 과연 지금 하나님이 내 기도를 응답하실지, 과연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주셔서 좋은 결과를 이루게 하실지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시는 것을 보았지만 홍해 앞에 섰을 때에 여전히 마음이 두렵고 떨리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지만, 과연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이 역사하실지 사람으로서는 알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광야 생활을 마감하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할 때, 과거에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았지만 과연 요단강이 갈라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지, 이번에도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실지 두렵고 떨리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그렇기 때문에 간절히, 반복해서, 힘들여서 기도하는 사람은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내게 어떤 응답이 선한지를 하나님에게 설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하지 않는데 내 기도로 하나님을 설득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어서 내게 선한 것을 주시게 하도록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에 평강이 없기 때문에 더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음에 확신이 없기 때문에 더 소리 내서 기도합니다. 두렵기 때문에 기도를 하고 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들어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과연 내게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를 하나님이 모르실 것이라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불신앙입니다. 우리의 신앙행위 속에 불신앙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행위가 많을수록 그 사람은 불신앙도 많은 것입니다. 역설이지만 사실이에요.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알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설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당신이 선한 분이고 구하는 자에게 선한 것을 주시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설득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에게 자기에게 무엇이 있어야 되는지 하나님을 설득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천부께서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해야 된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무엇이 선한지를 하나님에게 설득해야 된다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에요. 과거 전통적인 장로교 인들은 하나님을 선하신 분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무서운 분이라고만 믿었어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벌을 주는 분이요, 하나님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재발견한 사람들이 20세기 오순절 운동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신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진리가 아니에요.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할 때 돌을 줄 자가 있겠느냐’ 당연한 얘기지요. 왜 우리는 하나님에게 건강을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병을 줄까봐 염려합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에게 풍성함을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까봐 염려합니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떡을 달라 할 때 하나님이 돌을 줄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선을 달라 할 때 뱀을 줄까봐 염려하는 것과 같습니다. 악한 아버지라도 아들에게 이렇게 주지 않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가 좋은 것을 구할 때 나쁜 것을 주시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이것은 우리가 일평생 두고두고 깨달아야 되는 부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기 어려운 이유는 자기 자신이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악한 마음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악함과 선함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악한 마음에 선함이라는 개념을 개념적으로는 알 수 있지만 실감하기가 어려워요. 내가 선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내가 선한 일을 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실감하기가 어려워요. 

그러나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알지니라’가 아니고 ‘맛보아 알지니라 - Taste and see’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사실 괴롭습니다. 괴롭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두렵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순간은 힘들어요. 힘들지 않으면 그건 기도가 아니에요. 그러나 그 기도의 시즌이 끝나면 하나님이 평강을 주시고 또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게 되고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구하는 자에게 주시리라’ 하셨기 때문에 주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받고자 하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분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는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릴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러나 하나님은 뭔가를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분으로만 생각해요. 요구하는 분, 뭔가를 달라고 하는 분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주시는 분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고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고 또 주시는 분입니다. 모든 선하고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받을 것이 없습니다. 

고양이와 개와 비슷합니다. 서로 말이 안 통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어서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역을 부지런히 안 하시는 것 같다. 나보다도 덜 열정적인 것 같다. 

나는 교회가 빨리 부흥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별로 열심히 일을 안 하신다. 나는 사람들이 좀 더 빨리 예수님을 믿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은 좀 느리다. 하나님이 조금만 더 협조하신다면 세상에 큰 부흥이 일어날 텐데, 하나님이 그만 협조를 안 하신다.’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에요. 

영국에서 유럽 본토를 잇는 해저 터널이 있지요. 그것을 처음 뚫을 때 한 곳에서 파고 들어간 게 아니고 영국에서도 파고 유럽에서도 동시에 공사를 시작해서 중간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이건 상당한 정확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일 열심히 팠는데 서로 다른 곳으로 가서 만약 그게 미국까지 갔다…. 큰일 나는 것이지요. 굉장히 공법에 정확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바다 밑에 굴을 파는데 어떻게 중간에서 만날 수 있도록…….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 어디냐.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만날 수 있느냐. 바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경험을 통하여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경험을 통하여 사람이 ‘아, 하나님은 역시 좋으신 하나님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고 하나님도 당신이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사람에게 알리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나님이 두드리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두드리고 하나님은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게 아니고 사람이 찾으면 하나님이 찾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도박이 아니에요. 

신앙은 도박이 아닙니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떡을 달라 할 때 그건 도박이 아니에요. 자식이 아버지에게 생선을 달라 할 때 아버지에게 달라고 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도박이 아니에요. 줄까, 안줄까, 안 줄 수도 있다, 돌을 줄 수도 있다, 그게 아니에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은 도박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떡을 달라고 하는 것은 도박이 아니에요. 이것은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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