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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 (행 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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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 (행 3:11-26)

 “교사여 절대로 가르치지 마라”라는 제 책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신 분이 계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은창 선생님이라는 분인데 유명한 배구선수는 아니었지만 배구 선수 생활을 하다가 은퇴해서 체육교사가 되었던 선생님입니다.

그분은 저희 교회 주일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키가 2m나 되는 선생님은 사랑도 2m처럼 느껴질 만큼 했습니다. 우리만 보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우리만 보면 무엇이든 주고자 했습니다.

그분과의 여러 가지 추억이 있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은 그분과 함께 한 마지막 수련회였습니다. 심장이 안 좋아서 정말 어려운 수술을 받았는데 몸이 온전치 않은데도 아이들과 함께 하겠다고 수련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수련회 때 아이들과 함께 하며 기도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붙들고 끝까지 중보기도하던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수련회가 마지막 수련회였습니다. 수련회 이후, 하나님은 그분을 천국으로 데려 가셨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천사보다 더 천사 같은 분,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아이들을 위한 희생을 기쁨으로 감당했던 분, 왜 하나님이 그런 분을 데리고 가셨을까?

늘 기도했습니다. 정말 간절히 온 교회가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치의 병에 걸리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적입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다보면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40여년 간 앉은뱅이 걸인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던지는 동전을 받고 살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찬송을 부르자 놀란 군중들이 달려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3장 12절은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나옵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기적을 행한 것처럼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선 것은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기적으로 인해 놀란 사람들에게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니 그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기적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적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앉은뱅이 걸인이 일어난 기적 후에 베드로의 행동 가운데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 또 치유 받고 싶은 사람 있습니까? 나오십시오. 이렇게 하면서 한몫 챙기려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에 대해 위대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육체적 치유, 교제, 인도, 그 밖의 다양한 체험 등을 제공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런 일을 하지 않으며,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이런 것은 사이비 종교에서나 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강해1. 375페이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싶은 교회는 어리석게도 이런 모습으로 가장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본문 3장 13절에서 베드로는 하나님 이야기를 꺼냅니다. 기적을 통해서 자신에게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처럼 과시하거나 헌금을 강요하는 행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 갑자기 베드로가 이야기를 돌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요?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은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장 31-32절 보세요.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라고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세대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세대를 넘어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셨으며 모세와 수많은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앉은뱅이로 태어나 지난 40여년 간 걸인으로 살았던 자에게 오늘 나타나셔서 그를 일으키시고 걷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을 보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도 그저 앉은뱅이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놀랄 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저와 여러분이 앉은뱅이 기적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삶 속에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의 주관자이십니다.

한발 더 나아가서 이 기적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죽인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베드로는 기적 사건을 통해서 먼저 하나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기적은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베드로는 자신들을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불쾌한 이름 하나를 소개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3장 13-15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들, 그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 즉 부활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힘을 잃어버릴까봐 예수를 제거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은 예수가 원했던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었기에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 눈앞에 펼쳐진 앉은뱅이의 기적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본문 3장 16절을 보세요.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베드로의 증언에 의하면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40여년 된 걸인이 일어나 걷고 뛰고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적에 관심이 있으시죠?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시죠? 여러분은 우리가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시죠? 그렇다면 잘못 짚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치유와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완전히 제거하고 무덤에 가두어 놓았던 예수께서는 빈 무덤을 남긴 채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앉은뱅이 걸인, 누구도 해결할 수 없었던 그의 문제를 해결하셔서 그를 일으켜 세우시고 걷고 뛰고 찬송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확실하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예수께서 고난과 역경 속에서 일어나 걷고 뛰기를 바라는 우리를 일으키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왜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것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믿음은 ‘스스로 믿는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는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적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 자는 죽음도 세상 어떤 권세도 그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는 세상이 다 아는 내용이지만 세상 모두에게 숨겨진 비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활에 대한 지식은 있으나 부활을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왜요? 우리의 무지 때문입니다. 본문 3장 17절을 보세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그렇다면 무엇을 알지 못했다는 것일까요?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언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극악한 죄인이 달리는 십자가에 달릴 수 있는가? 이것은 당시 유대인이나 헬라인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고민이 아닐까요? 우리는 십자가를 믿지 않습니다. 아니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액세서리로 십자가를 하는 것은 좋아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이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는 고난을 넘어선 죽음입니다. 어떻게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해가 안 가잖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떠해야 합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내가 원하는 것을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플 때, 내가 고통스러울 때 나를 즉시 구원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는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왜요? 선지자들이 예언했잖아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구약의 제사가 아니 선지자들의 입술이, 아니 구약 성경 전체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했던 유대인처럼 행동했습니다. 아니 교회를 다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증명해 볼까요? 고난당할 때, 역경이 찾아올 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기 보다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너와 우리를 지금 구원해 보라고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무지 때문입니다. 우리의 무지는 기적을 이해할 수 없음이 아니라 우리의 죄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셔야 하는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한 채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소리치는 것,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내게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조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무지한 모습입니다.

그런 무지한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본문 3장 19-20절을 통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사랑하는 여러분, 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무지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내내 설교를 준비하는 데 제 마음속에는 계속해서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김 목사, 너는 예수를 알고 있니? 넌 십자가에 달린 나를 주목하고 있니? 그런데 왜 그렇게 사니? 왜 조금만 어려워도 낙심하니? 왜 조금만 힘들어도 외로워하니? 넌 나를 정말 알고 있니?’
 
그러면서 이 찬양이 떠올랐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은 무슨 죄가 있나 저 무지한 사람들 메시야 죽였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주목하고 계십니까? 기적의 현장에 있는 베드로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주목하고 계십니까?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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