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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에서부터 시작되는 변화 (요 2: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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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에서부터 시작되는 변화 (요 2:14-22)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유월절 제사를 드리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인들이 거하는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제물로 사용되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종교세를 내는데 필요한 돈을 환전해주는 환전상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 세워진 거룩한 성전이 시장터로 변질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각 자의 집에서 제사에 사용할 제물을 가지고 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지역과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제물을 가지고 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명기 14장에 이런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타당한 제사제도입니다. 이런 선한 제도를 기득권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제도로 악용했습니다. 

성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서 장사할 수 있는 자리를 경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백성들이 가지고 온 제물이 제사로 드려질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검사하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이런 권한을 악용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구입하는 제물은 흠 있고, 병들었어도 아무런 트집을 잡지 않고 제물로 받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구입해 오는 제물은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성전 안에서 제물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상인들은 병들고 흠 있는 제물을 비싼 값에 팔아 폭리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에게 뇌물을 주며 악의 고리를 만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화폐인 데나리온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헬라 문화권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드라크마, 달란트 등의 화폐도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화폐 단위인 렙돈과 세겔을 사용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성전 세를 낸다든지, 헌금을 드릴 때에는 반드시 유대 화폐인 세겔이나, 렙돈으로 바쳐야만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 환전소를 만들어 환전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넘겨주었습니다. 환전상인들은 환전하는 과정에서 몇 배의 이익을 챙겼습니다. 그리고 뒤로는 제사장들과 돈거래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제사를 이용해 성전이 검은 돈이 오가는 부패의 온상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성전의 타락한 모습을 보시고 16절에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분노하며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면서 ‘장사하는 집’이라는 말을 사용하셨는데 헬라어의 뜻은 ‘시장’이라는 뜻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세워지는 곳입니다. 시장은 인간의 욕망을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곳입니다. 성전은 성령과 말씀이 지배 원리지만 시장은 돈이 지배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과 말씀이 지배하는 거룩한 성전이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시장과 같이 변질되어 있음을 탄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어다’고 꾸짖으시는 말씀이 오늘의 교회와 교인들을 향해서 꾸짖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교회가 세상의 물질 만능주의에 물들어 제어 장치 없이 세속화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책망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교회의 직분을 거룩한 직분으로 생각하기보다 개인의 명예 정도로 생각하는 교회의 직분 자들을 향한 꾸짖는 음성으로 들립니다. 신앙의 순수성 보다 신앙의 편리함을 쫓는 교인들을 향한 탄식으로 들립니다. 교회는 세상의 욕망과 명예가 지배하는 시장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함이 지배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행한 기적이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첫 번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변화하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변화는 다른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전을 정화 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만드시는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성전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궁정을 변화시키면서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거하는 총독부로 가서 그곳을 정화시킴으로 변화를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정화의 대상으로 가장 먼저 선택하신 곳은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하며 제사를 통해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거룩한 성전을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곳으로 변질 시켰습니다. 제사의 편리함을 주장하며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를 소홀히 여겼습니다. 거룩한 성전을 인간의 욕망이 꿈틀거리는 시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성전을 정화시키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성전이 성전 되지 못하는 가운데 궁정을 향해 궁정이 되기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리면서 세상을 향해 변화를 외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해 변화를 말하면 세상은 교회를 향해 ‘너나 잘하라’고 비웃습니다. 

오늘의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히브리어에서 ‘거룩’과 ‘창녀’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함은 세속과 구별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면 도리어 더 추해 보이는 것입니다. 거룩의 속성을 잃으면 창녀와 같이 추해 보인다는 깊은 의미가 히브리어 안에 담겨 있습니다. 교회와 목회자와 교회 직분자들과 성도들이 타락하면 더 추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볼 때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지는데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가 소홀해지는 교회는 교회다워질 수 없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는 교회의 직분 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신실한 직분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는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의 현장이 소홀해지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자신의 인기나, 명예나, 부를 구하는 시장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은 공동체인 교회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성전인 우리의 몸이 인간의 욕망으로 꿈틀거리는 시장터로 변질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우리가 하나님의 영과 말씀이 지배하는 거룩한 성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속에 거하고 있는 시장의 속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들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과 환경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인 내가 말씀 안에서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 변화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질 것을 믿습니다. 그 변화를 우리 모두 함께 만들어 갑시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시키는 가운데 분노를 표현하십니다. 저는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거룩한 분노를 표현하시는 모습을 통해 한 가지 삶의 지혜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상인들을 쫓아내시기 위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분노를 표현하시기 전에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었다는 점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의 타락을 보시고 분노하셨는데 마음만 먹으면 그곳에 있는 지팡이를 들고 장사치들을 쫓아내며 환전소를 엎어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거칠고 험악한 욕을 하며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며 분노를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를 순간적으로 그대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휘두르시며 성전을 정화시키기 전에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는 과정을 가지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모습에서 당신의 분노를 점검하시고 조절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시키는 과정에서 보여 주신 분노가 매우 절제되고, 정리된 분노라는 것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15,16절을 한 번 읽어봅시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여기서 한 가지 주의 깊게 볼 장면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과 환전상 있었다고 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소와 양을 파는 사람들을 채찍으로 내쫓으시고 환전상의 돈을 쏟으신 후에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에게는 새 장을 뒤집어엎지 않고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런 구분이 일어났을까요? 소와 양은 내쫓아도 그게 어디로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돈을 쏟아 버리셨지만 역시 도로 주워가면 됩니다. 

그런데 비둘기를 날려 버리면 비둘기는 하늘로 날아 가 버려 비둘기 주인이 손해를 입게 됩니다. 장사하는 짓이 나쁜 것이지만 그들에게 손해는 안 입히려고 하셨던 겁니다. 화를 내셔도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마구 뒤엎는 모습이 아니라 분별력을 잃지 않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입니다. 분노를 표현해 당신의 생각과 뜻을 상대방에게 다 전달하면서도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들이 화를 낼 때와 너무 다르지요? 우리는 화를 내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火) 즉 ‘불’이 화산처럼 폭발합니다. 우리들은 분노가 일어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표현합니다. 험악한 상황에서는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휘두릅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친 표현들을 쏟아 냅니다. 나중에 후회를 하더라도 순간적인 분노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거칠게 표현합니다. 

분노는 ‘순간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분노의 순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집니다. 분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분노의 감정이 순간적으로 일어날 때 최소한 숫자를 셋에서 열 정도까지 세라고 말합니다. 그 시간이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분노의 감정이 30% 이상이 줄어든다고 말합니다. 경험해보십시오. 

저의 경우는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면 호흡을 길게 몇 번 쉽니다. 그리고 속으로 ‘하나님 제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그 시간이 짧은 시간이지만 분노의 감정이 크게 누그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더 바람직한 방법은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그 순간을 잘 다스리고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분노하게 되었던 이유를 정리된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성숙한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분노가 일어나는 순간이 오면 분노의 감정 앞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며 당신의 분노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정신과 말씀으로 분노를 정리하시는 예수님의 지혜를 배워 우리의 삶의 자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 나가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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