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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장례식 (요 19: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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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장례식 (요 19: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요 19:38-42)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본문의 주제는 예수님의 장례식입니다. 이 말씀 안에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장례식을 거행한 두 인물입니다. 둘째는 예수님 장례식이 어떤 식으로 거행되었는지 하는 점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장례식을 거행한 두 인물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오후 세시가 지나서 시신을 인도받아 해지기 전에 매장을 끝냈습니다.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집행할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습니다. 더구나 사형당한 죄수를 장사지내 줄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사형수들의 시신을 까마귀 밥이 되게 내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형을 저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의 시신은 대개 저주받은 땅, 힌놈의 골짜기에 갖다 버렸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홀연히 등장하여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이란 뜻입니다. 아리마대는 구약 시대 사무엘의 고향인 에브라임 땅 라마다임입니다. 요셉은 부자였습니다. 또한 공회원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는 선한 사람으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예수를 정죄하는 공회 결의에 가담치 않았고, 자신을 주님의 제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믿음을 숨기고 있었습니다.(마27:57-60, 막15:42-46, 눅23:50-53, 요19:38-42) 또 다른 인물은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에 대한 기록은 요한복음에만 나타납니다.

첫 번째 기록은 3:1-15에 나타납니다. 그는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두 번째 기록은 7:50-52절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정죄하고자 할 때에,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고 경고함으로써 동료들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세 번째 장면은 바로 오늘 읽어드린 말씀입니다. 그는 아리마대 요셉을 도와서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들의 공개적 등장입니다. 요즘 사람들 말로 하면 coming out입니다. 뭔가 감췄던 것을 드러낼 때 커밍아웃을 했다고 합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제자로서 은밀히 교제를 하고 있었지만, 예수 믿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숨기고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38)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신앙을 숨긴 이유는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박해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바로 그날 아침까지도 예루살렘에는 예수를 죽이라고 외쳐대는 사람들로 가득했었습니다. 그 증오심은 언제나 폭발할 수 있었습니다.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지라도 출교를 당하거나 심한 모욕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출교를 당한다면 유대 사회에서는 매장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기득권 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요셉이나 니고데모는 예루살렘에서 몇 명 안 되는 고위층 人士들입니다. 많은 이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자였습니다. 신앙 문제로 말미암아 재산상의 손해를 당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공회원들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신분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한 순간에 잃게 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나타날 변화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내면적으로는 가치관의 변화를 겪습니다. 현세 중심에서 내세를 바라보게 됩니다. 돈 중심에서 생명 중심으로 바뀝니다. 육신에서 영혼으로,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변화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외형적인 삶에도 많은 변화가 옵니다. 취미가 달라집니다.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달라집니다. 언행이 달라집니다. 가정생활, 직장 생활, 사회생활, 모든 생활 태도가 달라져요. 이러한 변화를 남에게 드러낸다면 우리는 놀림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친한 친구들에게 이런 놀림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너도 신자가 됐느냐?” “너도 누군가 의지해야만 되는 약한 인간이 됐느냐?” 이런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나, 혹은 나의 변화를 남들이 아는 것이 싫어서 사람들은 자기 믿음을 숨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숨어서 믿던 요셉과 니고데모가 갑자기 신앙을 노출시켰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찾아가서 시신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38) 베드로도 요한도 감히 나서서 요구하지 못했던 것을 이들이 요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도 두려워 않고, 모든 기득권을 잃어버리는 것도 두려워 않고, 자기에게 일어날 급격한 변화도 두려워 않았습니다. 갑자기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오!” 하고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변화가 나타났을까요?  
  
갑자기 신앙을 공개한 이유가 뭘까요? 아마 그동안 예수님을 관찰하고 죽으시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결과일 겁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눈을 떴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대낮에 온 세상이 캄캄해졌습니다.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찢어져서 지성소가 드러났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무덤들 가운데 상당수가 열려서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니고데모와 요셉도 이러한 현상들에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일찍이 니고데모는 한 밤중에 주님을 찾아 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니고데모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비록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유대 사회에서 성공적인 인물이었지만 천국에 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세에 대한 확신 없는 삶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찾아 와서 정중히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알아듣지 못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3,5,13-15) 

거듭난다는 말이 무엇인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란 누구인가? 인자가 장대에 들린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됐습니다. 예수가 구주이심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공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떤 박해나, 손해나, 변화가 일어날지라도,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 그 어느 손실도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을 잃는 것보다는 더 큰 손실이 될 수 없다! 확신이 섰습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을 위해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시신이나마 정중히 장사지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장례식을 거행했습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십자가 앞에서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coming out 했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십자가 앞에서 신앙 본색을 드러내야 합니다. 숨어서 믿는 신앙으로는 아무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숨어서 믿는 신앙으로는 남에게 유익을 줄 수도 없습니다. 남을 구원하지 못하고, 감화시키지 못합니다. 숨은 믿음으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작은 일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신앙 본색을 드러내야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이 그 날입니다. 이제 숨은 신앙에서 공개된 신앙으로, 마음의 신앙에서 행동하는 신앙으로 나오세요.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누구든지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어떤 나약한 신자라도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강력한 믿음이 생깁니다. 고난 받으십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실패하셨습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거기에는 우리를 위해서 담대히 매달리신 주님이 계십니다. 

죄가 무겁습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주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계십니다. 죽음이 두렵습니까? 십자가를 보세요. 거기에는 주님이 우리를 살리려고 매달려 계십니다. 십자가를 보세요!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만사를 해결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영생도, 지혜도, 능력도, 사랑도, 소망도, 용기도, 결단도, 인내도, 관용도. 십자가를 바라보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신앙을 표출시켰던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공개된 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장례의 중요성

이제, 예수님 장례 얘기를 해 봅시다. 우선, 주님의 장례식이 어떤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는지부터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장례 절차는 비록 간소했을지라도 장례식만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집니다.
  
첫째로, 죽음에 대한 최종 확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장사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을 겁니다. 시신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가시관에 찔린 자국, 창에 찔려 파열된 심장, 흘러내린 핏자국, 못 박혀 찢어진 손과 발. 누가 보아도 살았다고 주장할 수 없는 주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무덤에 장사하지 않는다면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이 부활하신 게 아니라 기절했다가 깨어났다는 사람들이 상당 수 있습니다. 요셉과 니고데모는 주님의 시신을 무덤에 넣고 무거운 돌을 굴려서 입구를 막았습니다. 유대인 당국자들은 시신을 도난당할까봐 무덤을 봉인하고 군병으로 지키게 했습니다. 평소 주님 말씀에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장례로써 부활에 대한 의심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죽음,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둘째로, 무덤은 낮아지심의 종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 보좌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주님의 지상 생애는 낮아짐의 연속입니다. 주님은 마구간에서 이생을 시작하셨습니다. 거기서부터 끝없이 낮아지기만 하셨습니다. 주님의 생애를 섬김의 생애라고 합니다. 주님은 끝없이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남에게 섬김을 제대로 받으신 적이 없습니다. 탄생 시에 천사들의 인도를 받고 찾아 와서 경배했던 동방 박사들이나 목자들, 그리고 일부의 선지자들 외에는 누구도 예수님께 합당한 경배들 한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은 종처럼 사셨습니다. 그것도 주로 비천한 사람들의 종입니다. 주로 병들고, 귀신들리고, 가난하고, 천대 받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셨습니다. 생애의 마지막에는 체포 구금당하고, 매 맞고 조롱당하는 수모까지 당하셨습니다. 잔인한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가 종점이 아닙니다. 아직도 더 낮아져야만 되셨습니다. 그 종점이 바로 무덤입니다. 

무덤은 예수님 비하의 종점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인생의 맨 밑바닥입니다. 주님은 거기까지 내려가도록 준비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언한바 있습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사53:9)  
  
주님의 죽음은 예수님 죽음에 대한 최종 확인입니다. 동시에 낮아지심의 종점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예언된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장례식 역시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진정한 메시아였음을 입증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고전15:3)    


예수님 장례식이 주는 교훈

첫째로, 육체의 소중한 가치입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은 짧지만 정중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39-40) 

주님의 장례는 존귀한 사람들에 의해서 거행됐습니다. 공회원 니고데모와 요셉의 손으로 장사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들이었고, 예수를 구주로 믿는 신자들이었습니다. 12제자들이 도망갔지만 예수님은 훌륭한 지도자의 손으로 장사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훌륭한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입니다. 이 무덤은 자연석을 파서 만든 동굴식 무덤입니다. 

당시에 이런 무덤은 매우 귀했습니다. 예루살렘 근방을 통틀어서 500개 미만이었다고 합니다. 인구 40만의 도시에 1000년의 역사를 지녔던 예루살렘입니다. 자연식의 무덤 자리는 대부분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대개의 무덤은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우리 주님은 동굴식의 좋은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더구나 무덤은 새 무덤이었습니다. 아무도 장사된 적이 없는 무덤입니다. 

주님의 시신에는 깨끗한 수의와 향수가 사용되었습니다. 세마포로 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시신에는 몰약과 침향을 섞은 향품이 100근이나 사용되었습니다. 향품은 존귀한 자의 장례식에 사용되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가말리엘의 장례식 때에 80파운드의 향품이 사용되었고, 헤롯 왕의 장례 때에는 향료를 운반하는 인부만도 500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향료를 주님의 시신에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주님 장례식의 진정한 존귀성은 이러한 외적 조건보다는 장례를 거행한 사람들의 존경심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며 존경하는 마음으로 장사를 지냈습니다.
  
만일 육체가 소중하지 않다면 그렇게 정중히 장례식을 거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티베트 사람들은 사람의 시신을 쪼개어 새 밥이 되게 합니다. 영혼이나 물질을 동일시하고, 윤회 사상을 믿기 때문입니다. 헬라인들은 영혼은 소중하고 물질은 저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 시대 당시 어떤 이단자들은 예수님이 진짜 몸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가짜 몸을 가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잠시 육체를 빌렸지만 물질적인 몸은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경고했습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요일 4:2-3) 

육체는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육체와 영혼으로 지으셨습니다. 몸은 영혼을 담은 그릇입니다. 아주 소중합니다. 켤코 동물의 몸과 같은 등급으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영생은 영혼만 영생하는 게 아니라, 육체도 영생 합니다. 우리 몸은 부활할 몸입니다. 소멸되어 사라지는 몸이 아닙니다. 새로운 몸으로 다시 되돌려 받을 몸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몸은 신령한 몸, 부패하지 않는 몸, 강한 몸, 영광스러운 몸입니다.(고전15:42-44) 이 몸을 소망 삼고 몸을 정중히 반납하는 것이 바로 장례식입니다.  
  
둘째로, 주님은 임시로 매장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41-42) 

남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돈으로 산 매장지가 아닙니다. 남의 무덤입니다. 주님은 생전에도 자기 거처를 가지지 않으시고 남의 거처에 거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히 살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돌아가신 후에도 자기 무덤을 차지하지 않으시고 남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영구한 무덤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사흘 후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묘지 문제가 심각합니다. 죽는 사람은 많고 묻힐 땅은 없습니다. 이제 서울 사람들이 죽으면 묻힐 땅이 없어서 지방으로 내려갑니다. 세상에서 모든 땅은 수시로 용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덤의 용도만은 좀처럼 바뀌지 않습니다. 천 년이 지나도 무덤은 무덤입니다. 그러니 이 좁은 국토에서 4천만 명을 장구히 모셔둘 땅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무덤 문화는 너무 거창합니다. 상당 부분은 허례와 허식입니다. 산 사람도 거처가 없는데 죽은 사람 거처가 너무 큽니다.  
  
우리가 죽어서 땅에 묻히는 것은 임시적인 일입니다. 영원히 묻힐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시 살아납니다. 소망을 가지고 묻어야 합니다. 주님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열고 나오셨습니다.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십니다. 이 세상에 죽었다가 영생의 몸으로 다시 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우리처럼 죽어 땅에 묻히는 인생들을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예수 안에서 다 부활할 날이 있습니다. 믿으십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5-26)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29) 

사도 바울은 온갖 박해 속에서도 부활을 인생 최대의 소망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 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 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1-58)
  
여러분, 무덤에 신경 쓰지 마세요! 연세 많으신 분들 특히 무덤에 신경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까짓 무덤이나 크게 차고 누워 있으면 뭣합니까? 잠시 누웠다가 주님이 오시면 다 털고 일어날 텐데, 무덤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우리 몸은 땅에 묻히면 곧 썩습니다. 불에 태워지든, 흙 속에서 썩어지든, 전쟁터에서 산화되든. 우리 몸은 수년 내로 없어집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무덤이 아닙니다. 다시 사는 신령한 몸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신령한 몸을 다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임시 거처인 무덤에 신경 쓰지 마세요. 오직 부활의 몸을 바라보며, 내가 가지고 있는 영생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죽는 것 두려워 마세요. 주님은 무덤에 사흘밖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무덤에 그리 오래 있지 않을 겁니다. 부활 소망으로 잠드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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