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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골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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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골 1:9-20)


[그러므로 우리가 여러분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우리도 여러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여러분이 빛 속에서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교회라는 몸의 머리이십니다. 그는 근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이는 그분이 만물 가운데서 으뜸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 갑을관계 사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동안에도 참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지난 한 주 동안 뉴스를 장식한 핵심어는 ‘갑을甲乙 관계’, ‘성추행’ 등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통령을 수행했던 한 고위 공직자가 젊은 인턴에게 한 파렴치한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폭력입니다. 젊은 대기업 영업사원이 나이 많은 대리점 주인에게 가한 폭언과 협박이 공개되면서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비행기 승무원을 괴롭힌 이른바 ‘라면 상무’, 호텔 주차관리원을 장지갑으로 폭행한 ‘빵 사장’…. 이것은 모두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증대했지만, 정신은 성장하지 못한 천민자본주의 사회의 단면들입니다. 

사람들은 일쑤 돈의 많고 적음, 지위의 높고 낮음을 한 사람의 존재의 무게로 치환하곤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쓰곤 하는 ‘갑을 관계’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함의를 갖는 말인지 새삼 절감하게 되는 나날입니다. 일부 기업들은 발 빠르게 계약서에 갑을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그 불평등한 구조가 바뀌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일 뿐입니다.

사람을 고귀한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사회는 몰락의 벼랑 끝에 선 위험 사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에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모독당하는 것은 곧 그를 지으신 하나님도 모독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 곧 ‘욕망 충족’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소비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소비사회는 모든 사람을 구매력에 따라 평가합니다. 구매력이 없는 사람은 하찮게 여겨집니다. 없어도 그만인 잉여인간으로 취급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단호히 이러한 풍조에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타신 배가 파선의 위협에 직면했던 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배를 타고 맞은 편 마을로 가고 있을 때 주님은 고단하셨던지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바람과 풍랑이 일어나 배를 덮쳤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잠들어 계시던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주님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고는, 바다를 향해 ‘고요하고 잠잠하라’ 하고 명령하시자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잠잠해졌습니다. 놀라운 자연 이적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바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네모스’(anemos)는 ‘풍조風潮’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복음사가는 갈릴리 호수에서 제자들이 경험했던 이 사건을 통해, 당시의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위기가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제시하려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위태롭게 했던 ‘바람’ 혹은 ‘풍조’는 외부의 박해일 수도 있고, 교회 내에 스며든 세속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풍조에 맞설 수 있는 내적 든든함이 없었기에 교회는 파선의 위험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람을 잠잠하게 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지금의 우리도 그런 꾸짖음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교회라는 배도 소비주의의 ‘풍조’에 밀려 좌초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갑을 관계’라는 말로 상징되는 이 시대의 풍조에 맞서는 영적 능력이 우리에게 너무 부족합니다.

• 우리가 구해야 할 것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한 생을 통해 꼭 붙들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아름다운 시적 언어를 통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바울(‣후기 바울 서신이지만 편의상 바울이라 칭함)은 먼저 에바브라를 통해 전해진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돌아온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과 헌신적인 사랑을 감사함으로 기억한다고 말한 후, 그들을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이끌기 위해 권고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들은 그 날부터 그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기도는 영적 무력증에 사로잡힌 우리들의 기도여야 합니다. 

사도는 먼저 성도들이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영적 분별력을 달라는 기원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수없이 많은 선택의 갈림길을 만납니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다른 것을 배제한다는 뜻이기에 선택은 늘 어렵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의 선택의 폭은 좀 한정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나 좋을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은 늘 하나님의 신령과 지혜와 총명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 가운데 임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처한 상황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상황을 이해하면 해야 할 일이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밝게 비출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신자들이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일에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야말로 믿는 이들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이웃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서,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롬15:1a-2)

주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덕을 세워줄 때 기뻐하십니다. ‘갑을 관계’에 따라 사는 데 익숙한 사람들, 특히 ‘갑’의 자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들은 이런 삶으로부터 멀어진 이들입니다. 믿는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보냄을 받은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여받은 역할이 ‘갑’이라 해도 ‘을’을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자리에 자꾸 서 보려 노력해야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태도가 몸에 밸 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인식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머리나 종교 의례를 통해서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통해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며 살아갈 때 우리 속에는 어떤 성채와도 같은 든든함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기쁨으로 인내하게 됩니다. 그는 삶의 뿌리를 하나님 나라에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은 쓰기는 하지만 우리를 좌절시킬 수는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인내를 통해 더 맑고 웅숭깊은 품성을 갖추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다는 기쁨이 어찌나 큰지, 주님의 일을 위해 겪는 어떤 어려움도 그분의 사랑에서 자신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도 같은 진실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분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지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주셨습니다. 아들의 나라에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15절부터 20절까지 그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 제국에 대한 저항

본문은 아들 곧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15)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관념적으로는 이해하기 참 어려운 말입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in), 그분으로 말미암아(through), 그분을 위하여(for) 창조되었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심오한 말인 것 같긴 한데 그 뜻은 알쏭달쏭합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드러납니다. 신약성서가 기록될 당시 로마 제국은 식민지 백성들에게 가이사 숭배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가이사 곧 로마 황제가 신적 기원을 갖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신화화 작업이 벌어진 겁니다. 식민지 곳곳에 가이사의 동상과 그를 상징하는 동상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가이사에게 놀라운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만물의 기원과 동등한 존재’, ‘생명과 생기의 기원’, ‘전쟁을 끝내고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한 구세주’, ‘평화의 왕’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서는 가이사에게 적용되었던 그 용어들을 예수님에게 과감하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체제에 대한 반역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도 말합니다(16). 이 말 속에 담긴 속뜻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로마 제국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제국 너머에 더 큰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는 그 말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말입니다. 암흑의 권세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은인으로 행세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가혹하게 대합니다. ‘자른다’, ‘계약을 해지한다’, ‘구속한다’고 말하며 굴복을 강요하고, 약자들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약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굴욕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게 옛 세계의 풍경입니다. 하지만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기독교인들은 이런 세상에 저항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우리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믿기에 비인간이 되기를 강요하는 세상을 향해 당당한 음성으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구원받은 이의 새 삶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작고한 신학자 랭돈 길키가 일본군에 의해 중국의 한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2년 반 동안의 경험을 <산둥 수용소>라는 책으로 엮어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저자는 라인홀드 니버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내면의 우상숭배(즉 자기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그룹을 숭배하는 것)가 사회적 결과로 드러난 것이다."(랭돈 길키, <산둥 수용소>, 새물결플러스, 2013, 432쪽)

다른 이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우상숭배의 결과라는 말에 저는 크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믿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랭돈 길키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삶, 곧 구원받은 이의 삶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구원은 영혼의 내적인 평안이고, 다른 사람과 건강하고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며, 주위 세상과 이웃을 향한 창조적인 관심으로 정의될 수 있다."(앞의 책, 436쪽)

우리는 이런 구원을 받은 사람 맞습니까? 다른 이들과 건강하고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를 이해하고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이 망가지고, 이웃이 고통당하고 있는 데도 나와 무관한 것처럼 여기며 산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은 삶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아주 경건해 보이는 데, 공적인 영역에서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탄은 그런 이들을 누구보다도 좋아합니다.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평화를 누리라고, 또 그 평화를 만들라고 초대받은 존재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인간의 과도한 욕망으로 인해 망가진 인간관계와 역사와 자연 세계를 고치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진정 그분의 나라에 속해 있다면 우리도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활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우리 모두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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