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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아버지 (시 10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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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아버지 (시 103:8-15)
 
어머니, 아버지만큼 사랑이 담긴 이름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셨을까요? 하나님의 많은 이름들 중에서 예수님은 아빠, 아버지라는 이름을 가장 선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너희도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신뢰와 사랑이 담긴 이름, ‘아빠, 아버지’로 하나님을 부르고 대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많은 사역들 중에 가장 큰 사역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로마서 8:14∼16)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까? 이 호칭은 친근성의 표현이고, 신뢰와 사랑이 담긴 언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확인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 아빠’라고 많이 불러보고 싶었지만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제게 아버지로 다가오시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지금도 길을 걷거나 드라이브를 하다가도 기도 제목이 생각나면, “아빠, 아버지!” 하고 하나님을 부르곤 합니다. 그러면서 종종 생각합니다. 만약 실제로 내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지금도 여전히 ‘아빠!’라고 부르며 사랑의 대화를 나누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요즘은 주위를 둘러보면 곳곳에서 아우성이 들려옵니다. 부모와 자녀들이 서로 소통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원하는 것은, 독자성을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빠, 엄마! 내 독자성 좀 인정해 주세요. 내 꿈과 비전은 엄마, 아빠의 것과 달라요. 부모님이 원하는 것과 다르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말씀하지 마세요.” 이런 마음으로부터의 항의가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감정에 대한 인정을 원합니다. “나만의 감정과 느낌이 있다고요. 내 감정 표현이 엄마 아빠 보시기에 지나치더라도 절제하라고 자꾸 말씀하지 마세요. 내 모습 그대로 좀 받아주시면 안되겠어요?” 또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나예요. 나는 엄마, 아빠가 아니에요. 나를 엄마, 아빠의 복사본으로 만들지 마세요. 내게는 내 인생의 길이 있잖아요. 나를 믿어주시고, 바라봐 주시면 안 되겠어요?” 

하지만 부모의 감정과 생각은 다릅니다. “얘야, 나도 너만 할 때는 너처럼 생각해서 늘 부모님에게 항의했단다. 그러다가 기회를 잃었지. 공부할 기회를 잃었고, 훈련받을 기회를 잃었고, 준비할 기회를 놓쳤단다. 얘야, 나를 그대로 닮으라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네 적성과 성품을 보니, 이런 길을 가면 네가 성공할 것 같아서 이야기하는 거란다. 그리고 한 가지는 기억해라. 네가 온전히 성숙하기 전까지는 부모의 말에 경청하고, 그것에 순종할 수는 없겠니?” 

만약 부모와 자녀가 이 정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그 가정은 괜찮은 가정입니다. 문제가 있어도, 때로 서로가 티격태격해도 자녀는 부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부모는 자녀의 말을 경청할 수 있다면 괜찮은 가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헌신과 사랑을 자주 잊습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오늘은 몇 가지 우리 어머니들, 우리 아버지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볼까 합니다. 

이어령은 ‘느껴야 움직인다’는 글에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치매기가 있는 백발노인이 아들에게 묻습니다. 
“얘야, 저 새가 무슨 새냐?” 아들이 대답합니다. 
“까치요.” 아버지는 조금 있다가 다시 묻습니다. 
“얘야, 저 새가 무슨 새냐?” 그러자 아들은 큰 소리로 대답합니다. 
“까치라니까요!!” 그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어머니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범아, 너는 어렸을 때 저게 무슨 새냐고 백 번도 더 물었단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까치란다, 까치란다, 몇 번이고 대답하시면서 말하는 네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지. 그래서 네가 말을 배울 수 있었던 거란다.” 

우리가 어떻게 자라났는지는 잊어버리고, 부모님이 똑같은 것을 몇 번 물었다고 귀찮아하고, 그런 부모님을 떨쳐 내려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신경숙은 ‘모르는 사람에게 쓰는 편지’라는 글에서, 브레히트의 시 ‘나의 어머니’를 읽고 불현듯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먼저 브레히트의 시를 소개하겠습니다. 시 속에서 표현된 그녀는 어머니입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땅 속에 묻었다. 
꽃이 자라고 나비가 그 위로 날아간다. 
체중이 가벼운 그녀는 땅을 거의 누르지도 않았다. 
그녀가 이처럼 가볍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까.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신경숙의 글입니다. 

“브레히트라는 시인의 ‘나의 어머니’라는 시입니다. (중략) 
시를 읽는 사이 아주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사춘기 시절을 어머니 곁을 떠나 도시로 나왔지요. 어머니 곁을 떠나온 후 나는 틈만 나면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갔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갖고 싶어서 다시 도시로 돌아올 때에는 늘 밤기차를 탔지요. 시간도 정확히 기억합니다. 11시 57분 상행선 열차였지요. 어머니는 항상 역까지 나와 나를 배웅하셨습니다. 나는 그걸 당연히 여겼어요. (중략) 

나를 태운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출발하면 어둠 속 플랫폼에 홀로 남아있던 어머니의 모습이요. 나는 고개를 뒤로 하고 플랫폼에 남아있는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곤 했죠. 어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요. 오늘 아침 브레히트의 이 시를 읽기 전까지 나의 기억은 여기까지였어요. 내 기억은 항상 거기까지였어요. 그런데 시를 읽는 동안 그때 기차가 떠난 자리에 남아있던 어머니는 어떻게 집에 돌아가셨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나더군요. 거의 삼십 년 만에요. 

내가 태어난 마을은 기차역에서 십리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버스가 하루에 서너 번 다니다가 어두워지면 그마저 끊기던 곳이었지요. 나를 태운 기차가 떠난 후 자정이 다 지난 그 시간에 어머니는 혼자서 역을 빠져나가 그 산길과 논길을 걸어서 집에 가셨던 것일까? 삼십 년이 다 지나 나에게 찾아온 그 질문은 벼락같은 것이었지요. 어머니는 정녕 그 어둠속을 홀로 가신 것일까? 그 때의 젊은 어머니는 그 밤길을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가셨을까요. 집에 도착했을 때쯤 아마도 어머니의 신발은 밤이슬로 축축이 젖어 있었을 테지요. (중략) 그 때마다 어머니가 홀로 걸어가야 했을 그 밤길을 어떻게 이제야 생각할 수 있는 것인지.. 내가 미워졌습니다.” 

우리는 늘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헌신하고, 모든 수고를 해야 된다고 말입니다. 아버지는 무조건 내 편이 되어서, 나를 위해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픔과 슬픔을 이해하는 데 역부족이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 땅의 모두에게 영원한 이름입니다. 

짧은 글 하나를 더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머니의 말씀’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떠도는 작자미상의 글입니다. 

아들아! 
결혼할 때 부모 모시겠다는 여자 택하지 마라. 
너는 엄마랑 살고 싶겠지만 
엄마는 이제 너를 벗어나 
엄마가 아닌 인간으로 살고 싶단다. 
엄마한테 효도하는 며느리를 원하지 마라. 
네 효도는 너 잘사는 걸로 족하거늘... 

네 아내가 엄마 흉을 보면 
네가 속상한 거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걸 엄마한테 옮기지 마라. 
엄마도 사람인데 알면 기분 좋겠느냐. 
모르는 게 약이란 걸 백 번 곱씹고 
엄마한테 옮기지 마라. 

내 사랑하는 아들아! 
혹시 어미가 가난하고 약해지거든 조금은 보태주거라. 
널 위해 평생 바친 엄마이지 않느냐. 
그것은 아들의 도리가 아니라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느냐. 
독거노인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미가 가난하고 약해지는데 자식인 네가 돌보지 않는다면 
어미는 얼마나 서럽겠느냐. 
널 위해 희생했다 생각지는 않지만 
내가 자식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이 들지 않겠니? 

아들아! 
명절이나 어미 애비 생일은 좀 챙겨주면 안되겠니? 
네 생일 여태까지 한 번도 잊은 적 없이 
그날 되면 배 아파 낳은 그대로 
그 때 그 느낌 그대로 꿈엔들 잊은 적 없는데 
네 아내에게 떠밀지 말고 네가 챙겨주면 안되겠니? 
받고 싶은 욕심이 아니라 
잊혀지고 싶지 않은 어미의 욕심이란다.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름만 불러도 눈물 아릿한 아들아! 
네 아내가 이 어미에게 효도하길 바란다면 
네가 먼저 네 장모에게 잘하려무나. 
네가 고른 아내라면 
너의 고마움을 알고 내게도 잘하지 않겠니? 
난 내 아들의 안목을 믿는다. 

그러나 아들아! 
네가 가정을 이룬 후 어미 애비를 이용하지는 말아다오. 
평생 너희 행복을 위해 애써 온 부모다. 
이제는 어미 애비가 좀 편안히 살아도 되지 않겠니? 
너희 힘든 건 너희들이 알아서 살아다오. 
늙은 어미 애비 이제 좀 쉬면서 삶을 마감하게 해다오. 

아들아! 
우리가 원하는 건 너희들의 행복이란다. 
그러나 너희도 
늙은 어미 애비의 행복을 침해하지 말아다오. 
손자 길러 달라는 말 하지 마라. 
너보다 더 귀하고 예쁜 손자지만 
매일 보고 싶은 손자들이지만 
늙어가는 나는 내 인생도 중요하더구나. 
강요하거나 은근히 말하지 마라. 
날 나쁜 시어미로 몰지 마라. 

내가 널 온전히 길러 목숨마저 아깝지 않듯이 
너도 네 자식 온전히 길러 사랑을 느끼거라. 
아들아 사랑한다.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그러나 목숨을 바치지 않을 정도에서는 
내 인생도 중요하구나. 

어머니들 공감이 되십니까? 우리는 그동안 “아들아, 딸아, 그냥 이 어미에게 네 힘든 것 모두 갖다 안겨라.” 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어머니는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되는 운명이라고 여겼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어머니, 아버지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영원한 이름입니다. 소중한 이름입니다. 부르기만 해도 금세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나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에 담긴 사랑과 헌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부모의 마음으로 표현합니다. 

시편 103편 13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런데 종종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꺼려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않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 생각만 하면 싫습니다. 아버지 얼굴만 떠올리면 미움이 생깁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던 아버지, 내 손 한 번 잡아주지 않았던 아버지, 나를 훈육한다며 손찌검하고, 매질하던 아버지, 정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아버지...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말, 아버지의 버릇, 아버지의 허세 모두 절대로 닮지 않겠다고 선언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아버지가 되고, 자식들을 키우면서 자신에게서 아버지의 말투, 아버지의 버릇, 아버지의 행동, 아버지의 성격을 보게 됩니다. 자신 안에 아버지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내 아들과 딸에게 하듯 나에게 표현하지 못했고, 나를 감싸 안지는 못했지만 내가 내 자녀들에게 그러하듯 나를 사랑하셨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시편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1절에서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다고 선포합니다. 

또한 12절에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를 멀리 옮기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한 못된 행동대로 나를 징계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리 망나니같이 살았어도 아버지 앞에 와서 “아버지, 내가 왔어요.”하면 아무 말 하지 않고 껴안아 주시는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13절에 기록된 것처럼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기듯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에게는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곳곳에 계시기 위해서 어머니를 만드셨고, 아버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부모들에게 “내 사랑으로 네 아들과 네 딸을 사랑해라. 내가 용서하는 것처럼 네 아들과 딸을 용서함으로 키워라. 아버지와 어머니된 너희들 속에 내 얼굴이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의 얼굴 속에, 우리 아버지의 얼굴 속에 하나님의 얼굴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소중한 분들입니다. 두 분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분들이 바로 아버지, 어머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부양을 확신하지만, 막상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면 ‘더 효도할 걸. 부모님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해드릴 걸...’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지금 부모님이 살아계십니까? 그렇다면, “아버지, 저하고 점심식사 하실래요? 그냥 아버지 얼굴 보고 싶어서요.”라고 아버지에게 먼저 초청장을 내미세요. “엄마, 엄마 좋아하는 것 사드릴 테니 시간 한 번 내서 만날래요?”하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초청하세요. 그리고 지금껏 살면서 무엇이 가장 좋았는지, 어떤 일이 제일 기뻤는지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부모님께서 당신들의 기쁨과 슬픔을 이야기해 주실 것입니다. 

탄줘잉이 쓴 ‘살아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라는 책에서는 ‘집에 가서 살아계신 어머니, 아버지의 발을 한 번 씻겨드려라.’라는 항목이 네 번째 리스트에 올라 있습니다. 

여러분은 살아계신 부모님 발을 씻겨 드릴 용기가 있으신가요? 한 번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발을 씻기면서, 어머니의 발이 이렇게 거칠어졌구나, 아버지의 발이 이렇게 험하게 되었구나 느껴보고,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사랑의 마음도 나누고, 사랑의 고백도 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넓은 가슴으로 작아진 어머니와 아버지를 한 번 껴안아 보세요. 그러면서 “엄마, 아빠가 제 엄마, 아빠이신 것이 자랑스러워요. 감사해요, 고마워요.”라고 이야기하면 지금까지 막혀있던 모든 담들이 허물어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역사가 우리 가정 속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어머니의 얼굴 속에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 속에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에게 생명과 사랑을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그 귀한 부모님을 세워드리는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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