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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가문에 없던 이름 (눅 1:5-25, 5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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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에 없던 이름 (눅 1:5-25, 57-66)

자식이 부모의 뒤를 이어주는 것처럼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대를 잇는 것만이 아니고 부모의 정신 · 가치관 · 가업을 이어주기를 대부분의 부모는 바랍니다. 

영화 <친구>를 보면 선생님이 수업 중에 물어보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뭐하시노? 아버지 뭐하시노?’ 동수라는 학생이 대답합니다. ‘장의사를 하십니다.’ 동수가 삐뚤어지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자기 아버지처럼 장의사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노여워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너보고 장의사가 되라고 했느냐? 네가 뭔데 아버지가 일평생 하던 일을 무시하느냐?’ 아버지의 깊은 섭섭함이 담겨져 있는 말입니다. 

반대로 영화 <대부 1편>을 보면 막내아들 알 파치노가 아버지 병원에 문안을 갔다가 아버지가 라이벌 갱에 의해 위험에 처해있는 것을 발견하고 재빨리 아버지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염려 마세요. 제가 함께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아버지를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아버지는 총을 여러 방 맞아서 중태에 있고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 아들의 말을 듣고 너무 좋아서 눈 가장자리에 눈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입니다. 정말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 영화를 다시 보셔야 됩니다. 사실 그 아버지는 막내아들만큼은 마피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정당한 직업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판사라든가 주지사라든가 상원의원이라든가. 그러나 가문의 위기 때문에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마피아 보스가 된다는 줄거리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자식을 하나 내지는 둘만 낳고 자식에게 올인을 하다보니까 자식이 아버지의 복사본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 대통령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고 그것을 국민들이 흐뭇하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뭔가 운명론적인 느낌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또 연예인이든, 운동선수든 부모의 후광을 입고 같은 분야에 진출하는 사람들이 많고 팬들이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그런 흐뭇한 감정을 자아내지 못하는 직업이 있다면 목사에요. 옛날만 해도 아들이 아버지 뒤를 이어 목사가 되는 것을 흐뭇하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교회세습 논쟁 때문에 그런 흐뭇함은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자식이 목사가 되지 않음으로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알던 친구들을 보면, 이 설교를 본인들이 들으면 언짢아할지 모르지만, 자기의 삶을 자식이 그대로 답습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자기가 다니던 학교에 자식도 다니기를 바라고 자기가 유학을 갔기 때문에 자식도 유학을 가기를 바라고 자기가 가진 직업을 자식도 갖기를 바라고 자기의 생활수준을 자식도 누려주기를 바라고 심지어 자기가 다니는 컨트리클럽에 자식도 멤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자식이 아니고 복제인간이에요. 부모의 삶을 자식이 그대로 복사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생김새만 붕어빵이 아니고 사는 방식도 붕어빵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마음속에 물어보고 싶어요. ‘자네는 자신이 그렇게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 자네가 누렸던 삶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느냐? 자식이 자네보다 더 나아야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 왜 자네와 똑같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그렇게 안간힘을 쓰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제 자신이 그렇게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제가 이제껏 걸어온 길이 최선의 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제 아이가 저처럼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더 낫기를 바랍니다. 제가 걸어온 길이 저에게는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저의 아이에게도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갈 길이 있고 자기의 운명이 있고 자기의 소명이 있습니다. 저는 그 믿음을 가지고 이제껏 살아왔고 제 아이도 그렇게 하기를 바래요. 

이것은 극심한 개인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개성대로 살면 되지 않느냐.’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제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 삶은 저 한 사람이 사는 것으로 족하고 자식이 그것을 반복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창의력, 하나님의 상상력이 역사할 기회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엄마들이 자식을 닦달하는 시대에는 어떻게 하나님의 창의력이 역사할 수 있습니까? 기도할 때는 하나님 뜻대로 해달라고 하면서 자식을 키울 때는 엄마의 뜻대로 키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실 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느지막한 나이에 아들을 낳습니다. 경사가 났습니다. 이름을 지으려고 하는데 친족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라고 짓고자 합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대답하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친족들이 말하기를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그러면서 아버지 사가랴에게 물어봅니다. 

사가랴는 지금 벙어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가랴가 서판을 달라고 해서 서판에 쓰기를 ‘그 이름은 요한이라’ 그 순간에 사가랴의 입이 열리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왜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었느냐. 하나님이 지시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에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이 요한이 바로 세례요한인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의 이름대로 작명을 하고 아버지의 가업을 승계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조지 부시의 아버지 이름도 조지 부시인 것처럼. 이름이라는 것은 그냥 사람을 부르는 이름 이외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운명, 그 사람의 사명, 역할 이런 것을 그 이름이 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죄에서 백성을 구한다는 뜻으로 예수라 하라고 천사가 명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가랴의 친척들이 아기에게 아버지의 이름대로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는데 부모가 반대했어요.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친족 중에 이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가문에 역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이 아기가 가문에 없던 이름을 가짐으로 가문에 없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라는 이름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는 길을 예비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 아기가 그저 아버지의 이름을 이어받고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이전에 알 수 없었던, 아무도 한 적이 없었던,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이 뜻하고 계획하신 일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었다고 그렇게 모태신앙을 따지고, 믿음의 유산을 강조하고, 어머니의 기도의 힘으로 자식이 주의 종이 되었다는 말하기를 좋아합니까.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었다고. 개신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12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몇 천 년이나 된 것처럼 행세를 하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기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그리고 기도도 하는 것이지, 어머니의 기도가 하나님의 섭리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리는 기도를 하지만 기도를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이 부모의 기도에 힘입어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닙니다. 

길선주 목사님이나 유관순 열사나 김익두 목사님이나 이승만 박사나 안창호 선생이나 서재필 박사나 이런 수많은 믿음의 종들이 가문의 전통에 의하여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에요. 한국교회의 성장에 모태가 된 수많은 목사님들이 모태신앙이어서 목사가 된 것이 아니에요. 부모에게 믿음을 배워서 훌륭한 목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에 의하여 그 일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믿습니까. 아니면 부모의 신앙이 무슨 적립카드와 같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또 하나의 공로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패밀리 레스토랑 같은데 가서 결제할 때 ‘적립되는 카드 있으세요?’라고 물어보면 ‘그런 것 없어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요즘처럼 바쁜 시대에 적립카드 찾아서 그런 레스토랑 찾아가고. 그러려면 아예 가지를 마세요. 저는 유명한 목사님들에게 비교할 수 없는 작은 존재지만, 모태신앙이어서 목사가 된 게 아닙니다. 저의 조상님들 중에는 목사는 물론 없고 집사도 없었어요. 교회 다니는 분들이 없었어요. 믿음의 유산을 이어 받아서 목사가 된 게 아닙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은 가문의 놀람이었어요. 물론 지금은 다들 교회를 다니시지만. 하나님의 놀라움이 이런 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기도의 힘이라든가 믿음의 유산을 과대평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부모의 믿음의 그릇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우리는 하기 좋아하는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정말로 개천에서 용이 납니다. 그 말은 가문의 유산, 가문의 전통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들을 세우신다는 얘기에요. 다윗의 가문만을 봐서는 다윗을 이해할 수 없고, 아브라함의 조상을 봐서는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고, 바울의 가문만을 봐서는 바울의 역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혈통과 가문을 볼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부르십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자식의 성적이 어머니의 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자식의 믿음이 어머니의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한, 개천에서 용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보다 더 나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우리나라와 교회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의 이름도 아니고 가문에 있던 이름도 아니고 새로운 이름을 주었다는 말은 이 가문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소명과 은사를 부여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할 수 없었던 일을 요한이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에요. 

미국을 신세계라고 불렀던 이유가 있습니다.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이 미국을 노래한 곡이었지요. 구세계는 유럽대륙을 말합니다. 유럽은 계급사회였습니다. 귀족과 평민 계급이 존재했습니다. 성직자도 계급에 속했습니다.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을 보면 귀족 자제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적색 옷을 입는 군대 장교가 되던가, 아니면 흑색 옷을 입는 성직자가 되는 것 중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대조적으로 미국은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국가였기 때문에 구세계의 계급이 더 이상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귀족과 평민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았어요. 

과거 유럽의 출신이 어떠했든 미국에 오면 누구든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누구든지 대통령이 될 수 있고 누구든지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미국의 정신이었습니다. 이것이 미국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가서 살고 싶은 나라가 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교회도 전통과 계급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목사가 될 수 있고 누구든지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설교가들이 미국에서 나왔고 유명한 교회들이 미국에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스웨덴의 유명한 설교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없기 때문에. 반대로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의 이름을 적어도 한둘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에요. 목사가 되기 위하여 전통이나 통념을 따를 필요가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따르는 것이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엄청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사람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도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 됩니다. 중국이 수천 년 동안 여자들의 발을 싸매어 놓을 때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풀어놓으니까 중국 여성이 올림픽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부여했던 족쇄를 풀어놓아야 하나님이 그 삶속에 역사하시고 그 생각 속에 역사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인간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자꾸 옛날 생각으로 사람을 묶어놓으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 이미 그 때는 지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 사가랴라는 이름을 지어주지 말고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어줘야 됩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다시 말하면 자식이 부모의 연장선이 되기를 기대하지 말고 하나님의 꿈을 꾸고 하나님의 계획을 여쭤봐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셔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사가랴가 성소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는 동안 천사가 나타나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의 간구함’이라고 말하지 않았어요.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기도가 어머니의 기도만큼 효험이 있습니다. 어미가 기도를 못하면 아비라도 기도를 해야 됩니다. 자식이 ‘아빠, 어디 가?’라고 물어보면 ‘아빠는 널 위해 기도하러 간다.’라고 대답하셔야 됩니다. 자식이 아비보다 더 위대할 수 있음을 믿어야 됩니다. 미래가 과거보다 더 나을 수 있음을 믿어야 됩니다. 이후의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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