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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과 감사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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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감사 (눅 17:11-19)

◈ 어떤 사람이 한 달 동안 아주 특별한 실험을 했습니다. 어떤 마을의 일정한 구역에 있는 모든 집 대문 앞에 매일 100달러씩 아무런 조건 없이 나누어 준 다음 그 결과를 관찰해 보는 것.

▶ 첫째 날/ 집집마다 들러서 현관에 100달러를 놓고 나오는 그를 본 사람들은 저 사람이 제 정신일까? 그 돈이 진짜일까? 궁금해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 돈을 집어갔습니다. 

▶ 둘째 날도 그랬습니다. 

▶ 셋째 날, 넷째 날이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돈을 직접 사용해 본 결과 진짜 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 동네는 날마다 100달러씩 선물로 주고 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시끄러워졌습니다. 

▶ 한 두 주정도가 지나자 동네 사람들은 현관 입구에까지 직접 나와서 돈을 나눠주는 사람을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이 이웃마을까지 전파되었습니다. 

▶ 세 주쯤 되자 마을 사람들은 그 이상한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더 이상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네 주째가 되었을 때는 매일 100달러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끼 밥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 같은 일상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 드디어 실험이 끝나는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이 날은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지 않고 그냥 그 골목을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반응들을 보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문을 거칠게 열고 현관까지 나와서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돈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왜 오늘은 내 돈 100달러를 주지 않습니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 잘 아는 이야기. 옛날 어느 마을에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우산 장사를 했고, 작은 아들은 소금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매일 두 아들 걱정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우산 장사하는 큰 아들을 걱정하고, 반대로 비가 오는 날은 소금 장사하는 작은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매일 걱정하며 마음 졸이며 세월을 보냈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 할머니는 생각을 바꾸면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날씨가 좋으면 소금 장사를 하는 둘째 아들을 생각하면서, "야! 오늘은 소금이 잘 팔리겠구나!"
반대로 비가 오는 날에는 우산 장사를 하는 큰 아들을 생각하면서, "야! 오늘은 우산이 잘 팔리겠구나!"하며 감사했더라면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하면서 즐거운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감사는 운명을 바꾸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지금 감사하는 사람이다.' 

감사는 바로 행복의 고백입니다. 아무리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만족한 줄 모르고 더 가지지 못한 것을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왔다가 불평의 문으로 나갑니다. 

◈ 한 문둥병자가 있었습니다. 요즘은 문둥병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한센병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예수 발 앞에 엎드려 사례한 것을 보면 무식하거나 비인격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이 사람도 한 때는 아름다운 인생을 꿈을 꾸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의 몸에 어느 날부터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처음에는 몸에 푸른 반점이 생겼습니다. / 피부감각이 이상해졌습니다.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 눈썹이 없어졌습니다. / 온 몸이 짓무르기 시작했습니다. / 그러나 더 큰 아픔은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몰래 약을 쓰고 온갖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조금도 낫지 않았다. 
점차 이웃 사람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사장들의 검진을 마치고 부정하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민 5: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모든 문둥병 환자와 유출병 있는 자를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되 무론 남녀하고 다 진 밖으로 내어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진 안으로 들어올 때는 돌로 쳐 죽이라고 엄명하였습니다). 
곧바로 그는 마을로부터 추방을 당했습니다. 이 때 세상의 무정함을 깨달았습니다. 
정든 고향과 처자식을 등지고 살던 마을에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좋을지 목적도 없이 가는 길/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뒤에서 우는 부모 처자식을 생각할 때/ 마음이 다 녹았을 것입니다. 
자신을 저주하며 이리 저리 방황하며 세월이 무정히 흘러갔습니다. 
때로는 원망과 서러움이 복받쳐 눈물도 흘렸을 것입니다.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옛날을 회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니다가 여러 곳에서 추방당한 문둥병자들이 한 곳에 열 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이냐 사마리아인이냐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와 갈릴리 국경에 모여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런 농담도 하였을 것입니다. 
"병 낫게 해 주는 분이 있으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아마 나와 내 처자가 평생 그 분 종 노릇을 한다고 해도 하겠네. 나도 그렇다네... 
도대체 이 병이 나을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불렀다.
11절,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이렇게 1O사람이 예수님을 부르면서 긍휼히 여겨 달라고 할 때에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 말을 믿고 출발했습니다. 많은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마을에 들어가면 돌을 맞아 죽을 수 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가다가 보니 갑자기 자기들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깨닫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서로 꼬집어보고 얼싸안고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아홉 사람은 제 갈 곳으로 뿔뿔이 달려갔습니다. 
아마도 고향이 그립고 처자가 보고 싶어서// 빨리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고 집으로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은 가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돌아왔다.

예수님은 열 사람 가운데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서 감사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놀라셨습니다. 칭찬하셨습니다. 그에게 더 큰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 우리는 본문에서 감사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여러분! 감사하는 일이 쉬울 것 같습니까? 어려울 것 같습니까? 
감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쉽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한 사람은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감사한 사람과 감사하지 못한 사람의 비율이 1:9였습니다. 그만큼 감사는 쉽지 않습니다. 

▶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타락한 모습을 
롬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디모데는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않다//고 경고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특성 가운데 분명한 한 가지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감사가 없으면 "아직 내가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거의 맞습니다. 
저주받은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아홉 사람은 타락한 성품에 짓눌려서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매일 얼마나 큰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갑니까? 
그런데 감사를 잊고서 살아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 앞을 전혀 보지 못하는 어떤 맹인은 자신의 소원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만약 내가 눈을 뜬다면 나는 제일 먼저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다. 
그리고 난 뒤에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거울을 통해서 우리의 얼굴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자연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내가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신 적이 있습니까? 
감사를 잊고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그 한 가지만 해도 감사의 조건은 충분합니다. 

▶ 우리는 타락한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더러운 옷을 벗고 의로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깨끗하게 해 주시고 의로운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마땅히 우리는 감사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 "사랑의 원자탄"으로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의 본명은 손영준 목사입니다. 

그는 여수에 있는 애양원이라는 나환자가 모인 교회에 초빙되었을 때, "나는 여기서 내 목숨을 걸고 죽도록 충성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이름도 애양원을 따서 손양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손 목사님은 그곳에서 충성했습니다. 그런데 여수 반란 사건 때 목사님은 그의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잃었습니다.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장례식 때 답사를 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 자식이 나오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둘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 나에게 이와 같은 영광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 가장 잘난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바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영광인데 두 아들이 순교를 했으니 더욱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를 믿다가 병중 자리에서 죽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전도하다가 순교했으니 감사
여섯째, 미국에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을 갔으니 마음 안심되어 
일곱째, 나의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시니 
여덟째, 이와 같은 역경 속에서도 기쁜 마음과 여유있는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아홉째, 주여 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발견하면서/ 그 엄청난 슬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것이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는 답사를 이렇게 끝맺음했습니다. 
"이것은 옛날 내 부모가 새벽마다 36년 동안 눈물로 기도한 결정이요, 내 형제 자매들이 23년 동안 눈물로 기도해 주어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임을 믿고 감사합니다."

감사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타락한 성품을 극복하고서 
얼마든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서 감사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

우리가 감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사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마을에 신자와 불신자가 나란히 담을 하고서 이웃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식탁을 앞에 두고 이렇게 제의를 했습니다. 

"우리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그리고 난 뒤에 식사를 하도록 합시다."
그랬더니 불신자가 대꾸를 했습니다.
"믿고 안 믿고는 당신 자유지만, 그런 미신적인 신앙과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나한테까지 강요하지 
마시오!"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믿는 자는 자기 혼자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불신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우리 집에도 당신과 똑같이 생각하는 자가 하나 있습니다."
불신자는 내심 반가웠습니다. 그는 속으로 "아마도 그는 대학에 다니는 그 집 아들일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 집에도 똑똑한 친구가 한 명 있구만. 누구인가? 대학 다니는 자네 아들인가?"
그랬더니 하나님을 믿는 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닐세! 우리 아들은 나보다 신앙이 더 좋아.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 집에서 기르고 있는 돼지를 가리키는 말일세."
하나님은 돼지에게는 감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 된 우리들에게는 감사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열 명 모두가 문둥병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만 
돌아왔습니다. 그것도 이방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시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7~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예수님은 놀라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두 가지 면에서 놀라셨을 것입니다. 
첫째로, 마땅히 돌아와야 할 유대인들은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셨을 것.
둘째로, 기대하지 않았던 이방 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다는 그 사실
그러니까 열 사람 모두가 예수님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놀라게 한 이유는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정적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긍정적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해서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우리는 
예수님을 놀라게 해드릴 것입니다. 
유대인들처럼 부정적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를 느끼지 않는 사람,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있는 사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사마리아 사람처럼 긍정적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해드릴 때, 예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억지로라도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고 마십니다.

▶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백 세 되었을 때, 그에게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내 아들, 내 독자, 내 사랑하는 이삭"이라면서 마음이 온통 이삭에게만 쏠려 있었습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를 드려야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명하셨습니까?
"네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드려라." 
그제야 아브라함은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못했던 자신을 뉘우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단했습니다. 그는 이삭을 하나님께 감사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때는 억지로라도 우리의 감사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토록 애타게 원하시는 감사를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하시기 
바랍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주님께 감사를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 감사는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

하나님이 감사를 원하시는 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감사 자체가 복입니다. 본문에 10명이 나옵니다. 똑같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감사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 후 2000년 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통해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한 번의 감사로 많은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명예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잃어버렸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 감사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에게 자기의 몸을 보이러 가다가 도중에 자기가 깨끗함을 입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할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일입니다. 
15절 말씀입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이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몹쓸 병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몸을 깨끗하게 해주신 것 정말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하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아홉 사람은 어떻습니까? 큰 소리를 외쳤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말이 없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속으로 기도했겠지! 속으로 감사했겠지!"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속으로만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만백성이 보는 눈앞에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우리도 속으로만 사랑하지 말고, 마음으로만 감사하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과 감사를 
떳떳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16절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사례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표해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 예배라는 말의 어원은 엎드려 절한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깊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뜨거움이 있습니다. 찬송을 불러도 저절로 눈물이 나옵니다. 
기도를 해도 눈물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구구절절 은혜가 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만이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19절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성도 여러분 감사하지 않은 아홉 명에게도 분명히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부르짖었습니다.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눅 5장에서는 다른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며 안수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병 나음을 입었습니다. 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병 나음을 입었다는 말은 믿음이 작은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들은 큰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전히 그들의 믿음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주시옵소서"의 믿음은 있었지만, "감사합니다"의 믿음은 없었습니다. 
받는 믿음만 있었지, 드리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칭찬하신 믿음은 주시옵소서의 믿음이 아니라 감사합니다의
믿음입니다. 받는 믿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드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더욱 더 성숙해지기를 바랍니다. 
"주시옵소서"의 믿음에 머물러 있지 말고, "감사합니다"의 믿음을 소유하게 되시기 바랍. 
감사는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다른 아홉 사람을 보았다면 감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이방인이고 저 사람들은 유대인들인데 뭐! 다른 사람들도 다 그냥 가는데 뭐!" 
이런 생각을 했더라면, 그는 감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남들이야 넓은 길을 가든지 말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좁은 길을 가야합니다. 
내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길, 감사의 길을 가야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 감사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에 대해서 감사하면 절로 효도하는 자녀가 됩니다. 
감사하지 못하니까 효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감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화목하게 됩니다.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사만 회복하면 저절로 충성할 수 있습니다. 

◈ 감사를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감사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순종으로 타락한 습성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성령께 순종하여 우리 믿음에 감사를 더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감사를 원하시니까 우리는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의 감사를 요구하십니까? 감사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시옵소서!"의 받는 믿음에서 벗어나서, "감사합니다!"의 드리는 믿음으로 성숙해 지기를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모습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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