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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믿음의 모습은? (요 2: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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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믿음의 모습은? (요 2:23-25)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잘 마치고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변인이었던 윤창중 씨의 성추행 사건으로 모든 성과가 다 가려지는 것 같습니다. 윤창중 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여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인사 1호로 임명할 만큼 신뢰를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으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지니 사람에 대한 실망과 후회가 깊은 것 같습니다. 대통령이 언론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저 자신 굉장히 실망스럽고, 이런 분이 있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고 말했습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면 더 실망감이 큽니다. 다시는 그 사람을 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람과 더불어 삽니다. 사람을 믿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매사에 사람을 의심하며 산다고 해 보십시오. 그 자체가 지옥입니다. 사람을 믿으면서 살 수밖에 없지만 사람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면 어김없이 실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한계이고 어려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과의 관계성에 대한 교훈을 잘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이 타락한 것을 보고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고 말씀하시며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기적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만 본문 23절을 보면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4절 말씀을 보면 의외의 말씀이 나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예수님은 당신을 믿고 따른 사람들에게 당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고 하십니다. 공동번역에서는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른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향해 보여주는 믿음이 상황이 조금만 변하고 어려워져도 곧 쓰러질 믿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말씀이 23절입니다. 

후반부에 보면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끝말이 심상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으나’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은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에 뿌리를 둔 믿음입니다. 기적이 없으면 믿어지지 않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보고 놀라며 호들갑을 떨고 믿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기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기적이 이어지지 않으면 믿음의 세계를 의심하며 떠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상황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를 남기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 이후에 군중들이 예수님을 향해 보이는 반응이 나옵니다. 

함께 요한복음 6장 14-15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군중들은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억지로 붙들어’라고 말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본 그들은 예수님의 생각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예수님을 왕으로 세워 자신들의 욕구가 채워지는 세상을 만들기 원했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구가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수단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중을 알기에 그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다시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기적을 중심으로 하는 이기적인 신앙은 예수님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신앙의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으면 믿음의 세계를 떠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실망이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예수님을 떠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런 변덕스런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예수님께서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대하셨던 사람들은 의외의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그리고 큰 소리로 예수님을 믿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 문을 활짝 연 사람은 두 렙돈을 헌금으로 드리는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집을 방문하는 것을 너무 송구해 하는 겸손한 로마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실 때 눈물을 흘리며 끝까지 함께 한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체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교단에 선배 목사님 가운데 엄두섭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은퇴하신 후에 당신의 목회를 자책하는 마음으로 경기도에 은성수도원을 설립하시고 그곳을 손수 일구며 기도 생활에 전념하신 분이십니다. 신학교에 수도원을 영성수련원으로 기증하셨습니다. 그 분이 항상 강조하신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예수님의 피’ 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뚝뚝 흘리신 보혈 외에 그 무엇을 구하느냐고 ‘예수님의 보혈’ 이외의 것을 구하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고 피를 토하듯이 설교 하셨습니다. 엄두섭 목사님이 전하시는 메시지를 들으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치스런 믿음의 자리에 서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이 세상의 가치로 누더기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께서 마음 문을 여실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마음 문을 열 수 없는 이기적인 믿음인지를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 무엇도 아닌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위에 굳건하게 세워지는 믿음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향해 활짝 열려지는 삶이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믿지 말고 의심하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믿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되 절대적인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요한복음 7장 53에서 8장 2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7장 53절에서 8장 2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 참 감동을 받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행동에서 저의 이기적인 믿음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이기적인 믿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품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으면서 받은 충격과 은혜로 인해 잊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군중들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군중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어디서 저런 지혜가 나오는가!’ 하고 감탄했습니다. 날이 저물어 어두워져서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에는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가르침을 주신 분이 없다고 말하며 예수님께 적극적인 호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졌을 때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험악한 분위기를 느끼면서 혹시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까봐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홀로 남으신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셔서 그 곳에서 밤새 지내셨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지난밤에 각각 집으로 돌아갔던 사람들이 아침이 되자 성전으로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지난밤에 어디에서 주무셨는지 식사는 어떻게 하셨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을 더 듣기 위해서 성전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매우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만약 저라면 군중들을 보고 어떻게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하는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그렇게 이기적인 군중을 보시고 서운해 하거나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성전에 앉으시고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연결되어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다 도망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그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책감을 씻어주시고 사랑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왜 히브리서 저자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고 고백하는지를 느낄 수 있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렇게 강팍하고 변덕이 심했던 제자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고 사랑을 주시는 것으로 만족해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무엇인가를 얻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부도, 부모와 자녀도, 목회자와 교인도, 교인과 교인도, 이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그 만큼 반응이 없고 채워지는 것이 없으면 실망하고 맙니다. 그 실망과 서운함이 분노를 만들게 되고 서로의 사이에 담을 쌓으며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것은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실망을 하고 상처를 받지만 사랑을 하면 결국은 놀라운 변화가 만들어지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한 주간 동안 살아갈 때 예수님을 본받아 상대방을 향해 믿고 기대하며 의지하는 마음보다 사랑을 주는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서로에게 격려하는 인사를 한 번 나눕시다. ‘사랑하며 삽시다’ ‘사랑합니다.’ 사랑하며 사는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성도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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