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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바람은 지금도 불고 있다 (요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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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지금도 불고 있다 (요 3:1-8)


I. 믿음의 그릇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관상어 가운데 “고이”라는 잉어가 있습니다. 
조그마한 어항속에서는 기껏커야 5cm정도 되는 예쁜 물고기입니다. 
그런데 이 “고이”를 연못에서 키우면 25cm, 
강물에 방류해서 키우면 무려 20배 – 100cm까지 자란다는 겁니다. 

어떤 물에서 사느냐 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영적인 능력도 그렇습니다. 어떤 물에서 노느냐에 따라 믿음의 그릇이 달라집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불신과 부정, 이기주의와 알량한 믿음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복음의 능력이 새로워져 교회들마다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길 바랍니다.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능력을 제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시마다 새로운 부흥의 파도가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여러분의 가정, 목장 그리고 교회-
“고이” 물고기같은 성도들이 맘껏 헤엄치고 맘껏 성장할 수 있는 마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명성있는 의사로부터 개안 수술을 받고 소년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창가로 달려가 아름다운 꽃들과 풀밭 그리고 나무와 공중의 새들을 마음껏 보고는 어머니 품으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 내가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다고 왜 진작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요.”라고 외치자 마냥 감사의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얘야, 왜 엄마가 그 얘기를 안 했겠니? 수없이 얘기해 주었지만 네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게지.”

옳습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인의 허점이 있습니다. 영광스럽고 축복된 신앙의 세계를 거닐면서도 감격과 신앙의 맛을 느끼지 못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숨결 소리도 듣지 못하고 성령의 따뜻한 손길도 느끼지 못한체 무감각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이 있더란 말입니다.

“마스터 키”라는 열쇠가 있습니다. 호텔에 가면 방마다 다른 열쇠가 있지만 호텔 내에 있는 모든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마스터 키”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우리가 부딪히는 수없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마스터 키”가 있다고 하면 얼마나 신날까요?   

신앙생활에도 “마스터 키”가 있습니다. 예수 닮은 삶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부딪히는 온갖 문제들을 해결 받으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구원을 원하십니까? 구원의 감격을 원하십니까? 
꿈꾸며 살아가고 희망 가운데 인생을 헤쳐 나가길 원하십니까? 
바로 성령님은 우리 신앙생활에 “마스터 키”가 되십니다.  
이 “마스터 키”의 신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의 맛을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II. 성령을 믿사오며

우리의 신앙고백 사도신경에는 세 가지 “믿는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첫째,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로 믿습니다. 
둘째, 우리는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습니다.
셋째,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

물론 그 외에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라고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다른 의미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라틴어로 「크레도 인 스피리툼 쌍툼」 
여기 “인”이란 단어가 참 중요합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에만 
「크레도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인”이 빠지고 그냥 “크레도”입니다. 

크레도 인 하나님, 크레도인 예수님, 크레도 인 성령님 – 이 말은
“당신은 나의 모든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걸겠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올인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성령님은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성령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백에 인생을 거는 겁니다. 영원을 거는 겁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물론 오순절 제자들이 모인 다락방에 강림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여기 기념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성령의 강림이 오늘 이 자리 예배시간에 동일하게 임재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날이란 의미입니다.

이 성령 강림주일 예배속에도 성령님과 여러분이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 예배를 잘못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임재하신 이 사건속에서 내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금 형식적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새롭게 오늘 성령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환영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바람은 지금도 불고 있다」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
「성령님은 지금 이 자리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III. 본문

본문은 우리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관해 가르친 말씀이지만 성령님에 관한 소중한 교훈이 숨어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돈도 있었고 학문도 있었고 권세도 대단했을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못한 그의 영혼은 공허하기만 했습니다. 

이 문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감람산 기슭 어떤 민가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계시던 예수님을 깊은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막상 예수님을 찾아오기는 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을 꺼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인줄로 압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지 않으면 당신이 행하는 그런 기적을 아무도 행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뚱딴지같은 말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단도 직입적으로 진리앞에 좀더 솔직해지고 깨끗해지기를 종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체면이나 위신을 앞세우는 태도는 진리에 대한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갈급한 영혼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인생의 수없는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계신다 할지라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 말씀을 나누고 계시던 곳은 감람산 기슭이었습니다.  때는 밤이어서 달이 높이 솟아 있는데 구름이 달을 가리우면서 지나고 있었습니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었고 풀잎 스치는 소리가 창밖에서 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지의 무지를 드러낸 니고데모에게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시기 위해 멀리까지 가서 적절한 예를 찾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창밖에서 불고 있는 바람을 보며 지금 성령의 신비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니고데모여, 창밖에서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감람나무 가지와 잎을 보라. 저 모습을 보고도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성령도 마찬가지 일세. 그러나 아무도 바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 않는가? 저기 구름 떼를 몰아 가는 바람의 위력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그것이 성령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성령 그리고 바람이란 말이 원어에는 같은 단어, “프뉴마”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때문에 원어로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한층 더 재치있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 헬라어 “프뉴마”는 사람들이 들이 마시고 내뿜는 “숨”이라는 뜻이 있고 그리고 산들 바람, 시원한 바람, 폭풍, 태풍 할 것 없이 모든 바람을 “프뉴마”라고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하나님의 성령도 똑같이 “프뉴마”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바람은 지금도 불고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우선, 생명의 숨소리는 언제나 우리곁에 있다는 뜻이고, 창문을 닫아걸어 바람을 느끼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바람은 불고 있듯이 우리가 비록 신앙의 기쁨과 맛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부지런히 우리곁에서 움직이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IV. 우리가 바람을 느끼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천지가 열린 이래 바람이 불지 않은 시대, 바람이 불지 않은 날, 바람이 불지 않은 순간은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원전부터 바로 이 순간까지 성령이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성령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고 계셨습니다. 

에스겔 37장 4-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골짜기에 즐비한 마른 뼈들에게 성령의 바람으로 살아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 생기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르아흐”인데 헬라어의 프튜마와 같이 숨결, 바람이란 말입니다.

성령의 파도, 성령의 바람이 일어나면 골짜기마다 죽어 넘어진 영혼들이 살아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도시에 성령의 바람이 일어나면 죽은 영혼들이 살아납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면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납니다.
구원의 감격이 죽었습니까? 기도생활이 죽었습니까?
전도의 능력이 죽었습니까? 신앙생활에 기쁨이 죽었습니까?
가정에 생기가 사라지고 행복이 죽었습니까?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아무런 응답도 없이 침묵하고 있습니까?
이 시간 성령이 당신에게 임하시면 살아납니다. 
성령님 오셔서 저들을 살려주시옵소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성령의 바람이 멈춰진 것 같아 답답하신 분들 
이 시간 다시 성령으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 시간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저기 창밖에 바람소리를 들어보라!  저기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라!”  

여러분 실망하지 마십시오. 바람은 지금도 불고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중이라도 밖을 내다보십시오. 바람은 지금도 불고 있습니다. 
바로 창곁에서 당신안에서 당신 머리위에서 불고 있습니다.(with, in, over)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령은 나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고 내 안에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최목사님, 박목사님 두 분이 비행기를 탔더랍니다. 그런데 최목사님은 스튜어디스가 지나갈 때마다 포도주 주세요, 음료수 주세요, 식사시간이 되니까 양식 주세요, 빵 좀 더 주세요... 시간마다 시켜 먹습니다. 그런데 박목사님은 스튜어디스가 뭘 드시겠습니까? 물어보면, 전 먹지 않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자꾸 거절을 하고 목적지에 도착을 했습니다. 최목사님이 박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비행기에서 아무것도 안 드셨습니까?” 

“제 주머니 사정이 좀 안 좋아서 아무것도 시킬 수가 없었노라고” 하십니다. “아, 목사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거기서는 밥을 열 그릇 잡수셔도 돈 받지 않습니다. 음료수 열병을 잡수셔도 괜찮은데 왜 그랬습니까?” 앗뿔사! 무식이 죄였구나! 

호텔에 여장을 풀고 며칠후 일을 마치고 나오려고 하니까 청구서가 날아 왔는데 이게 왠걸? 엄청나게 돈이 나왔습니다. 알고보니 박목사님이 호텔안에 있는 냉장고안에 있는 음료수를 모두 꺼내 먹은 겁니다. “아니 비행기 안에서 공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비행기가 공짜라고 했지, 호텔이 공짜라고 했습니까?” 
무식이 죄였지요.  
성령님 주시는 것은 아무렇게나 드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것 먹으면 큰일 납니다.  

V.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바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성령의 바람은 거듭나게 하는 바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5절)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께서 우리 아빠 아버지가 되신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이 아니면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절 소아시아 지방 어느 마을에 자기 아버지를 친아버지로 믿지 못하는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에게 잘해주면 잘해 줄수록 더욱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어떻게 이 아들에게 그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라는 사실을 증명해 줄 수 있을까요? 어머니가 증거하는 길 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보증한다. 이 분은 틀림없이 너의 아버지가 되신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심을 가르쳐 주시고 보증해 주시는 분이 성령님이라는 거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시는데 내게 구원받은 감격이 없을 수 있습니까?
성령님이 내 안에서 탄식하시는데 구원받지 못한 내가족, 내형제, 내 이웃이 불쌍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성령의 바람이 내 안에 불고 있는데 복음전도에 대한 거룩한 부담감이 없을 수 있을까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교회 사역에 무관심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거둡나게 하는 바람입니다. 전도의 바람입니다. 
교회 부흥의 바람입니다. 

이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사역을 오늘 본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물의 운동, 불의 운동이라 그랬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이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를 왜 물과 불이라는 정반대의 성질로 설명을 하셨을까요?

포항제철 공장을 견학해 보신분은 아마 그 진리를 쉽게 실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강철이 되어 나오는 과정은 우리 성도들이 온전한 천국백성이 되는 과정과 너무나도 흡사합니다. 공장입구에 들어서면 광산에서 캐내 온 철광석 가루가 태산처럼 쌓여있습니다. 이 철광석이 용광로로 실려 들어가지요. 용광로속에 들어간 철가루는 몇천도의 뜨거운 불속에서 소리를 내며 타는가 싶다가 금방 시뻘건 쇳물이 됩니다. 불순물이 다 타고 순수한 쇳물이 된 철은 붉은 강물처럼 작업대 위로 흘러갑니다. 두껍고 붉은 철판이 작업대 위를 왔다 갔다하는 사이에 큰 헴머는 이 철판을 내려칩니다. 얇고 가늘어진 철판은 드디어 찬물을 통과하게 되고 찬물을 통과한 이 철은 단단한 강철판이 되어 나옵니다. 물과 불 그리고 헴머가 강철을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릇이 되기까지 불에 타는 일도 필요하고 물에 씻고 식히는 일도 필요하며 한 번씩 헴머에 맞는 일도 필요합니다. 불같은 시험때문에 안타까워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물같은 시험에 고독해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헴머같은 고난에 괴로워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숨결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 나라 소망을 완성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더욱 더 하나님의 온전한 그릇으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물과 불과 헴머의 연단이 필요하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십시오.

VI. 신비한 바람

끝으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성령의 바람은 신비의 바람, 능력의 바람입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이 내 안에서 이뤄지게 하는 축복의 바람입니다. 

T.V.를 보시면서 저희 어머님 가끔 말씀하십니다. 
“전선줄을 타고 어떻게 방송국에 저 그림들이 우리집 안방까지 들어 온다냐? Fax를 우리 집에서 받으면, 아니 글이 전기줄을 타고 어떻게 책이 날라 온다냐? 이해를 못하겠다. 참 좋은 세상이다.” 그러세요. 
얼마전 프린터기가 권총을 만들어 내더라구요. 
앞으로는 스마트 폰이 모든 것을 다해주는 세상이 온답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그냥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왜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낼 수 없는 영적인 진리와 신비와 기적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까?

한 마리의 검은 젖소가 목장으로 나가 초록빛 풀을 뜯어먹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어떻게 한얀 우유를 내는지 다 이해를 하시고 우유를 잡수십니까? 우리가 하얀 쌀밥을 먹고 어떻게 검은 머리가 나며, 말랑말랑한 밥을 먹고, 딱딱한 뼈를 만드는지 다 이해를 하고 사십니까? 그런데 왜 위대하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는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을 여러분의 머리속에 넣으려고 하십니까? 바람처럼 불어오는 성령의 역사를 왜 합리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었다 그러면 아멘하고 믿으면 될 것이지, 그걸 머리로 생각해 가지고 아마 이러했을 거라고, 제자들과 예수님께서 강을 건너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수영을 못하셨네. 그래서 예수님이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데 “help me, help me” 그래서 베드로가 수영해서 예수님을 건졌다. 
이런 예수님을 믿어야 되겠느냐고?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이나 되는 사람들 굶어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걸 예수님께 갖다 바쳤네. 가만히 보니까 1인분 식사야, 얘들아 통성기도 하자. 통성기도 시킨 다음에 예수님께서 나무그늘 밑에서 혼자 가서 도시락 까먹었다. 아, 이런 예수님을 믿어야 되겠느냐고?  

오천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던 넉넉한 역사를 행할 수 있는 예수님을 믿으면 기적을 본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VII. 맺으며

오늘 성령강림 주일,
에스겔의 마른뼈 골짜기에 불었던 그 바람이 오늘 한국교회에 불어오기를 기대합니다. 앙상한 뼈다귀 같은 신자들이 군대처럼 일어나야 합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불었던 그 성령의 바람이 성도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새롭게 불기를 기대합니다. 냉냉한 심령들이 뜨거워집니다. 
세상 헛된 것에 묶여 살던 성도들이 불같이 기도하고 그들의 입술에서 복음이 불같이 타오를 것입니다. 
1907년 원산과 평양과 서울에 불었던 부흥의 바람이 이 당에 다시 불어오기를 기대합니다. 

이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세계 볶음의 촛대가 다시 한국교회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이 땅 그리스도인들의 가정과 자녀들이 역사 무대의 중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도 한국교회에서, 우리 교회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바람은 지금 이 자리에 불고 있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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