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빈 무덤 (요 20:1-18)

첨부 1


빈 무덤 (요 20:1-18)

빈 무덤의 진실을 아시나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장사한지 사흘째 되는 날, 주일 새벽 해뜨기 전에 무덤에서 부활하여 나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전반부는 이 부활 직후의 빈 무덤에 관한 얘기입니다.  
  
첫 장면은 빈 무덤을 두고 오락가락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맨 처음 무덤을 찾아간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입니다.(막16:1) 

이들은 장사 후 만 하루가 지난, 주일 새벽에 무덤에 이르렀습니다. 이르러 보니 이미 무덤 문이 열려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1) 시신도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여자들이 놀라고 있을 때에 천사가 이들에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그리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다. 거기서 만나자. 가서 제자들에게 알려라!(막16:7) 여자들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알렸습니다. 

본문에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  
  
여자들은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은 전혀 잊고,(잊은 게 아니라 듣지도 않았음) 무덤이 비어있다는 얘기만 전했습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둘 중에 요한이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먼저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요한은 무덤 속에 세마포 옷이 놓인 것을 보았지만 무덤에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3-5) 

나중 도착한 베드로가 앞장서서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6-7)
 
빈 무덤! 어찌 된 일인가? 여자들은 누가 시신을 훔쳐가거나 무덤 주인이 옮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나 요한은 빈 무덤에 대하여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빈 무덤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빈 무덤을 보고 부활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빈 무덤은 주님 부활의 증표요 상징입니다. 빈 무덤을 보고 주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믿은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기록했습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8) 

그 다른 제자란 바로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요한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요한이 무엇을 믿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호스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시는 제자(요한)의 뛰어난 믿음이 이 얘기의 핵심이다. 그의 믿음은 옛 선지서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의미를 밝혀주는 빈 무덤의 사실에서 얻은 것이다.” 

사도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 보고 놀랐습니다. 시신이 어디로 갔을까요? 막달라 마리아가 의심한 것처럼 도둑놈이 훔쳐갔을까요? 아니면 무덤 주인이 권리 행사를 하려고 시신을 어디로 치워버렸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달랐습니다. 시신을 쌌던 수의나 머리 수건이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누가 잠시 누워 자고 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한은 직관적으로 주님의 부활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요한은 주님이 부활하시리라 하신 예언의 말씀은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된 후에 말씀을 기억해냈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요한은 자기가 부활을 믿은 최초의 제자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 

“그들”이란 다른 제자들입니다. 요한은 다른 제자들이 깨닫지 못한 말씀을 먼저 알게 된 것을 자랑합니다. 20장 전체를 통해서 요한은 이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8절에서 그는 “보고 믿더라”고 기록했습니다. 25,27,29절에는 부활하신 주님과 도마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도마는 제자들 앞에서 주님을 보고 만지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선언한바 있습니다. 주님은 그 도마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보고 만지고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만지기 전에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나?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
  
오늘 빈 무덤에 대하여 마음의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복음 전파의 2000년 역사는 곧 빈 무덤에 대한 자랑의 역사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신 가장 큰 증거가 바로 빈 무덤이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모르셔도 좋습니다. 성경 지식이 부족해도 좋아요. 철학적 지식이 없어도 좋습니다. 주님이 누우셨던 빈 무덤이 부활의 증거임을 믿으시면 됩니다. 1절 말씀에 보면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돌이 옮겨갔다는 말은 단순히 열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완전히 제거됐다는 말입니다. “치워버렸다!”는 말입니다. 완전히 없앴다는 말입니다. 두 번 다시 닫쳐지지 않도록 열어 제쳤다는 말입니다. 

hjrmevnon : taken away(AV), had been removed(NIV), had ben moved away(JB), “치워져 있었다”(공동)  여러분! 바로 이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무덤은 완전히 열려졌습니다. 두 번 다시 닫히지 않아요!  주님은 완전히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성도 부활의 신호탄입니다. 우리는 장차 무덤에 묻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묻힐 무덤의 문은 주님의 무덤처럼 활짝 열리고 다시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무덤 문을 활짝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먼저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부활하신 주님이 맨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도 주목해야 될 일입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11-15) 

주님이 먼저 보이신 것은 수제자 베드로가 아닙니다. 장사지내 준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도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혈육인 모친 마리아나 형제들도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막달라 마리아에게 첫 번째로 나타나셨을까요?  
  
어떤 분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마리아에게 신세를 가장 많이 졌기 때문에 그에게 먼저 보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세로 말한다면 오히려 마리아가 예수님께 가장 큰 신세를 졌습니다.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사람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미친 여자요 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리아가 주님을 가장 열성적으로 잘 섬겼기 때문에 먼저 보이셨다고도 합니다. 마리아가 주님을 열성적으로 섬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섬김이 제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주님이 그에게 베푸신 은혜에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주님 말씀처럼 받은 은혜가 큰 사람은 헌신도 크게 하는 법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주께서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보이신 것은 마리아의 헌신이나 봉사 때문은 아닙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이 가장 좋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부활을 전혀 예상치도 않았습니다. 그의 신분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이름 난 제자도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도 아닙니다. 교회적 직분이 높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주님이 먼저 마리아에게 보이신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일 뿐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신다.”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것은, 결코 마리아의 열성이나 헌신 때문은 아닙니다. 주님이 누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뜻이요, 은혜입니다.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첫 번째로 대면하게 된 영광은 순전히 주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보편적인 역사입니다. 주권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사람을 결정하신다는 뜻입니다. 보편적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신분이나 조건, 열의와 상관없이 주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바로 이런 주님의 은혜에 우리는 소망을 가집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먼저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먼저 목사님들께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에게, 혹은 성가대원이나 교사들, 혹은 구역장들에게 먼저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믿으신 분에게도 나타나십니다. 직분이 없는 분들에게도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무능한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실 수 있습니다. 인종이나 지식이나 지위에 상관없이 나타나십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이 여러분께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모든 삶에, 가정에, 직장에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워 잘 때에나, 길에 행할 때에나, 부활의 주님이 항상 우리에게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활체의 모습

본문을 통해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부활체에 대한 궁금증입니다. 우리는 장차 우리가 가지게 될 육체의 상태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어떤 형체로, 어떤 생활을 할 것인지? 주님의 부활은 바로 그러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어떤 모습이셨을까요?  
  
첫째는 신체적인 변화입니다. 부활 이후에 주님의 신체가 달라졌습니다. 주님의 신체가 달라졌다는 것은 우선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한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코앞의 주님을 동산지기로 알았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1-15) 마리아 뿐만 아니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주님과 한참 동안 함께 걸어가면서 얘기를 나누었는데도 주님인줄 몰랐습니다.(마28:17,눅24:37, 요21:4) 제자들이 몰랐다는 것은 주님의 외모가 달라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주님의 몸은 시공을 초월하는 몸이 되셨습니다. 부활체는 어떤 공간적인 제약도 받지 않았습니다. 영혼처럼 자유롭게 움직이셨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던 방에 주님은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문도 열지 않으시고, 벽을 헐지도 않으시고 그냥 나타나셨습니다. 우리의 부활체는 이런 몸이 됩니다. 천사들과 방불합니다. 

그렇다고 육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확실한 몸이 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손과 발과 옆구리를 만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제자들과 함께 구운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분명한 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공간적인 제약은 전혀 받지 않으시고, 자유롭게 왕래하셨습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은 부활체에 대하여 이런 말씀을 한바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리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으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15:) 

바울의 말에 의하면 주님의 부활체는 하늘에 속한 몸입니다. 썩지 않는 몸이요, 영광스러운 몸이요, 강한 몸이요, 신령한 몸입니다. 이 몸은 땅의 재료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난 몸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이 오실 때에 우리는 순식간에 다 부활합니다. 죽은 지 일 년이 됐든지, 백년이 됐든지, 천년이 됐든지 마찬가집니다. 다 같은 몸으로 함께 부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시작합니다. 신령한 몸으로 시공을 초월하는 자유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영원히 즐겁고 영광에 찬 삶입니다. 할렐루야!


부활하신 주님과의 교제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부활하신 주님과 성도들과의 교제 방식입니다. 부활 이후에도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시며 우리는 주님의 소유 된 양입니다.  
  
첫째로,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 계십니다. 여전히 우리를 찾으시고, 여전히 우리를 돌보십니다. 본문에 주님이 하신 질문을 다시 한 번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15) 왜 우느냐고 물으시면서, 한 가지를 더 물으셨습니다. “네가 누구를 찾느냐?” “무엇을 찾느냐?” 하지 않으시고, “누구를 찾느냐?” 하셨습니다. 물건을 찾는 질문으로 하시지 않고, 인격을 찾는 질문으로 하셨습니다. 인격 없는 시체를 찾지 말고 산 인격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죽은 시체가 아닙니다. 살아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십니다. 과거의 주님, 돌아가신 주님이 아닙니다.  현재의 주님,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죽어 사라진 목자가 아닙니다. 살아 계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목자십니다.  
  
주님은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마리아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것은 분명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즉시 깨달았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구나!” 이제껏 시신을 누가 가져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주님은 살아나셨습니다. 마리아는 즉시 대답합니다. “랍오니여!” “나의 주여!” 히브리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급한 때 고향 말이 나오는 법입니다. 죽었던 주님이 살아서 앞에 계십니다. 내 이름을 부르시면서 앞에 서 계십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음 앞에서 슬퍼하며 울고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내 이름을 다정히 부르실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목자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원한 양입니다. 할렐루야! (요10:3-5)  
  
둘째로,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새로운 방식의 교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마리아는 감격해서 주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만류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6-18) “나를 붙들지 말라!” 

반가와 하는 마리아에게 섭섭하기 그지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냥 만지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 개역 한글판이나 흠정역에는 “만지지 말라! Touch me not!”(AV)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개역 개정판이나 다른 번역에는 붙잡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Do not hold me(RSV), Do not cling to me(NEB, JB), 나를 붙잡지 말고(공동)” 붙잡지 말라는 것은 Do not start something의 의미가 아니라 Stop doing somthing의 의미입니다. 

즉, 어떤 행동을 멈추라는 뜻입니다. 다수의 신학자들이 이 부분을 의미 있게 해석합니다. 이제껏 세상에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얼굴을 대면하는 식으로 교제하지 말자는 겁니다. 이제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제하자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새로운 교제 방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영적인 교통입니다. 제자들은 지금까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함께 자면서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런 교제가 필요 없습니다. 새로운 교제 방법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통신 혁명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집에 전화가 있으면 자랑거리였습니다. 청색전화 백색전화로 전화를 구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화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 개개인이 다 전화기를 휴대하고 다닙니다.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서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고 원하는 모든 정보를 교환합니다. 주님과 우리와의 교제 방식도 그렇습니다. 부활하시기 이전에는 숙식을 함께 하고 같이 머물러 있어야만 교제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부활 이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주님과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전천후 교제입니다.  
  
이러한 교제 방식은 주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더욱 풍성해 졌습니다. 비록 육체적인 만남은 없어졌을지라도 영적인 만남은 항상 있습니다.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너희 하나님”(16-17)이란 말씀의 뜻이 뭘까요?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은 본성적인 부자 관계에 있습니다. 즉, 신성을 공유하신 성부와 성자의 친밀한 관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는 養子的 관계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교제하시듯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항상 교제합니다. 그것이 부활 이후의 주님과 우리 사이의 새로운 교제 방식입니다.  


인생의 happy end는 부활입니다

섹스피어의 4대 희극이 있고, 4대 비극이 있습니다. 그런데 희극보다는 비극이 더 잘 알려져 있고, 비극이 더 자주 무대에 올려 집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이 희극이 아닌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불행한 인생들이 세상에 꽉 차 있는데 인생은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나요? 저는 대학 시절에 사실주의 소설들을 즐겨 읽었습니다. 인간의 불행이나 사회적 모순들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런 작품들은 대개 분위기가 우울합니다. 대개의 주인공들은 도시 빈민 출신들이거나, 가난한 농민, 혹은 돈에 팔린 창녀들, 그리고 허영과 야망에 들뜬 인생들입니다. 이들은 인간 사회의 거대한 모순 속에서 달음질하다가 비극적으로 죽고 맙니다. happy end가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취향에 따라서 작품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자체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happy end의 인생이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비극적 최후! 그것이 우리 인생들입니다.
  
인생이 happy end가 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어야합니다. 건강한 사람도, 권력자도, 돈 많은 사람도, 젊은 사람도 다 죽을 날을 받아 놓고 삽니다. 죽을 날을 받아 놓고 사는 사람이 뭐가 happy end입니까? 저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아 왔습니다. 만일 그 죽음 이후에 행복할 수 없다면 모든 인생은 결국은 비극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인생의 진정한 happy end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 소망이야말로 모든 인생들의 최종적이며 영원한 행복의 길입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의 끝이 좋으면 다 좋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삶은 부활로 끝나기 때문에 행복한 마침이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져야 될 유일한 소망은 바로 부활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보면서 이 부활 신앙을 가져야 됩니다. 영원히 살 소망을 갖고 미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김영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