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성령강림] 성령과 함께 하는 삶 (요 14:16-7)

첨부 1


성령과 함께 하는 삶 (요 14:16-7)


‘별명’은 주변 사람들이 원래 이름 외에 그 사람의 특징에 따라 지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생김새가 뚱뚱하다고 ‘돼지’라고 부릅니다. 행동이 굼뜨고 우직하다고 ‘곰’이라고 부릅니다. 큰 소리를 잘 친다고 ‘대포’라고 부릅니다.
많은 경우 본인이 이 별명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잠깐 불리다 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이 별명을 받아들이면 오랫동안 이름처럼 친근하게 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별명으로 부르셨습니다.

바로 ‘보혜사’입니다. 16:25에 보다 분명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성령을 별명으로 보혜사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신 것일까요? 도대체 보혜사란 어떤 뜻일까요?

보혜사란 말은 성경 원어로 ‘파라클레토스’(parakleto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옆에’라는 뜻의 ‘파라’(para)라는 말과 ‘부름 받은 사람’이란 뜻의‘클레토스’(Kletos)라는 말이 합해진 말입니다. 직역을 해 보면 ‘옆에 있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보실 때 성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항상 그리스도인들 곁에 계시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혜사라는 별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특징은 본문 안에서 보다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원래 보혜사가 있는데,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또 다른 보혜사가 바로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본문을 보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요 13:31에서부터 16:33까지의 말씀을 ‘예수님의 고별설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처럼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의 고별설교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난 3년 동안 제자들 곁에서 저들을 지켜주셨고, 보살펴주셨고,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들 곁을 떠나셔야만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저들이 두려워하고 염려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 고별설교 도중에 저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약속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바로 다른 보혜사가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께서 보혜사로 제자들 곁에 계시며 도우셨던 것처럼, 이제 다른 보혜사가 오셔서 제자들 곁에 계시며 도우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다른 보혜사가 바로 성령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항상 우리 그리스도인들 곁에 계시며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늘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게 되는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것 역시 예수님께서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본문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1. 동행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이제 제자들과 영원토록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보혜사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그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임마누엘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동행’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한 동행은 끝이 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동행을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성령을 통한 동행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이란 바로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혼자 인생길을 걷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인생길을 걷는 것입니다.

최성수라는 가수가 부른 [동행]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아직도 내겐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긴 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 가사 때문입니다.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헤매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이 대목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은 한 마디로 ‘혼자 가는 길’입니다. 곁에 가족들이 있어도 심지어 아내와 남편이 있어도 늘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정작 곁을 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 정작 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길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보혜사로 늘 우리 곁에 계셔서 동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과 동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더 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과의 동행은 아주 특별한 동행입니다. 본문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리고 20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그러니까 성령을 통한 동행은 한 마디로 ‘영적인 동행’이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존재 안으로 들어오셔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신비로운 연합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통한 동행은 영적인 동행입니다.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항상 함께 계시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항상 성령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어디서나 성령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동시에 성령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리와만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든지 모든 사람과 함께 성령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성령과의 동행은 영적인 동행이기 때문에 자칫 동행 자체를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동행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자기들 눈으로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온 몸으로 예수님과의 동행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의 동행은 다릅니다. 성령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온 몸으로 성령과의 동행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과의 동행은 영적으로만 확인이 가능합니다. 적극적이고 철저하게 확인하려고 노력해야만 성령과의 동행은 확인이 가능합니다.

우선 성령을 찾으십시오. 다윗은 시 27:8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그리고 행 2:25에서 다윗은 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일 나와 동행하시는 성령을 찾아야 합니다. 아침마다 순간마다 성령님을 확인하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령과 대화하십시오. 다윗은 또 시 62:8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성령님께 우리의 마음을 털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동행하시는 성령님께 털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힘들고 아픈 마음을 동행하시는 성령님께 털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죄 짓고 싶은 마음까지 동행하시는 성령님께 털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 구하십시오. 순간순간 성령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갈 길을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힘을 달라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고 계십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풍성한 삶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 깨달음

본문 1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우리와 동행하시며 하시는 사역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사역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혜사이신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를 깨닫게 하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말씀입니다. 

14:26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신 뒤에 성령께서 보혜사로 오셔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저들에게 필요한 말씀을 가르쳐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행 2장에서부터 사도들의 설교 몇 편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대표적으로 2:14-40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기적을 봅니다. 이 설교 안에서 성경 여러 곳을 인용합니다. 너무도 적절한 인용입니다. 또 너무도 정확한 인용입니다. 베드로가 원고 설교한 것 아닙니다. 당시 베드로가 성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떻게 그 많은 내용을 정확하게 암송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 많은 내용을 논리적으로 적절하게 인용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그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베드로가 유대 랍비처럼 체계적으로 말씀훈련을 받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 아직 신학적 체계를 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분명히 베드로 혼자서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된 것일까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성령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작품인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늘 설교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때로는 설교를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예 설교를 피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오래 전입니다. 한 권사님께서 기도원에서 철야기도를 하신 후 돌아오시다가 뺑소니 차량에 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삐딱하던 아들이 위로 예배 때 얼마나 공격을 하던지요. 거의 봉변 수준으로 혼이 났습니다. 

그런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장례식 할 테니 교회에서 얼씬거리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다행히 가족들의 권유로 장례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제가 설교해야 했습니다. 그 아들 생각에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청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전해야 할지 어떻게 설교해야 할지 정말 간절히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마음도 주장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무슨 설교를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은혜 중에 예배를 잘 마쳤습니다. 그 다음 주일입니다. 그 아들이 주일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저를 찾아와 정중히 사과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님처럼 신앙생활 철저하게 하겠습니다. 어머님 대신 교회봉사 잘 하겠습니다.”

저는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바로 성령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십니다.

둘째, 죄입니다.

16: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깨닫게 하시고, 올바로 나아가야 할 의를 깨닫게 하시고, 또한 그 죄 때문에 받게 될 심판을 깨닫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의 책망입니다.
시 50: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이 말씀 그대로 성령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가 지은 죄를 정확하게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책망하십니다.

이때가 중요합니다. 시 51:3 말씀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이 말씀처럼 성령의 책망을 뼈아프게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깨닫고 있는 그대로 고해야 합니다. 그 후에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장치입니다. 연약한 우리가 실수할 수 있습니다. 또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칫 하나님의 버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동행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던 날을 기념하여 전세계교회가 성령강림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성령은 오늘도 예수를 믿는 이들에게 임하십니다. 그리고 저들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도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고 또한 진리의 영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삶 속에 더욱 풍성한 신앙생활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