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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교하는 교회 (행 11: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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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하는 교회 (행 11:19-30)
  

들어가는 말

다음 글은 교우 중의 한 분이 저에게 보내준 글입니다.
특별히 광야학교에서 훈련받는 다고 느끼는 교우들에게 의미와 격려를 주는 글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저는 광야대학교 고생과에 다니고 있어요. 나는 아직도 이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성적이 별로 좋지 못해서 입학한지 오래됐지만 아직 졸업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의 이름은 광야대학교 학과는 고생과입니다.
총장님은 하나님이신데 대충 넘어가시는 일이 절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컨닝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시험 볼 때에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교과목은 기다리는 훈련, 포기하는 훈련, 깨어지는 훈련, 내려놓는 훈련, 순종하는 훈련, 하나님만 바라보는 위로부터 내려 주시는 능력만으로 살아가는 훈련입니다.
학비가 비싸냐고요?
네! 많이 비싼 편입니다.
인생을 모두 걸어야 할 정도이니까요.
때로는 목숨까지도 내어놓아야 하니 결코 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과목은 버리기입니다.
욕심을, 내 고집, 내 생각도, 인간적인 모든 수단 방법도 버려야만 합니다.

그런데 나는 매일 낙제를 해서 이렇게 졸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합격하리라 결심을 하고 도전해 보고 있습니다.
합격하는 자에게는 졸업선물이 주어지겠지요. 
소망, 기쁨, 문제해결 이라는 은혜의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나는 그 선물을 받고 싶어요.
고생과를 졸업하고 헌신과에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살았으면 싶습니다.

하나님, 한 눈만 살짝 감아주세요.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번 시험에는 꼭 합격할 수 있도록 제발 도와주세요.
헌신과, 충성과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베드로의 고넬료 전도를 계기로 이방 세계로 복음의 물줄기가 터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2주 전에 나눈 말씀이지요.) 
이제까지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전파되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하나님은 유대인을 넘을 세계 복음화의 기지를 만드셨습니다.
안디옥은 주전 300년경에 건립된 도시로서 그 때 당시 인구가 약 50만이나 되는 로마 세계에서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세 번째 큰 도시였습니다.

이 안디옥은 로마의 부와 헬라의 미 그리고 동방의 사치가 낳은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5마일 떨어진 곳에는 아폴로와 아르테미 신 숭배의 중심지인 다프네(Daphne)숲이 있었습니다.
성 행위를 하는 이런 이교 우상 숭배는 필연적으로 안디옥에 방탕과 방종 그리고 성적 문란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로마 세계에서 안디옥은 부도덕한 도시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곳을 이방 선교의 기지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안디옥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안디옥교회는 어떻게 개척되었습니까?

무명의 개척자들이 개척했습니다.
20절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성경은 개척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다만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라고만 적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개척한 사람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최초로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한 교회,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인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해 준 전향적인 교회, 
복음의 새바람을 일으킨 교회, 
그 안디옥 교회가 놀랍게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고고학이 발달된 오늘날에도 안디옥 교회를 세운 무명의 몇몇 사람들의 이름을 여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름들을 기억하시고, 또렷하게 생명록에 기록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질까’에 관심이 집중되면-이것을 소위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는데-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천박해지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잘 한다’라고 박수를 치면 좋아하고,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가 없으면 슬퍼지고 우울해진다면 그 사람은 진국의 맛을 잃고 천박해집니다. 

그래서 성도의 시선은 항상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름이 생명록에 기록되어 있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인정해주신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요16:25-33절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요16:3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질주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기’ 위하여 매진하셨습니다. 
‘성공’이라는 단어와 ‘승리’라는 단어를 비교해보십시오.

세상은 우리를 성공하라고 부추깁니다.
세상은 사업에 성공하라고, 학문에 성공하라고, 직장에서 성공하라고, 목회에 성공하라고........
성공한 자만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고.
그래서 교회마저 성공주의에 깊이 물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라고 권면하십니다.
요한 1서 2: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승리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얼마나 다릅니까?
보십시오.
우리가 반드시 이겨야할 것들 중에는 이생의 자랑- 이름에 대한 욕심이 있습니다.
이 이름에 대한 욕심을 극복해야만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70년 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부른 찬송가 중의 하나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찬323장)입니다.
참 많이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고, 가사 대로 살겠노라고 결단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저주 받은 찬송은 부르지 않는다.”고.
왜 이 찬송가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저주받은 찬송으로 인식되는지 가사를 들어보십시오.2절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3절의 고백은 더욱 엄청납니다.
3절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명예욕, 자기 이름에 대한 욕망을 온전히 내려놓겠다는 고백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도 안디옥 교회의 개척자들과 같이 이름은 알 수 없지만 가고 오는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는 그런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2. 안디옥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1)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26절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오늘날 성도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바로 안디옥교회로부터 얻어진 이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께 속한 자’란 뜻입니다. 

요15: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한복음은 ‘속한다.’라는 단어로 그리스도인이란 존재를 설명합니다. 
사람은 그리스도께 속할 수도 있고, 세상에 속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면 세상은 우리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요15장에는 ‘미움’이란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왕따’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이 미워하는 흔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물질적인 손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육체적인 손상을 입은 적이 있습니까?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뭡니까?
혹시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까?

처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유대인들은 ‘나사렛 이단’ 이라고 불렀습니다.
‘미친 놈들’ 정도의 경멸조로 부른 이름이지요.
그런데 안디옥 교회는 이 별로 명예스럽지 못한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이름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안디옥 시민과는 확실히 구별되었습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주님을 닮아갔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지, 우리와는 분명히 달라.”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속으로 존경하면서 부른 이름이었습니다.
비판자들은 안디옥 교인들의 신앙 내용에 대해서 가타부타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판할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디옥 교인들의 성결한 삶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경멸조로 부르던 이름을 이렇게 존경의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욕된 이름을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든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도 그런 별명이 붙게 되길 바랍니다.
“저 사람 진짜 예수쟁이래.”

2) 복의 통로가 된 교회였습니다.

29절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예루살렘 교회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글라우디오 황제 통치 기간인 주후 44년에서 48년의 5년 동안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극심한 기근이 있었답니다.
이때에 안디옥 교회가 팔소매를 걷어부쳤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처음부터 주는 교회였습니다.
어느 정도 채울 것을 채운 다음에, 우선 급한 불을 끈 다음에 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주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통로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창12: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도 우리로 말미암아 우리 지역이, 우리 민족이, 열방이 복을 받게 하려 함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축복하길 원하시는데 그 통로가 바로 나이고, 우리 교회인 것입니다.

마14장에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을(마14:17~21) 보십시오.
세상에는 5천 명 분을 혼자 먹어치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 5천 명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은 5천 명 분을 혼자 먹어치우는 사람에게 박수를 칩니다.
그러나 주님은 혼자 5천 명을 먹여 살리는 사람에게 박수를 칩니다.
주님은 오천 명 분을 혼자 먹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천 명을 먹이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천 명 분을 혼자 먹는 삶을 살지 말고, 오천 명을 먹이는 삶을 살려는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교우들이 개업할 때 마지막에 꼭 부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는 삶이 되라고. 

이름에 뜻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자’, 사래는 ‘공주’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름의 뜻이 좋지 않아요? 
어느 날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열국의 아비), 사래를 사라(열국의 어미)라는 이름으로 바꾸셨습니다.
‘열국’이라는 말이 들어갔습니다. 

열국, 열방을 위한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사는 것이랍니다.
아브람으로 살 것인가? 아브라함으로 살 것인가? 
사래로 살 것인가? 사라로 살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아브라함으로, 사라로 부르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의 삶을 살 때 아브람의 삶(존귀한 자)을 보너스로 주십니다.

본문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저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너는 무엇을 들고 다니느냐?”
초대교회 성도들은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질 때 그들은 복음을 들고 다녔습니다. 
자기 목숨하나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19절입니다.(같이 읽자)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너는 무엇을 들고 갔을까? 복음을 들고 갔을까? 아니면 삶에 필요한 정보를 들고 갔을까?”
이 질문은 저에게 크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곳저곳을 방문하곤 합니다.
저는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하곤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목사로서 복음을 들고 가지 않았습니다.
여행 중에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서툴렀습니다.
저의 손에는 때로는 여행을 위한 지도책이, 때로는 물건을 사기 위한 지갑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들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부분을 지적하셨습니다.
주님께 한없이 죄송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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