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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롯 유다의 자살 (마 2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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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롯 유다의 자살 (마 27:1-10)

우리 주님을 은 30에 판 가룟 유다는 죄책감으로 스스로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유다의 자살은, 곧 예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의 자실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들과 무관한 일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7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모든 인류는 예수님에 의해서 선택당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천국으로의 선택이 아니면 지옥으로의 선택입니다. 왜 선택해서 구원하시는가 하면, 구원이란 오직 ‘약속’에 의해서만 성사되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이란 그냥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시계에 의해서 이 지상에 실현됩니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의 경우, 그는 약속의 차원에서 보게 되면 악마의 운명을 담아내고 보여주는 그런 약속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길을 가야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이 가룟 유다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이런 사태와 무관한 입장에 있는 것이 아라 다 관련이 있습니다. 

약속의 위력, 즉 다른 말로 말해서 ‘선택’의 위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인간의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도 그 약속의 영역에 들어설 수 없을 정도도 대단합니다. 그 확실한 예를 가룟 유다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가룟 유다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우리 인간들이 성취하려고 한다면, 참으로 복잡한 절차가 동원됩니다. 

일단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로 채용이 되어야 하고, 적어도 예수님을 당국자에다 팔아먹을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 하고, 그리고 권세자들은 그런 가룟 유다를 예수 집단에서 비중있는 인물로 알아주어야 하고, 따라서 예수님을 넘기는 대신 은 30량을 가룟 유다에게 넘겨줄 정도로 가룟 유다의 ‘예수님 체포작전’에 정치당국자들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야기와 절차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가룟 유다가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하고, 그래서 당국자에게 찾아가서, 받은 은 30량을 반납하겠다는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절차로서 당국자들은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고, 가룟 유다는 심경의 변화로 인해 괴로워서 자살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은 30량은 자살한 자의 더러운 돈이기에 저주스러운 사태를 처리하는 용도로 쓰여져야 하는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오다가다 죽은 노숙자들의 시신처리장으로 밭을 사야하고, 그것은 반드시 ‘토기장이’라는 직업을 가진 자의 토지를 은 30량으로 사야 합니다.(행 1:18-19, 슥 11:12-13)

그런데 이러한 일연의 절차가 실은 예레미야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뜻의 구체적인 실현이라는 점입니다(9절).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주님께서 선택한 바가 있었기에 그 선택된 가룟 유다를 통해서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이 한 치의 착오 없이 성취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죽음과 무관한 일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되는 식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식으로도 예수님께서 선택하셨기에 발생된 그 선택된 운명의 자국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가룟 유다의 자살 이 전에, 이미 예수님에 의한 가룟 유다의 선택이 먼저 수립되어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은 주변과 주위에 깔려있는 숱한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약속에 의한 저주사태’를 파악하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결코 가룟 유다의 일이 나의 구원과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 어떤 인간에게나 하나님의 약속이 우선 아닌 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사람들은 이 성경책에 관심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신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자신의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이 가룟 유다의 자살 사건에 자신들의 태도가 관여되어 있음을 앓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처형한 대제사장들은,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신 ‘저주스러운 사태’에 약속 차원에서 관여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과 선택에 의해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자신이 가룟 유다처럼 저주받기로 선택된 자라면 가룟 유다의 심정이나, 대제사장들의 행동과 동일한 행위들이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가룟 유다의 죽음과 나는 상관없다. 동시에 예수님하고 나하고도 상관없다. 예수님이 죽든 말든 내 인생은 내가 꾸려나간다. 나만 잘되고 나만 편하면 인생 대 성공이다”라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이런 마음 자세를 드러낸다는 것은 곧 가룟 유다처럼 저주받기 작정된 자이기에 필연적으로 이런 모습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가룟 유다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저주에 관한 약속’이 조금도 차질없이 이 역사를 통해서 성취되고 있음을 알고, 자신을 구원시키는 쪽으로 약속하신 그 약속의 고마움에 신명을 다 바쳐야 합니다. 


스스로를 포기한 사람들 

본문은 예수를 넘겨준 유다의 갈등과 자살, 대제사장들의 아전인수적인 율법적용, 유다와 대제사장들의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의 무죄성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여러 명 나옵니다. 그중에서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정치에 대한 야망이 매우 강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유다로 하여금 예수를 넘기도록 절차중 유다가 예수와 껴안고 인사하는 것을 신호로 삼은 것은 예수를 체포할 사람들이 예수에 대하여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유다는 예수가 속히 그의 왕국을 선포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합법적으로 선포할 방법을 궁리하다가 대제사장 일행에게 넘기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어디까지나 그럴듯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간사한 대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위해 사는 것처럼 빙자했으나 실상은 자신들이 가장 율법을 안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분명히 율법에 대제사장은 단 한명 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해마다 대제사장을 세웠습니다. 이미 이들 가운데는 도덕적으로 결격사유가 많은 사람들이었답니다.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을 살펴보며 본문의 교훈을 배우기 바랍니다. 

먼저 가룟유다입니다. 그는 자살로 인생을 마무리했습니다(:3-5). 

1) 그의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는 것이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었습니다. 확실치는 않으나 그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도리어 유익하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는 유대인들의 희망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를 빌라도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사형허가를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스스로 후회했습니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로서는 수습할 길이 없었습니다. 


2) 스스로를 위하려는 자의 최후는 한 길입니다. 

유다의 아이디어는 그 어느 누구도 생각 못할 것이었습니다.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어이없이 실패로 끝나버렸습니다. 

구원은 자신의 힘으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인생에 주어졌던 구원의 기회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입장에 있었던 베드로는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예언대로 닭이 운 다음에서야 주님의 말씀을 떠올렸고 자신이 현재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스스로가 어떤 결과에 처해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그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죄책감뿐이었습니다. 그 죄책감은 돌이킬 길을 제시하지 못했고 그는 죽음으로서 죄책감을 대신했습니다. 


3) 자기 의로 살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원칙을 무시합니다. 

예수님 죽이는데 마음을 같이 한 제사장, 백성의 장로들입니다. 입으로 "사랑, 사랑"하는 자에게 더 사랑이 없다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아십니까? 입으로 법을 외치는 사람일수록 더 법을 잘 어긴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되는 일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 있어야 진정한 성도입니다. 


나가는 말

유다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살은 무책임한 것입니다. 자살은 기회의 포기입니다. 자살은 교만입니다. 자살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실망을 안겨주는 행위입니다. 

오늘 읽으며 받은 말씀입니다. 에스겔 7: 19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물 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내리는 날에 그들의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의 걸림돌이 됨이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받고 승리하심 바랍니다.
(이상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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