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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성령으로 심으라 (갈 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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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심으라 (갈 6:6-10)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 천지 만물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여러 가지 법칙을 함께 만드셨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지구를 만드실 때 단순히 땅덩어리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도록 법칙 또한 함께 만드셨습니다. 

밤이 지나가면 낮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옵니다. 물은 수증기가 되면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에서 구름으로 모이며 비가 되어 다시 땅에 내려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만드신 법칙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만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세상에 공기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땅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있어서 공기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지구가 공기 주머니가 되어서 그 안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한데 이 인력이 약하면 공기를 잡아둘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달처럼 생명체가 살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과학은 이런 하나님 두신 법칙들을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과학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칙 중 중요한 법칙 하나가 심는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땅에 식물을 심으면 꼭 그 대로 거둡니다. 콩을 심었으면 콩을 거두고, 벼를 심었으면 벼를 거둡니다. 무우 씨를 뿌려놓고 상추를 먹으려고 기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은 종류대로 거둡니다. 그리고 심은 양대로 거둡니다. 적게 심었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었으면 많이 거둡니다. 생각해보면 신비로운 사실입니다. 땅에 씨를 심으면 그 씨는 다 썩고 거기에서 새 싹이 나오고 줄기가 자라고 잎이 맺히는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씨를 맺었던 그 식물이 거기서 나옵니다. 으레 그렇다고 여깁니다만 생각해보면 참으로 신비로운 사실입니다. 

이 땅이 생긴 이래 한번도 이것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법칙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한데 이러한 법칙이 자연계에만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 자체도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다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언젠가는 그 결과를 거두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사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하는 것, 우리의 행동, 모두가 어느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다 그대로 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언젠가는 심은 대로 거두게 됩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 생각할 것은 인생에 있어 거두는 데는 시간과 공간의 격차가 있다는 점입니다. 식물은 보통 심으면 거두는 때가 정해져 있습니다. 거두는 때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는 거두는 때가 일정치 않습니다. 오늘 심고 내일 거둔다면 누가 이 진리를 부정하겠습니까? 물론 어떤 때는 심고 금방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오늘 심었는데 몇 십 년 후에 싹이 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뿌렸다는 사실조차 다 잊어버렸는데 싹이 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부모가 심은 것을 자식 때에 가서 거두기도 합니다. 거두는 때가 이렇게 일정치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꼭 거둔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공간의 문제입니다. 식물은 심은 자리에서 싹이 납니다만 인생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동에서 심었는데 서에서 싹이 납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다고 그 사람이 내게 손해를 입히는 것 아닙니다. 내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은 엉뚱한 사람입니다. 다른 곳에서 거둡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내가 심은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심은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평범한 진리를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왜 세상이 자꾸만 어수선해지고 갈수록 살기 힘들어집니까?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솔직하게 받아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면서도 그저 이 순간만 잘 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언젠가 내가 거두어야 할 것이라는 것을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내가 언젠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쉽게 악을 행할 수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믿지 않고 있기에 악이 성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먼 훗날 거두리라는 기대가 없습니다. 30배  60배 100배 거둔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다면 사람들이 좀더 선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진리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점점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들이 내가 뿌리지 않은 씨의 열매를 내가 거둔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안 뿌렸으면 누가 뿌렸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내가 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많이 뿌렸는데 적게 거둔다고 불평합니다. 많이 수고했는데 거두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을 뿌렸는데 나쁜 열매가 맺혔다고 불만입니다. 내 수고는 선한 것이었는데 왜 결과는 이 모양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업신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정확하게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농부는 가을의 열매 거둘 때를 생각하며 봄에 씨를 뿌리고 끊임없이 가꾸어 나갑니다. 왜냐하면 심는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또한 뿌린 만큼 거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뿌리는 것 없이 거두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는 자요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오직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소망하는 대로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복을 받도록 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과연 무엇을 심어야 합니까?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느 날 노예선을 방문했습니다. 많은 죄수들이 쇠사슬에 묶여 노를 젓는 비참한 노예선입니다. 왕은 노예선을 방문했을 때 죄수들에게 무슨 죄로 오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죄수들은 이거야말로 일생에 한 번뿐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각각 자기의 결백을 말했습니다. '나는 억울한 사람입니다.' '나는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잡혀와서 이렇게 노예가 되어 고생합니다.' 전부가 왕을 붙들고 이러한 자기의 변명을 했더랍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만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죄인입니다. 여기서 이 고생을 해서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 때에 알렉산더 대왕은 말했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이 다 의인인데 의인 속에 왜 너 같은 죄인이 있느냐?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이 사람을 자유케 하여 집으로 보내주어라." 사람도 속지 않습니다. 사람도 속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속겠습니까? 그러므로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자기도 속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과 사실을 잃어버린 채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속고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심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허황된 기대를 쫓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때는 가슴 치며 후회해도 때는 늦었습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불행한 인생,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은 심는 것과 거두는 것 사이에 절대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었으면 추수합니다. 꼭 추수합니다. 심는 것은 사람이 합니다. 그러나 추수는 사람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심는 것은 내 자유와 내 마음대로 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두는 것은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일단 심었으면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거두어드리는 일이 때로는 엄청난 복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무서운 심판일 수도 있습니다. 기쁨으로 행복하게 추수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괴로움으로 부끄러움으로 추수할 때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거두는 데는 자유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야곱이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모습을 가장해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아들로부터 속임을 당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아버지는 잠깐 속았지만 아들로부터는 13년을 속았습니다. 아들들에게 속아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들을 죽은 줄 알고 13년을 슬퍼했습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확실히 믿고 사십니까? 여러분은 가을의 의미를 아십니까? 봄 여름에 걸쳐 심고 가꾼 것을 거두어들이는 가을이 말해주는 진리를 아십니까? 내가 오늘 베푸는 친절이 반드시 다른 형태의 친절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내가 오늘 행하는 선은 그 언젠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언젠가는 내 마음이 아프게 됩니다. 내가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언젠가는 내 눈에서 피가 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셔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머리로만 쉽게, 추상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확실하게 믿고 뼈저리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존경하라’ ‘나를 예배하라’ ‘나에게 영광을 돌리라’라는 말 대신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따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나도 희생하고 예수님처럼 나도 사랑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이요, 예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눔으로 심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배우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으로 같이 나누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 모든 좋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좋은 것이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배우고 가르친다고 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르치겠습니까? 말씀을 배운다고 했으니 당연히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말씀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이 말씀의 기초 즉 생명의 구원을 얻는 것이 우선입니다. 즉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받아 배우고 깨달은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마땅히 죽어야 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자리에 우리가 서지 않는다면 배운 바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구주로 모시어 들이셨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야 할 것이요 아직도 마음에 확신이 없다면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울러 예수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분들로서 계속해서 같이 나누어야할 좋은 것은 가르치는 자가 보람 있고 기뻐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천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가르치는 자는 가장 기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드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 좋은 것을 드려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좋은 것을 드린다고 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은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함께 모이는 것을 하나님과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모여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즉 우리가 모여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따라서 예배 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모여서 예배하며 기쁨으로 찬양하고 심령을 다하여 찬양 드리는 것입니다. 아울러 두 사람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깨달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함께 음식을 먹는 일과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 앞에 빈손을 보이지 말라고 했고 말라기서를 통해서는 “너희가 마땅히 내 앞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야 한다 그러면 하늘의 보물창고를 열어서 이 땅에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넘치도록 채워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잠언서 3장 9절, 10절은 “너희 재산과 땅에서 얻은 것에서 모든 첫 열매로 주님을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희 창고가 가득 차고, 너희 포도주 통에 햇포도주가 넘칠 것이다”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물, 그리고 첫 열매를 드려야 합니다. 이는 가장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이기를 힘쓰고 주 앞에 모여 예배하며 찬양하며 기쁨으로 교제하고 같이 음식을 나누며 기도하기를 힘쓰되 또한 하나님께 기쁨으로 십일조와 예물을 드림으로 필요한 모든 것으로 넘치도록 채우시는 하나님의 귀한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좋은 것을 같이 나누라고 했으니 말씀을 가르치는 주의 사자를 기쁨으로 섬기고 대접해야 합니다. 특히 모든 좋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든지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특히 가르치는 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볼 때 가르치는 자는 기뻐하고 또 기뻐합니다. 가르치는 일이 신이 납니다. 따라서 언제 무엇으로 가르치고 이끌던지 예하고 아멘 하며 순종하여 따를 때 그것이 좋은 것으로 같이 나누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 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으로 순종하면 그 길을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이끄는 대로 그냥 아멘 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더라면 그들이 그렇게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요단강을 건넬 때처럼 믿음으로 요단강으로 들어서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아니 바로 그런 모습이 가르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함께 나누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더하여 제사장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라고 했으니 마땅히 가르치는 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베푸는 것입니다. 마음에 감동이 되는 대로 대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볼 적마다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지극 정성으로 대접을 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예 집에 방을 하나 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사가 가까이 오게 되면 그 방에서 머물도록 했습니다. 필요한 가구까지 다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묵상하며 말씀을 연구할 수 있도록까지 다 갖추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녀뿐 아니라 그 가정이 복을 받았습니다. 나이 오래도록 갖지 못했던 아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동이가 갑자기 쓰러져 죽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그 아이를 다시 살려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7년 대 흉년의 때는 안전한 곳으로 잠시 피해 있도록까지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행진할 때 항상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앞서 나간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강으로 들어선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하는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장 섰습니다. 그랬기에 백성들에게 제사장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사장에게는 하나님의 그 기업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주의 종도 때로는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시내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과 싸움이 벌어졌을 때 모세는 산 위로 올라가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모세도 사람인지라 점점 힘이 빠집니다. 그래서 손이 내려옵니다. 그럴 때 아론과 훌이 모세를 큰 바위에 앉도록 하고는 양옆에서 그 손을 붙잡아 줍니다. 그랬을 때 어떻게 됩니까? 한번도 제대로 된 전투를 핸 본 적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것도 사막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잘 무장된 아말렉과의 싸움은 세상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겼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대로 순종하여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서 아말렉과 마주하여 싸웠고 아론과 훌은 모세의 팔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이 모든 순종과 협력을 통해 그 날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들이 저를 도와주고 저를 붙들어 주며 격려해줌으로 힘을 더하여 줄 때 우리는 같이 승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저를 위해 기도하고 저는 또 여러분들을 위하여 축복하며 기도할 때, 그리고 여러분들이 기쁨으로 순종하고 협력할 때 또 삶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공급할 때 우리의 길은 함께 승리하는 자요 모든 필요한 것에 넘치도록 누리는 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섬김과 복을 함께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자와 같이 모든 좋은 것을 나누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생각해 본 것이라면 우리는 또한 성도와 성도라는 수평적 관계에서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생각할 때 계속해서 심어야 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두 종류를 심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은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둡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심기보다는 육체를 만족시키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불의의 씨, 죄의 씨, 미움의 씨를 심고 있습니다. 세상 것만 좋아하고 세상 것만 추구하며 따라갑니다. 모든 시간과 재물을 오직 육신을 위하여 투자합니다. 중생한 새사람의 본성을 따르지 못하고, 타락한 옛사람의 습성을 따라갑니다. 결국 썩어질 것 밖에 거둘 것 없습니다. 

자신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는데, 내 자녀는 내게 효도해 주기를 바랍니까? 어쩌면 사람이 이토록 어리석을 수 있습니까? 내가 효도하지 아니했다면 애당초 내 자식으로부터도 효도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남을 배신했는데, 다른 사람은 나를 믿어주기만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는 세상적인 것, 육신적인 것만 잔뜩 채워놓았는데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세워주신 하나님의 일꾼들을 함부로 대하면서 하나님께 존귀함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영접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직분자들을 하나님의 사자들을 홀대한다면 그 결과로 무엇을 거두게 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심은 대로 거둡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썩어질 것 밖에 거둘 것 없습니다. 결국은 후회할 것이고 허망한 것만 붙잡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을 위하여 심는 일이 있습니다. 의와 진리와 믿음으로 심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긴 사람은 여기 있지만, 그 언젠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내가 또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내가 오늘 용서했으니, 내일은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와 복을 받게 됩니다. 신령한 일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 따라 진리와 의 그리고 사랑을 심을 때 언젠가 아름다운 열매들을, 생명의 열매들을 거두게 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 여러분의 시간을, 재물을, 수고를 사용하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죄악을 심어놓고, 이것이 싹이 날까봐 불안에 떨며, 조그마한 비슷한 일이 터져도 ‘아, 여기서 싹이 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며, 공포와 두려움에서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의와 진리를 심어놓고, 오늘 싹이 날 것인가, 내일 싹이 날 것인가 하며 그 언젠가 맺혀질 아름다운 열매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의 자식이 걸식함을 보지 못했노라”라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잠언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주시리라”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으며 과도하게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전도서는 말씀합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자식 위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식에게 무엇인가 주려고 너무 연연해합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물질 물려주는 것은 화가 될지 복이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진정 자식을 사랑한다면 선행을 하십시오. 자식들이 내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루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디서인지도, 어느 정도, 누구를 통해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맺혀집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가 되면 거둡니다. 30배, 60배, 100배 열매를 맺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오리라” 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거둡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선한 일을 해야 합니다. 특히나 믿음의 가정에 대해 더 많은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추수의 날을 바라보고 묵묵히 뿌려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갈릴리와 사해 두 커다란 호수가 있습니다. 이 두 호수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북쪽 헐몬 산에서 시작된 맑은 물이 갈릴리 호수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다시 갈릴리 호수는 요단강을 통해 맑은 물을 흘려보냅니다. 이 갈릴리에서 흘러나온 요단강물이 다시 흘러 들어가는 곳이 사해입니다. 사해는 이 지구 위에서 육지로서는 가장 낮은 곳입니다. 그 지면이 바다 수면보다도 400미터나 낮습니다. 그러니 들어온 물이 나갈 곳이 없습니다. 그 보다 더 낮은 곳이 없으니 흘러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물을 내 보내는 갈릴리 호수에는 많은 물고기가 삽니다. 그리고 주위를 기름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물을 내보내지 않는 사해에는 물고기가 한 마리도 살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사해 죽음의 바다입니다. 주위도 완전히 사막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새로운 은혜를 받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이렇게 받고 사는 은혜를 갈릴리 호수처럼 자연스럽게 주변에 베풀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선을 심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심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많은 것으로 거둡니다. 이웃에게 베풀고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땅에서 베풀고 하늘에서 받고, 작은 것을 베풀고 큰 것을 받고, 육적인 것으로 심고 영적인 것으로 받습니다. 지난 날 후회할 것 없습니다. 이제부터 심으면 됩니다. 영광스러운 추수의 날을 바라보며 오늘을 참고, 묵묵히 선을 심어가십시다. 그래서 추수의 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선한 일로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일입니다. 즉 모든 선의 가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나만 구원받고 나만 천국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만 위해서 죽으신 게 아닙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 할 수만 있다면 모두를 건져 구원하시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고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바로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잘못된 자를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에서 “교우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지도를 받아 사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온유한 심령으로 하라고 했으니까 먼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괜찮아 힘내, 그럴수록 더 힘을 내야 돼”라고 말입니다. 

예수님도 제자 베드로를 찾아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있지? 그렇다면 내 양을 돌보도록 하려무나”라고 하며 새로운 사명을 주시면서 격려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또한 칭찬을 아끼지 말고 격려를 아끼지 말며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주고 도와 줌으로 힘을 합쳐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보면 지칠 수가 있습니다. 도무지 가망성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지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때가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때가 이릅니까? 거둘 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거둘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계속적으로 선한 일을 해야 됩니다. 바로 잡아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하여야 합니다. 언제 해야 되는가 하면 기회가 있는 동안에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기회가 다 지나가고 나면 소용이 없습니다.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울며 통곡해도 안 됩니다. 따라서 기회가 있는 동안에 하되 이는 기회를 만들어서 해야 된다는 뜻도 됩니다. 

사실 볼 줄 아는 눈이 있는 사람은 기회를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곧 다른 사람들을 도울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모든 사람,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더욱 그리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으로 화합해야 됩니다. 하나 되어야 합니다. 미끄러지는 자가 있다면 마치 체인처럼 미끄럼을 막아 주십시오. 넘어지는 자가 있다면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시오. 슬퍼하며 탄식하는 자가 있다면 옆에서 지켜주며 위로해 주십시오. 기뻐 즐거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결국 내 일처럼 여기라는 말입니다. 내 일이 아닌데 하고 외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주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하기 힘든 일이라면 여럿이 힘을 합치십시오. 그래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든든히 서는 성도들이요 다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씨앗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좋은 씨앗입니다. 두 번째는 나쁜 씨앗입니다. 우리는 심기 전에 우리가 무슨 씨앗을 심어야 할 것인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은 그의 책 “배상”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범죄와 그에 따른 형벌은 같은 줄기에서 자라난다. 그러나 형벌이라는 열매는 쾌락의 꽃이 활짝 피었을 때는 그 속에 숨기워 보이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 수단과 목표, 씨앗과 열매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는 이미 원인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목표는 수단 속에, 열매는 씨앗 속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시간을 바치면 그것이 씨앗 시간이 됩니다. 사랑을 바치면 씨앗 사랑이 됩니다. 돈을 바치면 씨앗 돈이 됩니다. 고독한 사람을 위해 우정을 나누면 씨앗 우정이 됩니다. 하나님은 심은 종류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만남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행복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로 같이 만나 이 아름다운 길을 같이 걸어가게 해 주셨기에 행복합니다. 이렇게 다같이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 하필이면 이런 사람과 만나게 하셨을까가 아니라 세상 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 복인 줄로 믿으십시오. 옆에 있는 서로가 내게는 복이라고 믿으십시오. 우리는 함께 배를 탄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마음을 같이하여 힘껏 한 방향으로 노를 젓는 것입니다. 

서로가 흔들면 다 같이 죽습니다. 제 각기 노를 저으면 배는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힘을 합쳐 한 방향으로 같이 노를 저으면 배는 힘차게 앞으로 달려나갑니다. 이처럼 우리도 힘을 합치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일을 함께 이루어나갈 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함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배우는 자로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나누며 선한 일에 힘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다같이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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